토마토 스파게티

by 수지리

엄마는 예전부터 손님을 많이 치렀어서 그런지, 4인가족인데도 항상 음식을 대용량으로 했다. 음식을 한 번에 많이 해두고 며칠에 나눠서 먹곤 했는데, 그중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바로 토마토 스파게티였다. 우리 엄마가 끓인 토마토소스에는 항상 고기가 넉넉히 들어있었고, 식감 있게 씹히는 양파가 정말 맛있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이후 고추를 수입하고 나서야 빨간 김치를 먹게 되었듯이, 이탈리아 역시 16세기 중반 스페인 및 유럽에 토마토가 전파된 후 18세기 후반부터 파스타와 함께 요리재료로 자리를 잡아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 전,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사람들이 남미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다가 잡초처럼 토마토가 자라는 걸 봤는데, 처음엔 먹지 않았지만 점차 토마토가 옥수수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식재료가 되었다고 했다. 신부님은 우리 삶의 잡초 같은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감사하는 행위를 독려하기 위해 토마토의 메타포를 이용하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토마토 이야기가 진짜 사실인지 궁금해졌고,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앤드류 스미스의 저서 《아메리카의 토마토》에 보면 , 스페인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고산지대에서 토마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토마토가 식재료로 사용된 기록은 없다고 한다. 토마토가 독성을 지니고 있고, 남아메리카를 에덴동산과 동일시하며 토마토가 선악과라는 인식이 더해져 기독교도들에게 냉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옥수수밭에 잡초로 있었는지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은 식재료가 아니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산 마르자노 (San Marzano)라는 토마토 품종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파스타 소스와 피자에 적합하며, 로마 (Roma) 토마토 역시 조리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모양도 우리가 먹는 토마토와 달리 약간 길쭉하게 생겼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토마토의 아삭한 식감을 살려 생으로 먹거나 샐러드에 활용해서 먹는 경우도 많다. 껍질 안에 과즙이 탱글 하게 살아있는 토마토는 지금까지도 채소인지 과일인지 끊임없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토마토를 사과처럼 6등분으로 잘라 설탕을 솔솔 뿌려 먹기도 한다. 우리 집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엄마는 토마토를 '도마도'라고 부르곤 하셨다. 외할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다. 요즘엔 가끔 우리 오빠가 장난꾸러기처럼 우리 아이들 앞에서 일부러 토마토를 '도마도' 라고 부른다. 그럴 때면 우리 아이들은 삼촌의 장난에 까르르 웃는다. 발음이 웃기고 재밌다. 도마도.


어렸을 땐,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이라는 생각보다, 경양식집에 가면 있는 '양식'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식의 서양 음식이었다. 요즘 이탈리아 비스트로에 가서 먹는 파스타와 사뭇 달랐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 엄마가 서양 국수라며 파스타 면을 삶아 장갑을 끼고 소스에 비벼 총각김치와 내었던 장면처럼, 국적 불명의 양식이었다.

엄마는 토마토를 십자가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 삶는 것부터 시작했고, 간 고기와 갖은 야채를 넣고 푹푹 끓이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블렌더로 갈아서 농도를 맞췄다. 그래서 항상 처음 갓 소스를 만들었을 때는 조금 묽었고, 여러 번 데워 먹다 보면 더 되직한 농도가 되어있었다. 외국 생활을 많이 하다 보니, 어디서 레시피를 배우신 건지 엄마는 그 시절 월계수잎 같이 생긴 허브도 넣었던 거 같다. 먹다 보면 이파리 같은 게 있어서 건져냈던 기억이 있다. 한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얼마 전 내게 우연히 우리 엄마의 스파게티에 대한 추억을 얘기해 주었다. 친구는 엄마의 스파게티를 미트소스 스파게티로 기억했고, 그 맛이 지금도 기억나는 맛이라고 했다. 그 동창은 나와 함께 예중입시를 하던 친구였다.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을 전공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댔다. 그 바람에 오랜 기간 동안 딸이 피아노 신동이라고 믿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엄마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다. 대신 난 매일 미술학원에 가서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학원에 오랜 시간 있다 보니 우리는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원장선생님께서 아이들이 한 끼라도 따뜻하게 먹었으면 좋겠다며 날짜를 정해서 엄마들에게 한 번씩 저녁을 원으로 준비해서 오도록 권하셨다. 누군가는 집밥을, 누군가는 해피밀을, 누군가는 치킨을 준비해 오셨고, 우리 엄마는 스파게티를 해오셨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먹은 그 스파게티가 너무 맛있어서 친구의 엄마는 우리 엄마에게 레시피를 배우셨다고 했다. 친구의 입을 통해 듣는 우리 엄마의 기억은 너무나 따뜻하고 자랑스러웠다. 흑백요리사에 나온 그 어떤 요리사보다 더 유명한 요리사 같았다. 엄마의 스파게티 소스는 꼭 토마토 스튜처럼 진했다. 소고기 반 토마토 반 같은 진한 소스였는데, 그걸 갓 삶은 면 위에 올려 잘 비벼 먹으면 꾸덕한 마치 자장면과도 닮아있었고, 정말 맛있었다. 나는 그 레시피를 배우지 못했지만, 내 오랜 친구의 엄마의 손에 전해져 아직도 그 스파게티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브라질에서 2012년부터 2년 정도 살았다.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태어나 여러 나라를 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가지고 살게 된 국가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여러모로 내게 매력이 넘치는 나라였다. 한국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사면 바코드를 사는 느낌이었다면, 브라질에서 장을 볼 때면 내 손에 싱싱함(fresh)을 잡는 느낌이어서 항상 기분이 좋았다. 첫째 딸은 편식이 조금 있었다. 아기 때부터 뭐든지 조심조심 시작하는 그 아이에게 새로운 질감과 맛을 입안에 넣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한입을 배어물면 톡 터지는 과즙이 있는 과일이나 안에 물컹거리는 질감이 있는 채소는 먹지 않았다. 당연히 토마토도 그중에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물론 큰 토마토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유난히 면을 좋아하던 딸은 브라질에서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토마토소스의 단맛은 생 토마토와는 너무나 다른 맛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단 푹 익어서 곱게 으깨져 있는 소스에선 토마토 특유의 식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파울루라는 도시에 살았는데, 그 안에서도 한국인들이 모여서 사는 아파트 단지가 두 개 있었고, 우리 역시 그 단지 중 한 곳에 살았다. 그 아파트에는 클럽하우스가 있어서 수영장, 헬스장 사우나 그리고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파스타 뷔페가 열렸는데, 그날은 셰프들이 즉석에서 우리가 손수 고른 면과 소스에 갖은 야채와 식재료를 넣고 요리해 주는 날이었다. 그날은 집밥을 즐겨하는 나도 종종 클럽에 가서 아이들과 식사를 하곤 했다. 토마토소스에 해산물을 넣거나 간단하게 버섯이랑 햄만 넣고 토마토 스파게티를 주문하면, 그날은 딸도 나도 행복하게 포식하는 날이었다.

우리 엄마는 첫째가 7살 때 돌아가셨다. 7년 동안 나와 함께 첫째를 키워주신 엄마는, 브라질에 놀러 오셨을 때 파스타 뷔페를 정말 좋아하셨다. 그날은 모두가 두 그릇 이상씩 배불리 먹고, 클럽에서 집까지 단지 내 산책을 하고 돌아올 때면, 엄마와 함께 산다면 어디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브라질에 오셔서 내가 즐기지 못하던 모든 공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가셨다. 마치 나의 이름을 그가 불러주자 꽃이 되어버렸다는 그 은유처럼, 엄마가 나를 엄마로 만들어주셨다. 엄마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엄마를 죽음으로 내 몰아친 암은 엄마의 두 번째 암이었다. 첫 번째 암은 그보다 10년 전에 찾아왔었고, 그땐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고약한 암세포가 엄마의 몸에 여러 군데 전이되어 수술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힘든 경우였지만, 엄마는 멋지게 여전사처럼 암과 싸워 이겼다. 그 이후 딱 10년을 더 사셨다. 임종 전에 엄마는 내게 그러셨다. 엄마에게 그 10년은 보너스였다고. 그 보너스 아주 잘 살다 가신다고. 그 10년 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그 10년 동안 엄마는 나를 엄마로 키워주고 가셨다.

‘도마도’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브라질 아파트 클럽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받아먹던 첫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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