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빈대떡은 조선시대부터 서울의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전이다. 녹두전과 녹두빈대떡은 들어가는 재료도 같고 맛도 같으나, 빈대떡이 더 서민음식에 가깝게 두텁고 크게 부쳐진다고 한다. 왜 녹두전에 ‘빈대’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을까? 빈대처럼 납작하게 부쳐서 라는 설과, 가난한 사람들이 큰 전을 부쳐 먹어 빈대 같아서 라는 설이 있고, 손님을 대접한다의 의미의 ’ 빈대‘와 떡의 합성어라는 설도 있다. 지글지글 기름 냄새 가득 녹두빈대떡을 부쳐 파는 모습은 대표적인 서민 재래시장의 상징적 모습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제사 때를 기다렸다. 신랑은 종갓집 16대 종손이라 일 년에 십 수 번 준비하는 제사가 그렇게 반갑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태어나 많은 시간을 타지에서 보낸 나는 명절이나 기일에 제사를 준비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고 기다려질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전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고, 보고 싶었던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었다. 제사상에 올라온 음식 가짓수를 세서 일기장에 하나하나 모양과 맛에 대해 쓰기도 했다. 나는 제법 어린 나이부터 부엌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큰 손님을 차리면 돕던 습관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생각보다 빠릿빠릿 잘해서 고모들이 며느리보다 낫다며 주방 보조로 선호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사촌올케들이 내가 좀 미웠을 것도 같다.
집집마다 제사음식의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어느 집은 산적을, 어느 집은 찜갈비를, 어느 집은 L.A갈비를 준비하고, 또 어느 집은 고추전을, 어느 집은 녹두전을, 어느 집은 새우전을 준비한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데, 고향이 어디인지와, 준비하는 맏며느리가 어떤 메뉴를 고르냐에 따라서 주로 정해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 친할머니는 녹두빈대떡을 참 맛있게 하셨다. 친할머니가 해주던 음식 중에서 특히 아빠가 너무 좋아하고 잘 드셔서, 엄마가 항상 신경 써서 준비하셨던 음식 중에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가 녹두빈대떡과 어리굴젓이었다. 할머니는 특히 빈대떡을 부칠 때 김치를 쫑쫑 썰어 고사리, 숙주와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같이 넣으셨다. 고소함은 배가 되고, 아삭함까지 일품인 녹두빈대떡만큼은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맛있게 하셨다. 명절이나 제사 때 먹고 남은 녹두빈대떡은 두세 장씩 겹쳐서 쌓아 알루미늄 호일로 싸서 냉동고에 보관했다. 자연 해동해서 팬에 데워 먹으면 꼭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우리 엄마가 시집오기도 전에 일찍 생을 마감하신 친할아버지 없이 홀로 7남매와 그 사촌들까지 키우신 할머니는 항상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시며 오래 살아서 고생이라고 투덜대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난, “안돼 할머니, 나 결혼하는 것도 보고, 딱 나 닮은 딸 낳는 거 다 보고 돌아가셔야지.” 라며 때 쓰듯 할머니 품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아버지는 7남매 중 여섯째였는데, 위로 딸을 세명, 아래로 아들을 네 명 낳으신 할머니는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으셨다. 하지만 고모들 중 두 분은 그 옛날 분이신데도 162cm 표준키인 나보다 키가 크셨고, 큰아버지들도 모두 크셨는 데다가 우리 아빠는 185cm의 장신이었다. 내가 결혼한다고 남편과 인사하러 할머니를 처음 뵈러 갔을 때, 할머니는 웃으며 남편을 반갑게 안아주셨더랬다. 드디어 올려다보지 않고 인사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겨 너무 좋다며 농담하시는 우리 할머니의 환했던 웃음이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달에 첫째 임신 소식이 왔으니, 내가 딸 낳는 걸 보진 못하셨지만 가시는 길에 좋은 소식을 주고 가신 거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다. 손녀딸이 그렇게 조르던 대로, 손녀딸 원대로 해주고 가셨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쩐지 녹두빈대떡은 이제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기억대로 한번 더듬더듬 만들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픈 아빠의 마음에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직접 만든 빈대떡을 부쳐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빈대떡은 맵쌀을 덜 불려 완전하게 갈리지 않아 중간중간 씹히는 바람에 탈락. 두 번째는 맵쌀 신경 쓰느라 숙주를 안 데치고 생숙주를 넣어 비린내가 나서 탈락. 세 번째가 돼서야 어느 정도 할머니가 해주셨던 빈대떡같이 되었고, 따끈하게 겉바속촉으로 여러 장 부쳐 엄마아빠에게 가져다 드렸다. 엄만 내가 직접 녹두 껍질부터 뿌려서 벗겨냈다는 사실에 놀라셨고,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두세 장을 뚝딱 드셨다.
난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친가에 가서 제사를 지냈고, 결혼하고 나서는 시댁에서 제사를 지낸다. ‘시집온다’는 말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결혼하여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표현 하며, 그렇게 이 씨 집안에 시집온 우리 엄마는 아빠집 제사를 지냈고, 또 오 씨 집안에 시집간 나는 남편집 제사를 지낸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집 제사 음식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경상도 대구가 고향인 우리 엄마는 서울 집으로 시집와서 녹두빈대떡을 부치기 시작한 것이리라. 나는 시집가서 삼색꼬치전을 처음 부쳐보았다. 그런데 꼬치전을 제외한 다른 전에 한해서는 비교적 유동적이라서, 난 내가 어려서부터 먹던 빈대떡이나 깻잎전도 부쳐가고 딸들이 잘 먹는 육전도 부쳐간다.
브라질에서 딸아이가 학교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학교에 이메일을 썼는데, 답장에 수신인이 희한하게 적혀왔다. Dear Mr. , Mrs. Oh and Mrs. Lee. 내가 딸아이와 성이 다르자, 그들은 내가 남편과 결혼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우리 딸이 엄마는 나 한 명밖에 없으며, 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신 씨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릴 적 학교에서 Mrs. Lee로 통했던 사실이 기억났다. 내가 왜 엄마 아빠가 준 성을 따르지 않고 미세즈오가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힘들어, 엄마가 예전에 미세스리가 되었던 거와는 다르게 나를 미세스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당시 난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마치 잃었던 이름을 찾기나 한 것처럼. 그런데, 여성이 결혼하면서 남성의 집안에 “편입”되는 개념에 따라 그 상징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서양의 문화다. 거칠게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더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일 거라 여겼는데, 우리나라는 서양과는 달리 부인이 남편의 성을 안 따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중세 유럽 같은 경우에는 가문의 명성을 지키고 재산 상속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가족 이름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내가 뿌듯해했던,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는, 우리 문화는 결국 며느리는 가족 구성원이긴 하지만, 본관이나 족보에서는 ‘외부인’ 으로 취급하는 ‘경계 짓기’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녹두빈대떡은 친할머니의 밥상이었지만, 엄마를 거쳐 나의 메뉴가 되었고, 시댁 제사상에 오르는 전이 되었다. 밥상은 그 어떤 다른 문화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솔직하다. 얼마 전 유행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이가 남자들만 먹던 상에서 반바퀴 돌아 앉아 자기 부인과 딸, 그리고 자기 엄마하고 같이 밥을 먹었던 게 일상 속 작지만 가장 큰 혁명이었듯, 내가 차리는 밥상 안에서도 여러 가지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녹두빈대떡, 종아에 과슈, 2025 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