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의 저서 <불쉿 잡>에서 현대사회의 직업 중 40퍼센트는 불쉿 잡 - 쓸모없고 무의미한 허튼 직업-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직업이 불쉿 잡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저자는 모든 직업에는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불쉿 업무가 들어있다는 게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봤다.
교사의 불쉿 업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학교 일과 시간과 관계없는 학생 관련 일들
학원에서, 놀이터에서, 스포츠센터에서, 친구 집에서 놀다가 다툼이 벌어졌을 때 상당수의 학부모는 담임교사에게 연락한다. 문제가 발생했고 해결을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말이다. 교사나 학부모가 동석한 상황이 아니므로 두 명 이상의 해당학생과 학생들의 담임은 개별로 상황을 파악하고,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지도해야 한다. 학교 밖에서, 일과 시간 외에 일어난 일이므로 상당수 증언이 엇갈리고 이 경우에 목격자 등을 불러 진상을 파악하고 지도한다. 수사권도 없는 교사에게 학부모는 명확한 규명을 바라고, 판결권도 없는 교사에게 피해를 읍소하며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이 과정에서 우리 반 아이가 아닌 학생을 만날 때, 학생에게 말할 때의 말투, 상황 조사를 위해 쓰게 하는 글 등은 모두 학생에게 불안함과 두려움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동학대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2. 교육과 보육을 혼동하는 양육자와 정책입안자들로부터 생겨난 보육 활동
2000년대 들어서부터 어린이집을 무상으로 다니며 기관생활을 일찍 시작한 아이들이 늘어났다.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영유아기를 가정보다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경우가 생긴 것. 어린이집 교사와 함께 아이를 양육한 것 같은 마음을 느끼는 부모도 있으며, 누리과정이 어린이집에도 적용되어 첫 학교인 유치원 대신 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간을 보내면서 부모들에게 기관은 ‘교육’보다 ‘보육’의 기능을 더 많이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생각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확 바뀌진 않는다.
양육자들은 이렇게 교육과 보육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식 혹은 교육 안에 보육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또한 낮은 출생률이 양육 환경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정책입안자가 출생률을 늘릴 손쉬운 해법으로 학교를 가리키기에 교육 기관인 학교가 보육의 기능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3. 학교가 온마을로 바뀌면 교사는 교육과 돌봄을 함께 떠안아야
심지어 정희진과 같은 학자는 학교가 돌봄 공동체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한다.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저자는 코로나 19로 인해 ‘가장’ 고통받던 집단은 엄마라고 보았으며, 학교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는 엄마들이 24시간 아이들을 돌보고 공부를 독려하고 세끼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전쟁 같은 일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전쟁 때도 학교의 문은 열지 않았냐며)
p 132. 학교의 역할은 공부를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다. 학교는 ‘가정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돌봄 기관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가족도 학교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말 때가 왔다. 학교를 없앨 수 없다면, 다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p 133. 치솟는 사교육비, 폭력과 학습 포기가 만연한 학교, 돌봄에 지친 부모(특히 엄마들)를 위한 대안은 학교를 공부와 함께 일상의 돌봄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0년 전에는 학급당 학생 수가 8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이 많았다. 지금은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많지 않다. 학교와 가정이 돌봄을 분담해서 총체적 돌봄이 가능한 교육은 불가능할까. 오히려 가정이 돌봄을 전담하는 지금 현실이 훨씬 비정상 아닌가.
정희진은 이 글의 말미에서 ‘융합’의 뜻은 현실에서 출발해 필요한 신천으로 옮겨가는 이동의 사고이자 해결책을 찾는 전술적 사고라고 주장하며 아예 학교와 가정의 융합을 바란다.
호모 데우스, 미래의 교사상
소위 수학여행 버스 똥사건으로 교사들은 아동학대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한편, 학생과 관련한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매시간 매초 AI처럼 빈틈없는 판결을 내려야 하는 의무를 부과받았다. (당연히 그 의무는 주말에도, 잠자리에 드는 시각에도 적용된다) 직무와 관련 없는 상황에서도 고도의 도덕성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사람이다. 회사원다운 회사원, 환경미화원다운 환경미화원, 변호사다운 변호사가 없다는 말은 생소해도 ‘교사다운 교사가 없다’는 한탄은 학교 밖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시대가 바라는 ‘교사다운 교사’는 학교 안팎에서 고도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감정조절에 실패한 부모의 응대까지 완벽하게 하면서, 합당하고 효과적인 상담을 하면서, 10과목 가까운 교과를 가르치면서, 진로지도부터 마약예방교육까지 갖가지 범교과 수업을 하면서, 연간 백 시간 가까운 의무 연수를 받으면서, 담당행정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인간이다. 하나 더 추가된다. 교실은 돌봄 공간이 되고, 교사는 매년 20~30명의 학생들을 마음으로 낳아 길러야 하는 사람이 되고, 1년간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히 앞으로 교사는 신성을 갖춘 신적 인간, 호모데우스가 되기를 요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