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여행.

돌고 돌아 마지막에 만날 그날까지, 우리가 다시 떠날 그곳으로.

by 온오프

“안 된다 할매, 춥다. 목도리 해야 된다니까.”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할머니를 다그쳤다. 연신 괜찮다며 웃어 보이는 얼굴에, 그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새빨간 목도리를 칭칭 둘러 준다. 주름진, 유난히 차가운 그 손을 꼭 붙잡고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꿈속인데도, 아니 어쩌면 꿈이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손의 가벼움이 괜히 가슴을 찌른다.

“할매, 길 얼어가 미끄럽다. 조심해라.”

무심한 듯 던진 말투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표현 속에는 언제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마음이 숨어 있다. 열 살 때부터 열한 해를 키워 준 나의 할머니와 떠나는 첫 여행. 왜 하필 이 추운 겨울일까. 어쩌면 할머니가 떠난 그해 12월을, 조금은 다른 기억으로 바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만 되면 괜히 더 슬퍼지고, 겨울만 되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 이유도, 그 사무치는 그리움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할매, 내 이제 운전 잘한디. 봐라. 옛날에 할매 살아 있을 때 내 운전 연습하던 거 기억나제? 그때 면허 따고 맨날 장롱면허로 쳐박아 놨다가, 인제야 운전한다. 할매가 내한테 맨날 그랬다 아이가, 엄살쟁이, 겁쟁이라고. 할매 말대로 완전 겁쟁이였는데, 인자 뭐 베스트 드라이버다.”

나는 혼자서 재잘재잘 떠들며 할머니와 함께 달린다. 잎사귀를 모두 잃은 저 앙상한 나무들조차 할머니와 함께 보니 괜히 더 아름답다. 햇살에 비친 윤슬이 눈부실 만큼 반짝이는데, 그렇게 눈부신 풍경 앞에서 나는 또 눈물이 난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여행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여름에 계곡에 간 것,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은 것, 가을에 고구마를 캐던 것. 그저 일상의 연장처럼 스쳐 지나간 소풍 같은 날들뿐이었다.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날도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래서 후회로 얼룩진 나날들을 품은 채, 이렇게 꿈속에서라도 한겨울의 여행을 떠나 본다. 꿈속의 나는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안다. 내가 붙잡은 이 손에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만남이 꿈임을 또렷하게 알려 준다. 그래도 좋다. 꿈이라도 좋다. 이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할매, 어떻노. 할매 생에 강원도는 처음 와보제? 내 인생 여행지가 강릉이다 아이가. 저 바다 색깔 봐라. 부산 바다 하고는 딴판이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이곳을 할머니와 함께 걷는다. 불어오는 겨울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모래사장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이만큼 걸었으면 지칠 법도 한데 전혀 힘들지도 않다. 꿈이어서, 그래서 더 좋다.

실컷 사진을 찍는다.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할머니, 내 할머니. 가슴을 치며 후회했던 일들을 이제서야 한다. 수천 장의 사진을 남기고, 할머니의 목소리를 담아 두고, 원 없이 이름을 불러 본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 앞에서, 늘 생선 머리와 가시만 드시던 할머니의 밥숟가락 위에 살이 도톰한 생선을 얹어 준다. 그 모습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꿈에서라도 보게 되다니. 그래서 나는 또 스스로가 한없이 한심해진다.

“할매, 할매랑 같이 여행 가믄 내가 진짜 오만 거 다 해줄라 캤는데. 다 해줄 수 있을 때가 됐는데, 할매가 엄따. 같이 밥 묵고, 같이 걷고,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걸 그리 못했는지… 그땐 내가 어리가, 그저 친구가 좋고, 할매는 늘 그 자리에 있을 줄만 알았다 아이가.”

북적이는 시장에서 할머니가 좋아하던 것들을 한가득 담아 본다. 떡, 단술, 홍시. 꿈인데도 헛웃음이 난다. 할머니랑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으니, 꿈속에서도 결국 시장 구경뿐이다. 어린 나는 할머니와 시장에 가는 게 싫었다. 비린내 나는 생선 봉지를 들고 다니는 게 창피했고, 친구라도 마주치면 숨고 싶었다. 지금은 그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보란 듯이 할머니와 시장을 걷고 있다.

“할매, 맨날 할매가 시장 가믄 유모차 끌고 댕겼다 아이가. 무게가 뒤로 쏠린다고 앞에 벽돌 하나 줄로 묶어 매달고 가는 게 쪽팔렸다. 근데 할매는 그 유모차에 우리 먹일 거 잔뜩 싣고 왔제. 몇 번이나 모른 척 숨었던 내를, 지금 보면 진짜 때리고 싶다. 그기 다 할매 사랑인데, 맞제.”

카페 테라스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신다. 못다 한 말들을 하나씩 꺼낸다.

“할매가 잘 키워 줘가 나는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 아이가. 할매도 하늘에서 보고 깜짝 놀랐제? 아를 셋이나 낳은 거 보고 좋았나? 아니믄 걱정됐나? 아마 내 걱정도 하고, 좋기도 했을기라.우리 애들 이쁘제. 할매 있었으면 내보다 더 이뻐해 줬을 긴데.”

눈앞이 흐려진다. 울음을 삼키며 말을 잇는다.

“아 키우는 거, 쉬운 거 아니더라. 할매는 우째 우리 셋을 키웠노 싶다. 생각하면 할수록 또 미안하고, 좀 더 도와줄 걸, 말 좀 잘 들을 걸… 아 낳고 철 들었다 아이가. 근데 할매, 할매가 너무 빨리 가삐따. 아프고 하루 만에 가삐면 우짜노. 못 해 준 것만 생각나고, 자꾸 보고 싶고, 할매 따라 가고 싶드라.”

손을 꼭 잡아 본다. 그리고 안아 본다. 느껴지지 않는 할머니 냄새가 나를 또 울게 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이게 꿈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 이건 꿈이다. 하지만 깨고 싶지 않은 꿈. 또 꾸고 싶은 꿈이다.

“할매, 진짜 진짜 고맙데이. 할매가 내 배 아플 때 밤새 쓰다듬어 주던 손도, 김치 불고기도, 그냥 할매랑 같이 있던 그 시간들이 다 그립다. 지금도 할매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은데, 그러면 할매 마음이 더 아프겠제. 그래서 그냥 이 말만 말할게. 사랑한다고. 마이 사랑한다고. 할매 사랑해.”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이 꿈에 머물고 싶다.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끝없는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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