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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Oct 19. 2023

[단편 소설] 나이티안

 하얀 바탕에 검은 네모. 그 위의 푸른 글씨. 19:00.

 얼어붙었던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장면이다.

 냉동액의 으슬함을 털어내며 목 패치에 꽂힌 수면제 주입기를 뽑는다. 12시간 동안 죽어있는 일은 10년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좋은 밤입니다, 나이티안 F-332.”

 지겨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흘러나온다. 마음 같아선 당장 캡슐에서 나오고 싶지만, 허리를 감싸 쥔 혁대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

 “3026년 5월 31일. 오늘의 일과입니다. 20시,”

 “1차 작업.” 안내음이 귀에 박히기 전에 나의 목소리로 덮어버린다. 3650번도 넘게 들은 말들이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읊어줄 수 있다.

 “22시,”

 “밤 식사.”

 “24시,”

 “2차 작업.”

 “2시,”

 “새벽 식사.”

 “4시,”

 “3차 작-”

 “광장 집합.”

 아, 그렇지. 오늘이었지.

 “6시, 캡슐 귀환.” 안내음이 마저 말한다. “일정에 맞춰 검은 표시등에 따라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도 하이브에서 벗어날 날에 하루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방송 종료음과 함께 마침내 혁대의 힘이 풀어진다. 혁대를 벗고서 유리 캡슐의 문을 열고 나와 새하얌뿐인 방에 발을 디딘다. 캡슐의 세 배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방이다. 그 안에서 할 짓도 없으니 오래 있지 말라는 거다.

 방 앞쪽의 문이 어서 자길 열고 나가라는 듯 검게 껌뻑껌뻑 빛난다. 지금 저걸 열지 않으면 곧 정찰대가 날 이탈자로 간주하고 찾으러 올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눈을 속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었다가 검기를 반복하는 문을 밀어젖힌다. 손길이 닿자 문은 더 요란하게 번쩍대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단 한 곳에 정확히 꽂혀 있다.

 문의 옆면에 잠금장치 고정대가 들어갈 작은 구멍이 보인다. 주머니에서 고무 조각을 꺼내 능숙하게 구멍 안으로 끼워 넣는다. 구멍 깊이까지 측정하여 작업 시간에 몰래 만들어둔 부품이다. 언제나 그렇듯 크기는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문을 닫으며 복도로 나온다. 잠금장치가 끼워지는 철컥, 소리가 내 발걸음을 매섭게 뒤따른다. 그와 함께 문도 얌전히 흰색으로 돌아간다. 이걸로 정찰대의 모니터에는 K-332이 냉동수면실에서 나왔다고 표시되리라. 정말이지 허술하다. 고맙게시리.

 곧 문 뒤로 익숙한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있던 캡슐이 천장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지잉, 한 번. 다른 캡슐이 그 자리를 채우는 위잉, 한 번. 그 진동은 내 목구멍까지 비집고 들어와 온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일과 안내 방송은 한 달도 안 돼서 지겨워졌는데, 이 단조로운 기계음은 10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눈동자만 흘낏 올려 주위를 살핀다. 다른 나이티안들이 하나둘씩 복도로 나오는 게 보이지만, 그중 날 신경 쓰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물론 누가 신경 쓴대도 나의 다음 행동을 멈출 생각은 없다. 모든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오늘이다. 이탈자로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널 보고 말아야 했다.

 흰색으로 변한 문을 발로 툭 밀어 본다. 멍청한 잠금장치는 내 고무 부품으로 막혀서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얌전히 방 안으로 돌아간다.


 수감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 짓거리를 할 때마다 단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혹여나 이 문 뒤에 네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그래서 어제가 너의 마지막이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오늘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그 찰나 동안 너의 부재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찾아왔다. 그래서 마침내 너의 모습이 눈에 담겼을 때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너는 그 새하얀 방 한가운데에 홀로 푸르게 얼어 있다. 캡슐 안이 조금 추웠는지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벌써 허리까지 길어버린 머리칼이 산란하게 흐트러져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너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일말의 감정 없이 고요하다. 금방이라도 그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씰룩일 것 같은데, 그런 네 심장이 지금은 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가끔 서글프다.

 너의 머리색은 무엇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흐르는 물줄기 같달까. 색이 없는 듯하다가도 푸른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고, 조금만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절대 손에 쥘 수 없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영롱함을 눈에 담을 때마다 나는 또 한 번 확신하고는 한다. 하이브에서의 첫날, 문고리를 놓치는 바람에 이 방에 갇히게 된 건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는 걸.

 천천히 시선을 훑어 올리며 오늘의 너를 샅샅이 담아둔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표정으로 잠이 들었는지, 얇실한 손톱은 얼마나 길었는지, 귀밑의 점은 여전한지. 내가 살아온 모든 하루의 시작과 끝이 된, 숨을 쉬는 것보다도 당연한 본능이다. 그런 너가 사라져도 난 여전히 숨을 쉴 수 있을까.

 만족스러울 만큼 너의 잔상이 쌓이면, 마침내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을 그 너머의 네 얼굴에 겹쳐본다. 내 눈동자가 너의 눈꺼풀에 얹힐 때의 황홀감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단 한순간이라도 더 네가 눈을 떠 나를 바라본 것만 같다는 착각을 하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내 시커먼 눈동자를 너에게 얹어본다.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오늘만큼은 황홀이 아닌 분노에 휩싸인다. 오늘이 너의 마지막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너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너와 알고 지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너의 눈동자 색이 궁금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물론 굳이 보지 않아도 나는 너의 눈동자가 그 머리칼보다도 푸를 거라고 확신한다. 이것 또한 본능이다.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파랗게 일렁이는 너의 눈동자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그저 내 눈으로 직접 그 빛깔을 담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아닌, 맑은 눈이 그려진 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너는 데이안이고, 나는 나이티안이다. 낮과 함께 너가 깨어나면 나는 깊은 잠에 들고, 밤과 함께 내가 깨어나면 너가 깊은 잠에 든다. 우리는 마치 두 개의 육체로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너와 나의 심장은 절대로 함께 뛸 수 없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다.

 그 순간 거센 노크 소리가 문을 뒤흔들더니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진다.

 “F-332, 정찰대다. 그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냉동수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예상대로 F-153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그 앞에 서 있다.

 “어이, 삼삼이. 좀 놀랬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내가 방에서 나오며 불평한다. F-153은 본인의 장난이 안내음만큼이나 진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럼 332를 삼삼이라 부르지 뭐라 불러?” F-153이 깐죽댄다. “너는 오늘까지도 청승 떨고 있었냐. 그 데이안 여자애가 그렇게 이뻐? 나도 한 번 보자.”

 F-153의 손이 문고리에 닿기 전에 잠금장치 구멍에 꽂아둔 고무 조각을 홱 뽑는다. 문은 철컥, 소리와 함께 그의 손 앞에서 잠긴다.

 “꿈 깨.”

 이로써 너에게로 가는 문이 완벽히 잠겨버렸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자각된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외면하며 부품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아니,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다. 어떻게든 다른 문을 찾아낼 거니까.

 애써 덤덤하게 걸음을 떼어 복도를 걸어 내려간다. 이미 모두가 공정소로 내려간 터라 안 그래도 밋밋한 복도는 텅 비었다. F-153이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쫓는다.

 “이 복도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안 아쉬워?” 그가 묻는다.

 “하얗기만 한 게 볼 게 뭐 있다고 아쉬워해.”

 “그럼 나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안 아쉬워?”

 “시끄럽기만 한 게 뭐 이쁘다고 아쉬워해.”

 그 말에 F-153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에 주먹을 박는다.

 “나도 됐다, 새꺄. 너는 머릿속에 그 데이안 밖에 없지? 하여간 정 없는 놈.”

 분한 게 안 풀린 듯 그가 주먹을 한 번 더 치켜세우지만, 가볍게 피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본론이나 말해. 너도 딱히 나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다.

 “잘 아네.”

 그의 표정에 재밌다는 듯한 웃음이 다시 떠오른다.

 “이따 밤 식사 때, H-242랑 세탁실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그때 누가 나 찾으면 너가 좀 둘러대 주라고. 대충 망까지 봐주면 더 좋고.”

 “허구한 날 그렇게 여자랑 뒹굴면 안 질리냐. 그러다가 정찰대한테 걸리면 어떡하려고.”

 “니가 그 말 하니까 되게 웃긴 거 알지? 방금도 잡혀 들어갈 짓 하다 온 놈이.”

 F-153이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한다.

 “그리고 12시간 후면 여기도 끝인데 오늘만큼은 당연히 그래 줘야지! 너도 임마, 몽상 좀 그만하고 정신 차려. 내일이면 그 데이안도 이제 못 본다고. 그러지 말고, 나이티안 중에서 평소에 끌렸던 애 없어?”

 “없어.”

 “좀 성의 있게 생각해 봐. 이번 기회에 내가 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F-153이 입을 나불대며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그는 기겁을 하며 문밖으로 튀어나온다. 엘리베이터의 투명한 바닥 아래로는 121층 높이의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게 보인다. 6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사방이 전부 트여있는 엘리베이터다. 규칙대로라면 내부점검 당번일 때만 이 엘리베이터를 부를 수 있었지만, 마지막 날인 김에 조금 더 막 나가 보기로 했다.

 “뭐야, 너 왜 유리로 불렀어?” F-153이 뒷걸음질을 치며 말한다. 그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

 “그럼 너가 입 좀 닫고 있을까 싶어서.”

 F-153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 앞으로 문이 굳게 닫힌다.


 20층의 공정소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층을 내려가야 한다. 잿빛 철근들이 일정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걸 무미건조하게 응시한다. F-153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옆에서 거의 죽어가고 있다. 진작에 이래 볼 걸 그랬다.

 60층이 되자 막혀 있던 시야가 확 트인다. 수백 개의 인큐베이팅 탱크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언제 봐도 숨 막힌다. 하이브의 40층부터 60층까지는 미성체 성장 구역이다. 20개의 층은 모두 바닥 없이 뻥 뚫려있고, 그 벽면에는 투명한 인큐베이팅 탱크들이 빼곡히 매달려 있다. 탱크 내에는 태아부터 15세까지의 미성체들이 기다란 호스와 연결되어 둥둥 떠 다닌다. 그 미성체들의 눈만은 전부 크게 떠진 채 구역의 가운데를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홀로그램에서 사회화용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 역시 15년을 저 탱크들 중 하나 속에서 보냈다. 그 시절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수년 동안 눈앞에서 재생된 영상만큼은 단단히 뇌리에 박혀있다. 황폐화된 지구의 이미지가 떠 있는 걸 봐서 지금은 역사 교육 시간인 듯하다. 끝없는 모래사장 위로 뜬 공기는 뿌옇고, 세상은 땅과 하늘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검기만 하다. 성별을 판단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영상에 맞게 울린다.

 “2800년. 지구의 인구수는 200억 명을 돌파했다. 머루트의 복지론에 따르면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는 인구는 100억 명이다. 그 수의 두 배나 되는 인간으로 빼곡히 들어찬 지구는 빠르게 황폐해져 갔다.”

 거대한 직육면체 건물들이 모래사장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미지가 홀로그램에 떠오른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 하이브다.

 “이에 우리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하루를 반으로 쪼개 100억 명의 사람들이 교대로 생활을 하도록 한 거다. 우리는 지구의 일정 면적마다 ‘하이브’라는 냉동 수면 시설을 세우고, 인류를 ‘데이안(dayian)’과 ‘나이티안(nightian)’으로 나누었다. 데이안이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생활할 동안 나이티안은 냉동 수면을 하고, 오후 7시가 되면 나이티안이 나온 수면실에 데이안이 들어가 냉동 수면에 빠진다. 덕분에 현재 인구는 200년간 200억 명으로 유지되고 있다.”

 사회자의 낮은 목소리가 수많은 이들의 헐떡이는 소리로 덮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검게 그을린 부츠 하나가 모래를 튀기며 땅을 딛는 게 보인다. 수십 개의 부츠가 그 뒤를 따라 모래사장에서 허덕댄다.

 시야가 넓어지자 부츠들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검은 방독면과 검은 방진복으로 무장한 채 몸집보다도 큰 공기 정화 필터를 메고 끝없는 모래사장을 걷고 있다. 필터로 빨려 들어간 탁한 공기는 맑게 변하여 호스로 빠져나오지만, 그와 동시에 탁한 대기 속으로 도로 스며들어갈 뿐이다. 잉크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 바다를 물들이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멈추지 않는 건, 그들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저 길을 택했기 때문 아닐까. 약 9시간 뒤의 나처럼.

 “유일하게 냉동 수면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은 파견인이다. 파견인들은 하이브 바깥으로 나가 공기 정화를 하며, 하이브에서는 매년 이주할 때가 된 사람들의 자원을 받아 파견인을 모집한다. 대기가 독소로 가득한 바깥으로 나가 지구를 복구하는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자 희망이다. 그렇기에 하이브에 남은 우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장비를 만들며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모두의 노력으로 다시 하이브 바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현재 인류의 최우선적 과제이다. 오늘도 하이브에서 벗어날 날에 하루 가까워질 수 있기를.”

 이내 홀로그램은 태블릿 조립 교육 영상으로 전환되고, 나의 시야는 다시 철근으로 뒤덮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도 F-153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영웅은 개뿔, 자살 특공대지. 냉동 수면 안 하면 뭐 하냐고! 일주일도 안 돼서 죽는 애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말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외면하며 그의 눈을 피할 뿐이다.

 “설마 오늘 영웅 되겠답시고 파견인 지원하는 사람 없겠지? 미쳤다고 목숨 걸고 하이브 밖으로 나가-”

 “난 나갈 건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최근 몇 달간 내 머릿속으로만 생각해 왔을 뿐,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본 적은 없는 말이다. 이렇게 뱉어보니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하는지가 새삼 자각된다.

 “뭐?” F-153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똑바로 그의 눈을 보며 그에게, 아니, 나에게 선언한다. 혹여라도 내가 이 선택을 돌이킬 수 없도록.

 “난 나갈 거야. 하이브에서도, 밤에서도.”



 3시 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들 새벽을 먹으러 갔지만 나는 홀로 공정소에 남아있다. 이 정신에서 목구멍으로 뭘 넘겼다간 집합 중간에 다 게워낼 게 뻔했다.

 리시버의 부품을 마저 조립하고서 마지막 나사를 끼워 넣는다. 머리 부분을 일부러 푸른색으로 칠해둔 나사다. 덕분에 나사가 완전히 끼워지자 리시버의 스피커 부분에 푸른 원이 박힌다. 내가 만들어온 모든 작업물에 숨겨둔 나만의 표식이다. 내 손길이 닿은 곳에라도 내 흔적을 남겨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흔적에서 네가 떠올랐으면 좋겠어서.

 완성된 리시버를 상자에 담아 납품 구역으로 간다. 납품대에 상자를 올리고 지문 인증을 하자, 배달 드론이 상자를 집어 들고서 복도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내 인생 마지막 작업물이 나의 손을 떠났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다. 평생을 해 온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나버려도 되는 걸까.

 뻐근한 목을 매만지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이브의 셔터는 21시에 올랐다가 5시에 내려간다. 때문에 셔터가 오른 지 벌써 7시간이나 되었지만, 그 내내 창밖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새까맣고, 그 그림자인 듯한 하늘도 여전히 시커멓다. 어디까지가 모래사장이고 어디부터가 이산화탄소로 들어찬 하늘인지도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색은 검은색, 그것 하나뿐이다.

 그래도 그 탁한 어두움 속으로 타 지역 하이브의 실루엣이 얼핏 보인다. 정중앙의 흰 선을 기준으로 완벽하게 반으로 나누어져 있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정직한 건물이다. 선을 기준으로 남쪽 구역은 데이안 생활 시설, 북쪽 구역은 나이티안 생활 시설이며, 가운데의 선은 냉동 수면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전 7시가 되면 나이티안을 실은 캡슐이 저 선으로 들어가고, 오후 7시가 되면 데이안을 실은 캡슐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거다.

 저 얇은 선만 넘으면 네가 있다는 건데, 선 하나를 넘는 것보다 나머지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네게 가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식사는 아예 안 하기로 하신 거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놀라며 들썩인다. 돌아보면, 청소부 노파가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다. 하이브에서 생활하며 가끔 봤던 얼굴인데, 이렇게 말을 섞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아, 예.” 내가 짤막하게 대답한다.

 “하이브 이주 때문에 긴장돼서 그러셔? 하긴, 3006년생 F띠면 이주는 이번이 처음이시겠네.”

 노파의 눈매가 진심인 듯한 걱정으로 찌푸려진다. 거짓말로 대충 둘러대려다가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뇨, 그냥.. 누구를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요.”

 “10년을 같이 지낸 사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도 한 하이브에서 여러 명이 같은 곳으로 이주를 가게 되는 경우도 많어요. 하늘을 한 번 믿어봐요.”

 “감사합니다.”

 까맣기만 한 하늘을 뭘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노파에게 그 친절한 미소를 돌려준다. 그 순간 나는 그 노파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본 듯하다. 흥미롭다는 듯한,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웃음이다. 그러나 무언가 더 생각해 보기 전에 안내방송이 하이브 전체에 크게 울려 퍼진다.

 “알립니다. 하이브 내의 모든 F띠 나이티안은 지금 광장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하이브 내의 모든 F띠 나이티안은 지금 광장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가봐야겠네요.” 내가 머쓱하게 말한다.

 “그래요. 우리, 또 보길 바랄게요.”

 노파의 마지막 말에 또 한 번 그녀를 돌아보지만, 노파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 버린 후다. 나는 섬뜩한 기분을 지우려 노력하며 일단 광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장은 10층에, 아니, 10층 그 자체다. 층 전체를 벽 없이 뻥 뚫어놓고 가장 앞쪽에 커다란 단상 하나만 놓아둔 게 전부지만, 그곳이 수백 명의 사람으로 메워졌을 때 공간이 주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하다.

 나는 하이브의 F띠들과 함께 각을 맞춰 광장에 정렬해 있다. 하이브에서는 사람들을 태어난 해에 따라 A부터 J까지 10개의 띠로 나눈다. 아주 예전에는 동물 이름으로 띠를 불렀다고 하는데, 동물이 멸종하면서 띠 이름도 알파벳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10살인 사람들은 띠동갑이라 불리고, 이렇게 띠동갑인 사람들은 하이브 이주를 함께 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이곳에는 3006년생, 2096년생부터 2806년생까지, 수많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저 앞쪽의 어디쯤엔가 F-153의 뒤통수도 보이는 듯하다.

 이내 정찰대장이 바쁜 걸음으로 나타나 단상 위로 오른다.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이다. 그녀가 입술 옆에서 떠다니는 마이크 볼을 두어 번 두드리자, 어수선했던 광장이 한순간에 고요해진다.

 “‘지구가 멸망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위대한 윤리학자이자 전 세계 대통령인 머루트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말입니다.”

 그녀가 말문을 연다.

 “지구는 오래전에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 속에서도 살아남았죠. 그렇게 우리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따뜻한 밥을 먹고, 사랑하는 동료들과 웃을,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브는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감명을 받은 몇 명의 박수가 광장 모두의 박수를 이끌어낸다. 나도 그들을 따라 형식적인 박수를 적당히 보내준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정찰대장이 말을 잇는다.

 “그 일환으로 내일은 거주지 복지법에 따라 F띠의 하이브 이주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인간은 최소 10년에 한 번 새로운 환경 혹은 거주지에서 살아볼 권리가 있다.’ 복지법 제7조 3항입니다. 이에 따라 저희는 여러분을 각각 다른 대륙의 하이브로 이주시켜 드릴 것이며, 내일 오후 7시에 눈을 뜨면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거주지에서 새로운 10년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과정은 안전하게 진행될 것이니, 이주를 경험해 보신 나이티안도, 경험해보지 않으신 나이티안도, 걱정하지 마시고 낮에 푹 주무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정찰대장이 단상 아래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한다. 태블릿을 손에 든 정찰대원 한 명이 계단을 올라 그녀 옆에 선다. 그가 준비되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찰대장이 호소력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군중을 향해 입을 연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파견인들은 독소로 가득한 바깥세상을 헤쳐 나가며 지구를 복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넓은 지구를 복구하기에 지금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인간에게 강제로 노동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올해도 이 자리에서 파견인 자원을 받고자 합니다. 파견인에 자원하고자 하는 용기 있는 나이티안은 지금 단상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추가적으로 파견인에게는 냉동 수면을 하지 않을 혜택과 복무하고자 하는 하이브를 선택할 혜택이 주어집니다.”

 태블릿을 쥔 정찰대원이 소심하게 덧붙인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것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이.

 수백 명의 나이티안으로 빼곡히 찬 광장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감히 미세하게라도 움직임을 내어 이목을 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두가 한순간의 영광을 위해 영웅이 되기보다는 그 보호 아래에서 길고 얇은 생을 살기를 선호하는 듯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에게 닿아보기라도 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두려움이 내 판단을 뒤흔들어놓기 전에 앞에 선 나이티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무언가에 쏘이기라도 한 듯 그가 움찔하며 옆으로 물러선다. 그의 발이 비켜난 자리에 내 워커를 단단히 딛는다. 이로써 물결 하나 없는 호수에 돌을 던져 넣은 건 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고, 퍼져나가는 물결을 다시 붙잡아올 방법은 없다.

 광장에 늘어선 나이티안들을 가로질러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또 누군가의 어깨를 밀어낼 필요 없이, 내가 발을 딛기도 전에 사람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한다. 내가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계단을 올라 정찰대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수백 개의 시선들이 내게 뜨겁게 꽂히는 게 느껴진다. 그 열기에 뇌가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만 같다. 정찰대장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여 보인다. 나는 마지막 남은 정신을 쥐어짜며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나이티안 F-332입니다. 파견인에 자원하겠습니다.”



 오전 7시. 이 시간에 살아있는 건 성체가 된 후 처음이다. 지금 이 순간 너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항상 엇갈리기만 했던 우리의 심장 박동이, 지금은 같은 순간에 뛰고 있다.

 내가 자원을 한 후 네 명의 사람들이 더 단상으로 올라왔다. 3006년생 세 명과 2986년생 한 명이다. 우리는 정찰대장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걷고 있다. 다른 나이티안들을 모두 냉동수면실로 돌려보낸 후, 그녀는 설명 한 줄 없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을 그녀를 따라 걷는다.

 이내 복도의 한 지점에서 정찰대장이 멈춰 선다. 그녀가 멈춘 곳의 양쪽으로는 수많은 문이 일정하게 늘어져 있다. 복도 저편에서 정찰대원 한 명이 다섯 개의 방독면을 안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인다. 그를 확인하고서 정찰대장은 마침내 우리를 향해 입을 연다.

 “파견인에 자원해 주신 나이티안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파견인이 수행하는 작업은 매우 위험합니다. 실제로 대다수가 작업 수행 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죠. 따라서 여러분을 파견인으로 정식 임명을 하기 전에 간단한 테스트를 하고자 합니다. 안전을 위해 테스트에 통과한 분만 최종적으로 파견인으로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하다. 통과 테스트라니. 이런 건 내가 고려한 변수 중에 없었다.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한 정찰대원이 방독면을 하나씩 나눠준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 들어 손에 쥔다.

 “곧 이 복도 전체는 하이브 바깥과 같은 농도의 독소로 채워질 겁니다. 그전에 여러분은 지금 받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여기 보이는 방 중 하나에 각각 들어가셔야 합니다. 신호가 울린 후, 이 방에서 나와 본인의 냉동수면실로 돌아가는 것이 이 테스트의 과제입니다. 테스트에 성공하신 분은 즉시 파견인으로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찰대장의 말이 끝나자 다섯 개의 문이 자동으로 열어젖혀진다. 옆에 선 이들의 눈에 두려움이 번지는 게 보인다. 나의 눈도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게 느껴진다.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하지만,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어떻게든 저 방에서 나와 우리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어떻게든 너와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거 하나다.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방독면을 끝까지 눌러쓴 채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인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이미 몇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사방이 흰색뿐인 밀폐된 방 안에서는 내가 얼마나 오래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독소 때문에 숨이 막히기 전에 기다리다 지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이미 독소가 퍼졌는데 방독면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벌어질 일이라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시작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이 내 기도를 쓸고 지나갔을 때, 나는 내 오만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찢어질 듯이 높은 소리가 귓속에서 울린다. 이게 정찰대장이 말한 신호인지 내가 내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눈앞에 바닥이 있다. 사실 모든 게 새하얀 이 방 안에선 이게 바닥인지 벽인지 모르겠다. 분명 방독면을 썼는데 왜 이리 고통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불량품을 받은 것 같아 방독면을 벗어던진다. 차라리 그 편이 숨이 덜 막힐 거라 생각했다. 방독면이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순간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깨닫는다. 굶주린 새 떼가 벌거벗은 얼굴을 향해 달려드는 것만 같다. 그러나 떨어진 방독면을 다시 줍기에는 이미 시야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다.

 손인지 발인지 모를 것으로 기며 문을 찾는다. 빌어먹을 백색으로만 가득 찬 방은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몸에 닿는 것은 뭐든 밀어내보며 광인처럼 펄떡댄다. 내 안에 흐르는 모든 액체가 살을 찢고 나오려 하는 것만 같다. 내가 뭘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이제는 희미하다.

 그 순간 발에 무언가가 걸리더니 벽이 훅 뚫리는 게 느껴진다. 탁한 정신으로 다급하게 그곳을 보자, 열린 문 사이로 복도의 모습이 보인다. 문이 시야에서 사라질세라 미친 듯이 기어 방을 빠져나온다. 복도 역시 독소로 뿌옇지만,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내게 움직일 힘을 심어준다.

 엘리베이터의 푸른 버튼을 향해 네 발로 간절히 기어간다. 다른 이들의 방을 지나치자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문이 잠겨있다고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방에 들어갈 때 나는 혹시 몰라 주머니의 고무 조각을 잠금장치 구멍에 끼워두었었다. 그것 때문에 내 문만 잠기지 않은 건가. 망할 정찰대원들은 방에서 나오라 해놓고선 왜 문을 잠근 건가. 그러나 그 생각들은 몇 초도 되지 않아 머릿속에서 잊힌다. 내 정신에는 오로지 저 푸른빛에 닿아야 한다는 생각뿐이 없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에 충분히 가까워지자, 나는 손을 내려쳐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은 지옥 같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안으로 말 그대로 굴러 들어간다. 내가 유리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일반 엘리베이터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보니 121층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맑은 공기와 함께 내 정신도 점점 또렷해진다. 흐릿함이 걷혀가는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너였다. 우리의 방을 찾아가야 했다. 그것만 하면 이 모든 게 끝난다.

 신음을 흘리며 두 발로 서 본다. 나이티안은 모두 냉동 수면을 하고 있을 시간이라 복도는 켜진 불 하나 없이 새까맣다. 바깥세상의 검은빛이 하이브 안쪽까지 스며든 것만 같다. 천천히 암흑을 헤치며 내가 사용하던 냉동수면실을 찾는다. 10년을 사용한 수면실을 찾아가는 일은 보이는 게 없어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수면실 문고리를 툭 밀어 본다. 다행히 이번만은 문이 아무런 걸림 없이 부드럽게 밀려난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이걸로 나는 밤에서 벗어나는 거다. 낮에서 너의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어쩌면 너의 눈동자를 보게 될 수도 있는 거다.

 문을 열어젖히며 10년 중 5년을 죽은 채로 보낸 그 수면실로 들어선다. 사실 문을 열자마자 정찰대장이, 하다못해 정찰대원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들이 박수라도 쳐주면서 나를 파견인으로 임명해 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방엔, 혼란스러운 광경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캡슐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다. 너와 나의 캡슐 중 하나는 꼭 박혀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너의 캡슐은 천장 속으로 숨어들었을 테고, 나의 캡슐은 이주 준비를 위해 옮겨졌을 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말은 즉슨, 너와 나 사이의 그 얇은 선이 사라졌다는 거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거다. 지금 너와 나 사이에는 그 무엇도 틀어박혀 있지 않고, 캡슐이 있어야 할 자리 너머로는 너가 사용하는 냉동 수면실이 훤히 보인다. 그리고 나는 방금,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너의 푸른 머리칼을 본 것만 같다.

 그 이상 내 이성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캡슐이 있어야 할 자리를 넘어 네 방문을 열고 너를 따라나선다.



 나는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의 냉동수면실 문 너머로는 복도가 아닌 방이 있다. 그저 새하얀 방이 아닌, 고동색 침대가 있고, 황갈색 옷장이 있고, 청록색 러그가 깔린, 그런 방. 벽이 백색이 아닌 다른 색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한 공간에 이토록 많은 색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수많은 색 사이사이에는 푸른 점들이 하나씩 박혀 있다. 책상 위 태블릿의 모퉁이에 푸른 점 하나. 거울 옆 램프의 기둥에 푸른 점 하나. 침대 맡 리시버의 스피커에 푸른 점 하나. 나의 작업물들에 내가 남겨둔 표식이다. 너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끼워 넣은 나사들이다. 왜 지난 10년간 파견인들을 위해 만든 작업물들이 전부 너의 방에 놓여 있는 것일까. 너의 방을 떠도는 푸른빛들에 질식할 것만 같다. 그중 가장 내 사고를 마비시키는 것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청색이다.

 나는 세상이 검은색뿐이 될 수 없는 줄 알았다. 땅은 숯덩이고 하늘은 독극물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왜 진홍색 커튼 너머에 펼쳐진 하늘은 파랗기 그지없는 것인가. 왜 모래뿐이라고 했던 땅에는 나무와 풀이 무성한 것인가. 방독면 없이는 살아있을 수조차 없다 했던 바깥세상에서, 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것인가. 홀로그램인가. 아니, 내가 아는 한 저렇게 넓은 범위의 홀로그램을 만들 기술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저건 진짜인 거다.

 그럼 내가 알던 세상은 무엇이었던 것인가.

 그때 꺄악, 하는 비명에 고개가 홀린 듯 돌아간다. 그곳에 너가 서 있다. 살아 움직이는 너가.

 쩍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너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친다. 10년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너의 눈동자다. 그건 검은색이다. 하늘보다도 시커먼. 아니, 하늘과 달리 시커먼. 검은 줄 알았던 하늘은 푸른색이고 푸른 줄 알았던 그 애의 눈동자는 검은색이다. 속이 메스껍다. 나는 토악질을 참으며 그 방을 뛰쳐나온다.


 나는 달린다. 캡슐이 있던 자리를 넘어, 새하얀 내 수면실로, 복도의 암흑으로, 달린다. 벽은 하얗고 세상은 검은, 내가 알던 흑백 세상으로 돌아와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아까의 광경은 씻겨나가지 않는다. 정신이 온갖 색으로 뒤엉켜 혼란스럽다. 흑백에 색을 칠할 수는 있어도, 유색 그림을 흑백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그때 귀를 후비는 사이렌 소리가 온 복도를 뒤흔든다. 이탈자가 발생할 때 울리는 사이렌이다. 모두가 잠든 이 복도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 나 하나뿐이다. 그러니 저 사이렌은 나를 잡기 위해 울리는 거다.

 도망쳐야 할 것 같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낮으로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다시 그 혼돈 속으로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익숙한 이곳에 영영 갇히고 말겠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주저앉아버린다. 그러나 감은 눈으로는 소름 끼치게 푸르던 하늘이 여전히 보이고, 막은 귀로는 그 애가 지르던 역겨운 비명이 끊임없이 들린다. 소리를 덮어보려 악을 질러 봐도 날카로운 비명 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다.

 이내 정찰대의 거친 손이 내 팔을 꺾는 게 느껴진다. 다른 한 손은 내 입을 틀어막고, 또 다른 한 손은 내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다 마지막 손 하나가 내 목 패치에 마취 주사를 꽂아 넣는다. 매일 낮 나를 잠에 들게 한 익숙한 감촉과 몽롱함이다. 의식이 꺼져가면서 마침내 눈과 귀도 어두워진다. 눈앞이 완전한 암흑으로 덮이자, 나는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며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숨이 훅 쉬어진다. 내 폐로 마시는 첫 숨이다.

 인생의 첫 순간은 역시 쉽게 잊히지 않는 듯하다. 10년이 지나서까지 이렇게 내 무의식에 찾아온 것을 보면.

 “3016년 5월 31일. 오늘의 일과입니다.” 머리 위로 안내 방송이 말하기 시작한다.

 화들짝 놀라며 방송이 들리는 곳을 올려본다. 사회화용 영상 덕분에 하루 일과는 이미 기억 속에 주입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듣는 안내 방송이 신기했다.

 방송이 끝나자 나는 교육받은 대로 허리의 혁대를 풀고 캡슐에서 나온다. 눈앞의 냉동수면실 문은 검었다가 희어지며 깜빡인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나가야 이탈자가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손잡이를 너무 세게 누른 탓에 손가락이 문에서 홱 미끄러진다. 그와 동시에 문은 철컥, 하고 잠겨버리더라. 힘 조절이 아직 미숙한 어린 성체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였다. 문제는 그 탓에 수면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는 거다.

 곧 이탈자로 분류될 것을 걱정하며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떤다. 탱크에서 나오자마자 이탈자가 되었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 순간 내 뒤로 잔잔한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 그곳을 본다. 천장의 판자 하나가 비켜나더니 내 캡슐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인다. 이어서 건너편에서 다른 캡슐이 밀려들어오더니 내 캡슐이 있던 자리를 메운다.

 그 캡슐 속에 그 애가 있었다. 푸른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 애가. 그 애는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본 인간이었다. 흑백을 제외하고는, 그 푸른빛이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색이었다. 희고 검은 방에서 홀로 푸르렀던 그 애는, 흑백 세상에 실수로 묻은 푸른 점 같았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 점 하나가 나머지 세상 전부보다 더 끌렸다.

 날 찾으러 온 정찰대는 다행히 나를 일탈자로 분류하지 않았다. 탱크에서 나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날까지만 규율을 느슨하게 적용해 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다시 정상적으로 일과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이브에서 하루를 마저 보냈지만, 그 애의 머리칼 같은 색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벽은 흰색, 창밖은 검은색이었으며, 간혹 색이 있는 머리를 가진 나이티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 애와 같은 빛깔의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딱 한 번만 더 그 색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겁도 없이 몰래 잠금장치의 본을 떠 고무 막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그 애를 찾아갔다. 그리고 한 번 더,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그렇게 10년을 그 애를 찾아갔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매일 같이 하는 일에 목적 같은 건 없다. 본능이었다. 그 애에게 돌아가는 건. 살기 위해 숨을 쉬듯이, 나도 살기 위해 그 애를 보러 갔다. 아니, 그 애를 보기 위해 살았다.

 그럼 나는 이제 무얼 위해 살아야 할까.


 목에 주사 바늘이 꽂히더니 한순간에 의식이 돌아온다. 나는 달콤한 꿈에서 뽑혀 나와 다시 현실로 내던져진다. 내 손은 의자 뒤로 단단히 묶여 있고, 머리 위에는 자루 하나가 씌워져 있다.

 “벗겨줘.” 여성의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온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다.

 손 하나가 머리를 덮은 자루를 거칠게 벗겨낸다. 환해진 시야로 앞에 앉은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내 앞의 의자에는 일전에 만난 청소부 노파가 앉아있다. 작업복이 아닌 양복을 입은 채, 노파는 그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본다. 그런 그녀 양 옆에는 총을 든 정찰대원들이 서 있다.

 “많이 놀랐나 봐, F-332. 내가 그동안 연기를 너무 잘했나 보지?” 그녀가 빙긋 웃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파견인 테스트는 어떻게-”

 “머리 굴리는 게 생각보다 느리네. 저걸 보고도 파견인 타령이나 하고 있고.”

 노파가 등 뒤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녀 뒤의 통유리 너머로는 내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이미지가 또다시 펼쳐져있다. 푸른 하늘, 더 푸르른 나무, 그리고 그 사이를 거니는 사람들. 그걸 보는 내 표정이 혼란에 빠질수록 노파의 입꼬리에 서린 웃음은 더욱 짙어진다. 이전에는 절망했다면, 이번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솟구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웃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좀!”

 달려들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의자 뒤로 묶인 손 탓에 멀리 가지는 못한다. 내게 총을 겨누려는 정찰대원을 노파가 손을 올려 제지한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한 채 노파에게 애원하듯 묻는다.

 “어디부터가 가짜고, 어디까지가 진짜냐구요..”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노파는 다리를 꼬며 의자에 깊게 기대앉는다. 그러고서 천천히 입을 연다.

 “지구가 완전히 망가졌던 건 맞아. 방독면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하이브를 짓기 위해 사람들에게 건설비용을 지원받았지."

 노파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책상 한편에 놓인 바둑알 통을 열어 보인다. 말을 이으며 그녀는 흰 바둑알과 검은 바둑알을 책상에 차례로 올려놓는다.

 "그때 일정한 금액을 지원한 사람들은 데이안,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나이티안이 된 거야. 사람들은 밤보다 낮을 선호 했으니까. 여기까지는 다 아는 얘기지?"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노파를 응시한다. 노파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서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지구를 복구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어. 인간을 모조리 하이브 안에 박아두니 어찌나 회복이 빠르던지, 몇십 년 안에 지구가 새것처럼 변했다더군.”

 “그럼 왜 우리에게는 거짓말을 한 겁니까. 저렇게 멀쩡한데 왜..!”

 “문제가 있었거든. 복구된 지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12억 명은 계속 하이브 안에 머물러야 했어. 그러지 않았다가는 지구가 금세 다시 망가질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데이안만 하이브 밖에서 생활하도록 했다는 겁니까? 지구가 아직 오염되었다고 나이티안들을 속여 가면서 까지?”

 “그래. 머루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세계 회의에서 직접 그렇게 결정했어. 데이안은 하이브 건설에 기여를 한 사람들과 그 자식들이야. 둘 중 혜택을 누릴 부류를 꼽으라면 그건 데이안이어야 했다고."

 흑색 바둑알을 손 안에서 굴리던 노파는 이내 바둑알을 통 속에 던져 넣고 뚜껑을 닫는다.

 "선조가 금전적 능력이 부족했던 걸 우리가 바꿔줄 수는 없잖아.”

 노파의 뻔뻔한 태도에 어금니가 우득 갈린다. 그녀는 진심으로 본인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럼 우리가 매일같이 만든 작업물들은 뭡니까. 파견인들을 위해 만들었던!”

 “인간은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동물이야. 나이티안들의 삶의 질을 위해선 존재 이유가 될 수 있는 노동을 만들어줘야 했어. 그래서 공유하는 수면실을 기준으로 데이안과 나이티안을 짝 지어줬지. 데이안이 필요물품을 하이브에 의뢰하면, 짝지어진 나이티안이 그걸 보급하는 일대일 시스템을 만든 거야.”

 왜 나의 작업물들이 그 애의 방에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된다. 나는 여러 의미로 그 애에게 내 10년을 바쳤던 거다.

 “..그러니까 우릴 노예로 삼은 거군요. 데이안을 위한 노예.”

 “노예라니 그런 끔찍한 말을! 이 사회는 여전히 인간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 그 속엔 물론 나이티안의 권리도 포함되어 있고.”

 노파가 가슴팍에 달린 배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곳엔 ‘나이티안 권리 보장 위원회’라는 글자들이 수놓아져 있다.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는다.

 “모든 나이티안에게는 기회가 주어져. 데이안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도대체 언제 그런 기회를 주셨는데요?”

 “매년 있는 파견인 모집. 그때 파견인에 지원하는 나이티안들은 모두 데이안이 될 수 있어. 사회에 대한 공헌 정신이 충분하면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거지. 너도 그 테스트 방에서 얌전히 기절했으면 이미 데이안이 되어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넌 전혀 ‘얌전’하지 않았지.”

 노파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보인다. 파견인 테스트에서 내가 잠금장치에 꽂아 넣었던 고무 막대다.

 “이런 허술한 막대기로 잠금장치를 막고, 캡슐 자리를 넘어서 데이안 구역까지 건너갔다? 잠금장치까지는 테스트 때문에 그랬다고 쳐. 데이안 구역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넘어간 거지?”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가는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수가 있다.

 “그냥.. 그것도 시험의 일환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건 호기심이었어. 그리고 이곳에서 호기심은 곧 반항심이지. 난 널 아주 오래 지켜봐 왔어, F-332. 작업을 할 때도 넌 유독 창밖을 쳐다봤거든. 넌 낮을 열망했던 거야. 바깥세상을 갈망했고, 저 파란 하늘을 갈구했던 거다. 규칙을 모두 부셔서라도 그걸 얻고 싶어 할 정도로. 어쩌면 넌 희생정신이 아니라 너의 그 호기심 때문에 파견인에 지원했을지도 몰라.”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노파는 나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까지도.

 “다른 이들은 그런 너를 위험하다고 생각했어. 널 이탈자 수용소에 감금해 버리자는 이도 있었고.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어.”

 노파가 옆에 선 정찰대원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집게처럼 생긴 장치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는다. 처음 보는 장치이다.

 “파견인에 지원한 이상, 넌 법대로 데이안이 될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 권리를 앗아갈 힘이 없어. 인간의 권리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제 뭐 어떡하라는 겁니까?”

 “그건 패치 제거기야. 그걸로 목에 박힌 패치를 뽑으면 너는 데이안이 될 수 있어. 그러나 데이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 방을 나가도 괜찮아.”

 예상치 못한 발언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며 노파를 쳐다본다.

 “제가 나이티안으로 남겠다고 해도 보내줄 거라는 건가요? 진실을 다 알고 있는데도?”

 “그래. 혜택을 받아들이는 것도 너의 권리니까.”

 “제가 돌아가서 다 말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그건 우리가 생각할 문제고, 일단은 너의 권리가 우선이야.”

 말을 마치고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가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나는 노파가 방을 나서기 전에 그녀의 뒤에 대고 소리친다.

 “모든 나이티안에게 이런 선택권을 줬던 거예요? 그런데 왜 17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던 겁니까?”

 노파는 걸음을 멈추고서 나를 돌아본다. 그러고서 그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글쎄, 왜일까.”

 그 말만을 남기고 노파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녀 옆에 있던 정찰대원들도 내 손에 묶인 수갑을 풀어주고서 방을 나선다.

 텅 빈 방에 나는 의자 두 개와 함께 홀로 남겨진다. 패치고 뭐고 지금 당장 저 문을 나서야 한다는 걸 나는 안다. 지금 당장 나이티안들에게 돌아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왠지 시선이 기기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평생을 선망했던 그 애가 위선자였다는 사실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믿었던 세상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지, 왼손이 서서히 기기를 향해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그것으로 목에 박힌 패치를 뜯을 듯이.


 파란 하늘이 훤히 보이는 텅 빈 방.

 피 딱지가 눌러 붙은 목 패치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흑백 그림에 묻은 푸른 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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