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쫓겨난 뒤.
수호타워 1층, ‘쉼표 상담소’.
우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가 보낸 문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보안팀에서 갑자기 절 쫓아냈어요…….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요. 신부님도 조심하세요.]
‘이 정도로 삼엄한 분위기였나, 여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
‘김민수’라는 명찰을 단 그 직원이었다.
‘어, 이 사람…….’
우진은 며칠 전 그에게 차를 권했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진은 이 사람을 ‘지선우’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우진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최대한 반갑게 맞이했다.
“그럼요, 그럼요! 앉으세요. 차라도 한잔…….”
우진이 차를 한잔 따르자 남자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시면 됩니다.”
우진이 아주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이 없었다.
차가 든 종이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가 차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두 모금.
침묵이 길어졌다.
우진은 천천히 기다렸다.
상담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쩐지 묘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전에 왜 나한테 차를 주려 했어요?”
“아, 그게…….”
우진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힘들게 일하시는 것 같아서 잠시 차 한잔 하시라고…….”
“그게 다예요?”
남자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왜 그러세요?”
남자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 딴 얘기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말이에요. 신부님, 아무래도 신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굳이 직접 찾아와서 면전에 대고 이렇게 시비조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우진은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없다고 믿으셔도 됩니다.”
우진이 그렇게 말하자 남자가 우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가 자신의 삶을 붙잡고 있음을 느껴요. 우리가 그걸 신이라고 부를 뿐이죠.”
그러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네요.”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고작 그까짓 게 신이에요?”
어쩐지 위협적인 자세였다.
우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괜히 힘든 사람들한테 이렇게 그럴싸한 말 몇 마디 해주면서 돈벌이나 하려고 하지 말고…….”
남자가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런 짓 그만두시죠.”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뒤돌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우진이 그를 급하게 불렀다.
“잠시만요, 선생님!”
남자가 멈춰 서서 돌아봤다.
“저기… 이 상담소 무료인데요.”
우진의 말을 들은 남자가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우진의 눈을 뚫어지게 보더니 조용히 돌아갔다.
-
같은 날 저녁, 진영동 성당 사무실.
우진은 책상 앞에 앉아 여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에 있었던 그 남자와의 대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통통한 체구의 중년 신부.
바로 지구장이었다.
“지구장 신부님!”
“라자로!”
지구장은 우진의 세례명을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둘은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나!”
“안녕하세요, 신부님. 그런데 어쩐 일로…….”
“지나가다 들렀지, 뭐. 좋은 소식이 있어서 말이야!”
“좋은 소식이요?”
지구장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올해가 수호그룹 창립 50주년이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듣자마자 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찌 지구장 신부님의 입에서 ‘수호그룹’이라는 단어가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지구장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른 게 아니고, 12월 3일에 이 근처에 있는 수호타워에서 아주 성대한 기념행사를 연다고 하더라고.”
“아, 네.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지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호그룹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협조 요청이 들어왔어. 우리 교구 쪽으로 말이야. 행사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지역 어린이들의 맑은 목소리로 오프닝을 열고 싶다면서, 어린이 성가대 초청 공연을 부탁하더구만, 하하하.”
우진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교구에서도 아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해서 흔쾌히 수락했지. 지역사회와 종교계의 아름다운 화합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나.”
지구장은 기쁜 듯 가슴을 폈다.
“그래서 어느 성당을 보낼지 고민하다가, 진영동 성당 어린이 성가대를 보내기로 했네! 어린이 성가대는 여기가 최고 아닌가. 작년 대회에서도 대상을 받았잖아.”
우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네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걸세. 수호그룹 회장님도 직접 참석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
우진이 당황하여 아무 말을 못하자, 지구장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 무슨 일 있어? 좋은 일 아닌가?”
“아아, 네… 너무… 잘됐네요…….”
“하하, 그렇지? 아, 참! 교구장님께서도 행사에 참석하실 것 같아. 그러니까 공연 준비 잘 부탁하네. 아이들도 분명 좋아할 거야! 하하”
지구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우진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우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주일이면 성가대 연습을 하며 까르르 웃던 아이들.
순수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
우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2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