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대혼란 육아 프로젝트 Part 1. 아기는 저절로 크는 줄 알았지
해윤의 집에서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갈아타고 1시간 거리였다. 임신한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4층 사무실까지 오르내렸던 이야기를 하면 다들 '유산 안 한게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해윤은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병가와 출산휴가를 당겨썼기 때문에 육아휴직은 길지 않았다. 하임이가 돌이 지나자마자 직장에 다녀야했다. 집과 직장이 너무 멀어서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갈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국가기관들이 세종시로 이전하던 때였고, 해윤의 직장도 곧 세종시로 이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직장 내 다른 직원들은 서울역을 통해 출퇴근을 하겠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하임이가 돌이 지나기 전에 어린이집에 적응을 시키고, 복직하고 나서 5개월을 지하철로 1시간 출퇴근을 하고, 그 후에는 서울역을 통해 세종시까지 출퇴근을 해야 했다. 해윤은 하임이를 두고 이 혼란할 시기를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남편은 무슨 일이든지 호언장담하는 성격이었다. 결혼 전 유학을 의논할 때도, 집을 구할 때도, 지금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도, 당연히 자신이 나서서 무엇이든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해윤은 항상 남편을 믿었다. 그래서 남편의 회사 근처 구립 어린이집에 대기를 걸었다. 구립이라 믿을 수 있고, 아빠 회사가 가까우니 수시로 시간을 내서 들여다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임이가 10개월쯤 되던 봄날, 3월 새학기를 맞아 어린이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아반이라서 1:3, 선생님 2분에 아기들 6명이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처음 한달은 적응기간으로 아기들이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서서히 늘리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 OT날, 엄마가 아기를 직접 데리고 온 경우는 해윤 뿐이었다. 다른 아기들은 모두 할머니들이 데리고 오셨다. 해윤은 이번에도 씩씩해져보리라 다짐했다.
선생님께서는 어린이집에서 모유를 녹여서 젖병에 먹이는 것을 할 수 없으니 서서히 모유를 끊으라고 하셨다. 완모하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서서히 다시 분유를 젖병에 담아 먹는 것을 연습시키는 수밖에.
집에서 어린이집까지는 차로 10분. 남편의 회사 바로 옆이었지만 남편은 항상 직장에 새벽같이 출근했다. 어린이집 적응기간으로 아기를 일찍 맡기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시간이 되는 사람이 아이를 맡기는 건 당연한 거라고 해윤은 위안했다. 하지만 해윤의 아침도 쉽지는 않았다. 집에서 자고 노는 것이 익숙한 아이를 깨워서 먹이고 씻기고 옷입혀서 차에 태워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30분, 1시간, 2시간, 아기는 어린이집에 서서히 잘 적응했다. 아기가 잘 적응해갈수록 복직에 대한 해윤의 희망도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임이의 뺨에 길다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같은 반 아이가 실수로 긁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연한 아기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며 해윤은 마음이 힘들었다. 어린이집에서는 가끔 아기들의 물건이 뒤바뀌어 돌아왔다. '선생님들이 정신이 없으시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면역이 취약한 영아반 아기들의 가제수건이 다른 친구 가방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며칠 후, 하임이의 뺨에 또 다시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들으니 같은 반 남자 아기 중 성격이 좀 와일드한 아기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같은 아이에게서 같은 일을 두 번 겪는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 거에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이 어린이집이 아니면 해윤은 직장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게 좋았다.
그 날 오후, 그 남자아기의 엄마라는 분께서 전화가 오셨다.
"제가 직장에 다니느라 아이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써서 아이가 정서적으로 힘든가봐요. 할머니가 봐주시고 있긴 한데 위로 형이 있어서 할머니도 힘들어 하셔서요. 어찌됐든, 제가 어머님 입장이면 정말 화났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진심어린 사과를 하셨다.
아기들끼리 있다 보면 그럴 수 있다. 그 엄마의 사과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해윤에게는 딱 두 가지 마음 밖에 안 들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둘이나 봐주시고 직장에 다니신다니 부럽네요.'
'아이가 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으신가요? 부럽네요.'
어린이집에서의 적응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거의 종일(그래봤자 9시~3시) 맡길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등하원만 도와주면 해윤도 이제 복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면 항상 기저귀가 무거웠다. '어린이집에서 왜 갈아주지 않았지?' 라고 생각하며 몇 번을 넘겼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또다시 기저귀가 무겁길래, "선생님, 바쁘신가봐요. 이 시간에 항상 기저귀가 다 차 있네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갈아드릴께요" 라며 아이를 뺏어가듯 안아서 다시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는 선생님 등 뒤로 엄마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손을 뻗었다.
원칙적으로는 부모는 현관 안으로 들어가면 안되었지만, 그 날 해윤은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아기를 좇아 교실로 다가갔다. 교실문은 미닫이로 닫혀 있었지만, 어른 눈높이에 조그만 창이 나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해윤은 조심스럽게 그 창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5명의 아기들은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물고 뒹굴고 울고 있었고, 다른 1명의 선생님은 정신없이 아기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임이를 데려간 선생님은 거울벽에 하임이를 세워놓고 기저귀를 마치 팬티입히듯 쓱 올려 입혔다. 그 힘에 의해 하임이의 허리가 휘청였다. 그 장면을 본 해윤은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벌컥 문을 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하임이는 고작 10개월, 이제 막 잡고 서는 것을 시작한 단계였다. 그런 아이를 벽에 세워놓고 팬티 입히듯 기저귀를 입혔다. 혹여 아이의 허리가 다칠수도 있는, 또는 넘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영아반 선생님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었다. 놀란 담임선생님은 해윤을 진정시키며 교실 밖으로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 5명을 보고 있던 그 선생님은 경력이 오래된 메인교사였고, 하임이에게 막 대한 그 교사는 대체교사였다. 다른 선생님께서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우신 것을 대체하기 위해 오셨는데, 경력이 오래되지 않고 아이 보는데 서툴러서 자신도 함께 일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아기들 물건이 바뀌거나 다툼이 나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 교사들끼리도 주의하라는 목소리가 많았고, 그래서 그 선생님이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다며, 말도 안되는 설명을 하셨다.
그 길로 해윤은 하임이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차에 앉아, 보조석 카시트에 하임이를 앉힌 채, 핸들을 잡고 고개를 파묻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까지 참아가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하나?', '이게 엄마로서 책임있는 행동인가?' 후회와 막막함과 절망이 밀려왔다. 옆에서 하임이는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고 있는 엄마의 머리를 토닥였다. 해윤은 하임이를 안았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그렇게 한참을 두 모녀는 차 안에서 함께 울었다.
어린이집은 그만두었고, 해윤의 복직은 요원해졌다. 해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친정엄마는 아기를 봐주는 것보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다. 시댁에서는 아기를 청주 시댁에 맡기면 키워줄테니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다. 해윤은 두 가지 모두 싫었다.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면서 아이도 잘 키우고 싶었다.
그 즈음, 남편의 직장에서 중국 주재원으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해윤은 내심 기대했다. 중국이라면 해윤이 예전에 유학을 한 적이 있어서 익숙한 곳이기도 했고, 주재원 월급으로 아기를 키우는 환경도 한국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주재원으로 가는 것에 대해 거의 확실하다고 이야기했다. 해윤이 복직을 한다면 도우미 이모님을 구해야 했고, 하임이는 이모님과 적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중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굳이 회사생활을 오래 할 것이 아니라면 복직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해윤은 육아휴직이 끝난 후 퇴직서를 썼다.
퇴직서를 쓰고 나서 해윤은 중국에 갈 꿈에 점점 부풀었다. 한 때 한국어 강사가 되고 싶었는데, 이 참에 그런 일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임이에게 다른 문화를 보여주며 여기저기 경험할 것들도 생각하면서 신이 났다. 그런데 남편의 말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회사에서 중국과 함께 추진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캔슬되었다는 것이었다.
해윤의 마음은 무너졌다. 게다가 남편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고 월급이 끊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무너진 마음을 부여잡고 해윤은 살 길을 찾아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