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대혼란 육아 프로젝트 Part 1. 아기는 저절로 크는 줄 알았지
해윤은 전공과 상관없는 일반 중소기업에 사무직 자리를 구했다. 출근을 2주 앞두고 하임이를 맡아줄 도우미 이모님을 구했다. 낯선 사람에게 아기를 맡기는 것이 무서워서 홈캠을 달아놓았다. 이모님은 경험은 없으셨지만 딸 둘을 키우셨고, 가까운 곳에 사시는 분이었다. 해윤의 상황에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뭐? 애가 있다고?"
해윤은 면접때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력서에 가족사항에도 남편과 아이가 있다고 분명 적어 놓았다. 그런데 해윤을 뽑은 담당 팀장은 해윤이 아기엄마라는 사실을 애초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해윤이야말로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닌데,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해윤은 잠을 줄여가며, 남들이 꺼려하는 지방출장도 자처하며 열심히 일했다.
하임이는 다행히 이모님과 잘 지냈다. 하임이가 걱정되어서, 컴퓨터 화면 한 쪽에 조그맣게 홈캠을 띄워놓았다. 하임이가 이모님과 노는 모습을 보면서 해윤은 느낀 것이 많았다. 이모님은 이불 빨래를 할 때, 하임이를 곁에 못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지를 걷고 욕조에서 이불을 밟으며 놀이처럼 빨래를 하셨다. 집안일에 아이를 참여시키면서 놀아주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해윤은 '왜 나는 이런 것을 몰랐을까' 자책했다. 집에 있을 때도 항상 하임이에게 '위험하다', '오지 말아라', '저리 가라', 이런 말 뿐이었던 것 같았다. 항상 집안일로 바쁜 엄마를 보면서 하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엄마랑 같이 놀고 싶었을까.
하임이가 엄마를 바라볼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해윤은 아기였던 자신이 엄마를 바라봤을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도 같았다. 아기 해윤의 눈에 엄마는 항상 뒷모습만 보였다.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놀아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해윤이 자라서 그런 엄마가 되었다. 인간의 유전자에 그런 대물림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해윤은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느낌이었다.
해가 바뀌면서 대기를 걸어놓았던 근처 가정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하임이가 20개월쯤 됐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 남편은 월급이 없었고, 해윤이 버는 월급은 도우미 이모님께 반 이상 지출되고 있었다. 손에 모아지는 돈은 없었다. 하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지출을 줄이고 싶은 마음, 전공과 상관도 없고 의미없는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 이런 것들이 뒤섞일 무렵, 해윤은 직장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차피 계약기간 만료가 다가왔고, 해윤은 계약연장을 포기했다.
"실수를 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자책하고 그래. 애 두고 어렵게 나왔는데, 아깝잖아."
해윤의 성실함을 좋게 보았던 팀장이 안타까워했다.
'애 엄마인줄 모르고 뽑았고, 애 엄마라서 대충 일하면 어쩌나 했는데, 최소한 내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나보다.' 라고 해윤은 스스로 위로했다.
어쩌면 팀장은 해윤의 퇴사를 두고 또 애엄마라서 쉽게 그만둔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윤의 퇴사 이유는 엄마로서도, 경제적으로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해윤은 퇴사를 했고, 도우미 이모님과도 작별을 했다. 해윤이 낮시간에 하임이를 가정어린이집에 맡기고, 미래를 위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아기를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유망직종을 찾았다.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이 눈에 들어왔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초반에는 좀 힘들수 있지만 곧 대학취업센터에 들어가거나 시간제 공무원 일자리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근처 여성센터에서 강좌가 있었고, 취업도 연계해준다고 했다. 해윤은 공부를 시작했다. 아기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못 갈때, 전염병이 유행해서 어린이집에 못 갈때, 해윤은 아기를 집에서 보면서 공부했다.
'만약 내가 지금 어디서든 일하고 있다면 어린이집에 못가는 하임이를 누가 봐줄 수 있었을까'
해윤은 지금 자신이 하임이 옆에 있을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조금만 더 크고 조금만 더 건강해지면 그때는 마음놓고 직장에 다닐 수 있겠지 생각했다.
해윤은 곧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력서를 새로 써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번번히 서류탈락을 했다. 그러다가 집근처, 하임이의 어린이집에서 멀지 않은 곳 여성센터에서 채용공고가 나왔고,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아기가 몇개월인가요?"
"아기는 어린이집에 맡겼나요?"
"그럼 저녁에 야근할 때는 누가 봐주시나요?"
"사회생활을 하려면 아기를 봐주실 분이 계셔야죠."
면접관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들도 모두 여성이었다.
'여성센터니까 아이가 아플때 조퇴할 수 있거나 약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이건 거절이 아니라 손가락질에 가까웠다.
'나는 친정엄마가 봐주니까 일할 수 있었어. 너는 친정엄마도 없니?'
'나도 애 놓고 이렇게 바쁘게 야근하는데, 너는 애 핑계대고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니?'
라는 그들의 속마음이 들렸다. 선배에게 학폭을 당한 학생이 후배에게 폭력을 행사하듯, 이들의 문화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직업상담사로 취업을 하겠다는 해윤의 도전은 허무하게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