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대혼란 육아 프로젝트 Part3. 인생에 대안이 있을까
몇 개월 후, 마음이 조금 나아진 해윤은 간신히 새로운 일을 시도할 힘을 얻었다. 그 때 떠오른 것은 수학교습소였다. 하임이를 챙기는 것도 크게 구애받지 않았고, 외딴 섬처럼 떨어진 분양 아파트에서 시작하기에 딱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을 너무 많이 받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리라 생각했다.
사업자등록을 내고, 교육청에 신고하고, 수학교습소 간판을 걸고 전단지를 돌렸다. 며칠 뒤, 첫 학생이 등록했다. 귀여운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었다. 해윤은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다. 하임이가 1학년때 미처 채워주지 못한 학습공백을 채워주듯, 내 딸을 대하듯이 아이를 대했다. 아이는 똘똘했고, 설명을 스펀지처럼 잘 받아들였다. 그 아이가 친구를 데려오고 입소문이 나면서 공부방은 금방 많은 학생들로 채워졌다. 해윤은 이 일을 하면서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얼마나 진심인지, 아이들이 새로운 것을 깨달을 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을 느끼는지 깨닫게 되었다.
해윤은 원래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다. 연구와 지식전달 보다는 학생들을 만나 지도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막막한 진로에 등불을 비추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공부방에서, 비록 그 대상이 초등학생이기는 하나, 해윤은 작은 꿈을 이룬 느낌이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더 잘하고 싶었다.
공부방에 학생들이 많을 때는 하임이가 1학년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학부모님들은 모르셨지만, 아이들은 하임이 언니가 수학을 가르쳐주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선생님인 해윤보다 하임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하임이는 동네에서 보기 힘든 성숙하고 똑똑하고 착한 언니였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후, 해윤은 아이들의 학습지와 프린트물을 정리하고, 저녁수업을 준비했다. 해윤은 공부방에서 비대면으로 중고등학생 수학과외를 했다. 그리고 틈틈히 하임이를 챙겨 학원을 보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일을 했다. 해윤의 삶은 여전히 바빴다.
신도시는 여전히 곳곳이 공사중이었다. 단지 주변에는 초등 저학년을 위한 학원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학년을 위한 학원은 근처 대도시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변에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하임이도 공부보다는 놀이터에서 친구들, 동생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렵게 영어학원을 보냈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그만두었다. 서울로 교회를 다니고 있던 해윤은 어느 순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한다면 하임이가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이 하임이를 위해서 옳은 길일까.
남편은 서울 직장 앞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고 있었고, 비싼 관리비에, 교회가느라 서울로 오가는 교통비에, 대출이자에, 생각지 못한 지출이 많았다. 하임이는 학업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은 이 곳에서 고학년을 앞두고 있었다. 해윤은 또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어렵게 정착하고 있는 교습소를 유지하고 확장하면서 수입을 늘릴 것인지, 아니면 하임이의 장래를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인지.
"나, 또 전학 가?"
하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해윤은 그런 하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을 탓했다. 괜히 분양을 받았다, 괜히 분양을 받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들었던 교습소 아이들을 위해 작은 파티를 열고 선물을 주었다. 해윤의 첫 제자였던 아이가 손편지를 적어왔다. 앞으로 수학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수학을 재미있게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고. 해윤은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한 명씩 꼭 안아 주었다.
하임이는 학교와 또 다시 이별을 했다. 마지막 수업날 하임이는 참았던 울음을 떠뜨렸다. 이 모든 상황이 해윤은 그저 미안했다. 현재로서는, 이성적으로는, 합리적인 방향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윤도 하임이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해윤은 훌쩍이는 하임이를 안고 토닥이는 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윤은 하임이의 눈물로 자신의 마음을 토닥였다.
혼자서 이 시대의 모든 문제를 다 떠안은 느낌이었다. 엄마로서 자신의 꿈과 경력도, 학업조차도 포기했다. 아이를 안정적으로 잘 키우기 위해 청약이 답인 줄 알았는데 흙수저에게는 입주장에 잔금치르는 것도 버거웠다. 간신히 이사왔더니 주변에 아이를 위한 인프라(학원가)가 없다. 누구는 주식으로, 누구는 금과 코인으로 재테크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를 하나하나 다 알아보고 선택하고 해결하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한국사회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무거웠다.
하임이네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니던 교회 근처에 터를 잡았다. 행복한 학교와도 멀지 않았다. 다시 새로운 학교에 가야 하는 하임이를 위해 교회 초등부 친구들이 많은 반디 초등학교로 전학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교회 친구들은 학교에서 하임이를 보자 신기하고 반가워했다.
"우와~ 하임아, 네가 여기 어떻게 있어?"
"우와~ 이제 매일 보는 거야? 너무 좋다~"
교회 친구들 덕분에 하임이는 곧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다. 반디 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 된 곳이었다. 하임이 눈에는 신도시에서 새로 지은 교실건물과 새로 만든 멋진 교가에 비하면 여러가지가 구식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도시 학교보다 정이 있었다. 교회 친구들이 그랬고, 새로 사귄 친구들도 좋았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안정적이고 노련하게 아이들을 이끌어주셨다. 하임이는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임이는 이번에는 금성시 샛별 초등학교에 두고 온 친구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에 서울에서 금성시로 이사갔을 때 행복한 학교 언니,오빠들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고작 1년 사귀었던 샛별초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해윤은 이번에도 시간을 내서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왔고, 그 이후 하임이는 다시 마음에 평안을 찾았다.
이것이 하임이의 성향이었다. 사람에게 쉽게 정을 주고, 그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 해윤은 자신에게 없는, 사실은 원래 있었는데 사라져 버린 걸지도 모르는, 하임이의 이런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하임이의 마음을 알아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신과 같은 그런 엄마가, 해윤에게도 절실히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