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태양 너머로

가치관 대혼란 육아 프로젝트 Part3. 인생에 대안이 있을까

by 유혜

해윤은 하임이와 함께 이민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해윤은 그 동안의 삶에 지쳤다.

엄마가 된 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미래. 끊임없는 구직활동과 반복되는 실패,

부동산, 주식, 코인은 다 누가 가져갔는지, 공허한 정보만 넘쳐나는 사회.

애써서 청약에 당첨되도 주담대 이자에 허덕이는 매일매일...


성공하는 현대식 여성으로 살라고 가르쳐 놓고, 전통적인 살림과 육아책임 모두 여성에게 떠미는 사회,

비교하고 경쟁하고, 겸손으로 포장된 자기비하가 대물림되는 현실,

다수의 부정적 사고가 소수의 긍정적 사고마저 짓누르는 학교교육...

이런 삶이 하임이에게 대물림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해윤은 먼저 경기도 금성시에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팔았다.

이래저래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딱 1억이 남았다. 고작 이 1억을 위해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건가 허탈함이 몰려왔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해윤의 첫 집은 그렇게 하임이의 유학자금을 마련해주고 제 사명을 다했다.


처음엔 비용문제로 동남아시아 학교를 알아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았다. 한국학생들이 많은 곳에는 항상 사교육과 경쟁이 존재했다. 엄마들의 비교의식과 끼리문화, 그로 인한 정보력의 차이가 아이들의 문화를 좌우했다.


유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행복한 나라, 아르토피아(Artopia)가 눈에 들어왔다.

해윤은 예전에 한국어강사로 일하면서 만났던 '루미나'가 생각났다. 아르토피아에서 온 '루미나 벨로스(Lumina Velos)', 해윤과 비슷한 또래인 루미나는 남자친구와 함께 배낭여행을 하던 중에 한국에 매력을 느껴서 몇 개월 머물던 중이었다. 해윤은 한국어 초급반 강사로 루미나를 만났다. 적극적이고 밝은 루미나의 매력이 교실을 한가득 채웠다. 해윤은 수업이 끝난 후 루미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르토피아는 어떤 나라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루미나는 열정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나라를 자랑했다.


루미나의 표정을 보며 해윤은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나라에 대해 이렇게 자랑할 수 있을까?'


루미나가 알려준 아르토피아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활기차며, 존중과 긍정이 숨쉬는 곳이었다. 그 곳은 문명이 시작된 곳, 자유와 창의성의 나라, 평화와 존중의 나라, 그리고 일년 내내 아름다운 지중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루미나는 배낭여행 후 아르토피아로 돌아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고, 아르테미아 대학에서 동아시아학 조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해윤은 별스타그램으로 루미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민과 하임이의 유학문제를 의논했다. 루미나는 적극 환영했고, 함께 정보를 찾아주었다. 해윤은 낯선 여정에 루미나 같은 믿을 만한 조력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어 강사를 했던 경험이 헛되지 않았어.'

해윤은 지나간 시간들에 새삼 감사했다.


루미나는 아르토피아의 수도 외곽에 작은 도시 이데아폴리스(Ideapolis)에 있는 '에이레네 스콜라(Eirene Schola)'를 추천해주었다. 그곳은 기독교적 가치로 운영되는 곳이었고, 외국인의 비율은 적었으며 한국인은 아예 없었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하며 특히 미술과 디자인수업에 특화되어 있었다. 졸업후 다른 국가의 디자인 학교로 진학하거나 바로 작가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해윤은 이 학교 관계자에게 메일을 보냈고 하임이의 입학절차를 밟았다.


루미나는 또한 해윤의 일자리와 집을 알아봐주었다. 해윤은 한국어강사든, 수학강사든, 아니면 건물을 청소하는 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루미나는 자신이 일하는 아르테미아 대학에서 동아시아 도시역사학을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해윤으로서는 꿈만 같은 자리였다. 루미나는 그야말로 은인이었다.




해윤은 하임이에게 아르토피아와 에이레네 스콜라의 홈페이지를 보여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하임이는 엄마의 유학 제안을 듣고 놀랐다 한국인도 없는 유럽의 작은 학교라니.

겁이 났다. 잘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널 평가하지 않을거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자신있게, 너답게 살면 돼."


엄마의 말이 하임이의 마음에 박혀 빛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줌으로 입학테스트가 이루어졌다. 합격,불합격을 가르는 테스트라기 보다는 하임이가 기본적으로 영어 소통이 어느정도 되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라고 했다.

줌 화면 속 낯선 백인 선생님들은 하임이에게 편안한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걸어주셨다. 그리고 하임이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선생님들과 문제없이 소통했다.


"에이레네 학교에 오면 어떤 점이 가장 기대되나요?" 한 여자 선생님이 물었다.


"다른 나라에 나가서 학교에 다니는 것은 처음이라 어떨지 상상이 잘 안되요. 조금 떨리기도 해요. 하지만,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다양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에요. 친구들과 많이 놀고 싶어요."

하임이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친구들과 많이 놀고 싶다는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한국학교로 전학가는 아이를 인터뷰한다면 절대 들을 수 없는 대답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의 그 웃음이 따뜻해 보여서 해윤은 감동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3월.

하임이와 엄마는 아르토피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몇개월 간 현지에 적응을 하고 9월에 7학년으로 입학하기로 했다.


비행기에 오르는 하임이의 얼굴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항상 하임이를 관찰하기만 했던 해윤의 눈이 이번에는 아무 걱정없이 하임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봤다. 하임이와 눈이 마주쳤다.


하임이 눈에 해윤이 비쳤고, 해윤의 눈에 하임이가 비쳤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눈으로 말했다.


어른들의 삶의 모습을 아이들이 배운다.

해윤은 자신의 용기있는 선택을 하임이가 배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행기 날개 너머 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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