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1981년 ~ 1986년) 어느 때인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남원 터미널 인근이 아니었나 싶은데, 광주민주화 운동에 관한 사진과 대자보 형식의 글이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뭐지? 또는 이상한 곳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힐끗 쳐다보고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특별한 고민 없이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1990년 전주 영생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도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당시 전주 영생고등학교는 전주대학교 내에 있었는데,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두 번 정도는 시위로 인해 일찍 하교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는 일찍 하교하는 계기 정도로 기억됩니다.
1993년 전북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제가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해방 이후, 문민정부로 넘어오기까지 사이에 독재와 맞서 싸우던 학생운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막연한 동경이었을 뿐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았다거나, 정치적인 이념이 뚜렷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3년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출범하던 해였는데, 막연한 동경으로 대학교 1학년 동안 틈만 나면 농구를 했던 행정학과 동기들과 함께 잠시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날이 오면’을 듣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도의 활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막연한 동경도 94년 4월에 군 입대를 해서 96년 6월에 제대를 한 후,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느라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1990년대를 20대의 대부분으로 보낸 저는 군대에 있을 때 방영되었던 “모래시계”, 군 제대 후 보게 되었던 이정현 배우의 신들린 연기가 돋보였던 “꽃잎”,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던 설경구 배우의 눈을 잊을 수가 없는 “박하사탕” 등으로 1980년대를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40대에 이르러, 2016. 10. 29.에 시작된 촛불집회, 2017. 3. 10.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2017. 5. 10.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2018. 1. 12. 금요일 오후 6시 퇴근시간 무렵 1주간의 업무 정리 및 다음 주의 재판 일정에 관한 회의를 마쳤습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갔지만 저를 비롯한 신용섭 변호사, 박병훈 변호사, 김욱중 변호사는 잔무를 처리하기 위해 남아 있었습니다. 저에게 영화 예매권 2장, 신용섭 변호사에게 영화 예매권 2장이 있었는데, 4명의 변호사가 영화를 보러가기로 의기투합하였습니다.
준이(박형준 변호사), 섭이(신용섭 변호사), 훈이(박병훈 변호사), 욱이(김욱중 변호사) 4명은 예매한 영화 “1987” 시작 전까지 잔무를 처리하고 빠르게 CGV천안펜타포트로 향하였습니다. 팝콘과 음료를 사들고 훈, 섭, 준, 욱 순으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섭이, 훈이, 욱이는 제가 가끔 3명의 변호사를 친근하게 부르기 위해 붙인 호칭입니다.
1987. 1. 14. 에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사람들과 이 사건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 결국에는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연희는 최루탄 속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한열을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알 듯 모를 듯한 연정을 품습니다. 연희는 대학선배인 이한열 때문에 광주민주화 운동에 관한 비디오를 보고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한열에게 왜 나에게 이런 비디오를 보여 주냐며 울면서 따집니다.
이한열은 1987. 6. 9. 학생시위에 참가하기 전에 연희를 찾아가 연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 표현합니다. 학생시위에 참가한 이한열은 직사로 발포된 최류탄에 뒷머리를 맞습니다.
신문에서 이한열의 소식을 접한 연희는 울음을 터트리며 광장을 향해 달립니다.
영화를 보던 저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쏟아졌던 것 같습니다. 훌쩍이는 저를 욱이가 옆에서 쳐다봅니다. 영화가 끝난 후 욱이가 저에게 이야기 합니다. “변호사님이 울어서 당황스러웠어요”
처음에는 제가 흘렸던 눈물이 단순하게 연희의 이한열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흘린 눈물은 연희의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박종철의 죽음, 오열하는 가족들, 한줌의 재로 흩날려지는 아들에게 잘 가라고 흐느끼며 인사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할 말이 없다며 통곡하는 모습 속에서 차곡차곡 감정들이 제 속에 쌓입니다.
영화 중반부 부터 등장하는 연희는 “my, my” 때문에 삼촌의 위험한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공무원이 그래도 되냐며 걱정과 투정이 섞인 투로 삼촌에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이한열에 대해서 남모르는 연정을 품기도 하지만 몰랐던 진실을 보여준 것에 대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삼촌이 심하게 맞으며 잡혀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연희는 삼촌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 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갇힌 세상에서 점차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에 감정이 폭발합니다. 울먹이며 서울시청 앞으로 내달리던 연희는 슬픔을 머금고 버스 위에 올라서서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보면서 벅찬 감격을 느끼며 오른쪽 주먹을 꼬옥 쥐고 어깨 위로 올려 구호를 연호합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영화 초반 자식을 잃은 부모, 가족들의 슬픔을 머금고, 영화 중반부터 등장한 연희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서 연희의 시선에 따라 자연스레 연희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연희의 슬픔이 제 슬픔이 되어 눈물이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연희의 시선은 마지막에 다시 관객의 시선으로 바뀌고, 관객인 저는 저를 보게 됩니다.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이후 198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는 그 시대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분노, 슬픔, 먹먹함, 고마움, 감격으로 어우러진 감정의 폭풍 속에 휩싸이게 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