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욕기_온천 명인 3단 도전기
온천 명인에 도전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아침 온천이었다. 눈 뜨자마자 온천에서 아침을 맞이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벳부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나는 칸나와 마을 중심에 위치한 지고쿠바라온센(地獄原温泉)으로 향했다.
기대를 안고 온천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일곱 시. 아주머니 몇 분이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며 목욕 중이었다. 어설픈 아침 인사를 건네는 낯선 이의 등장에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는 아주머니들을 애써 외면하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온천에 들어가기 전 꼼꼼하게 씻고, 탕에 들어가려 한 쪽 발을 딛는데, 그 순간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아마도) “잠깐만!”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한 발은 탕 위에, 한 발은 바깥에 놓은 채로 동작 그만 상태가 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주머니의 외침에 어리둥절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방금 전까지 했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히 들어가기 전 꼼꼼하게 샤워도 했고, 조심히 발도 디뎠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쏟아지자 “와따시와 칸코쿠진데스(저는 한국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아주머니는 바디랭귀지를 동원해 말뜻을 전하려 애썼다. 그리고 도가 트이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탕 둘레에 발을 디뎌선 안 되는구나!
세상에 많고 많은 법도가 있다면, 온천에도 법도가 있을 터. 그리고 여기는 온천의 성지 벳부가 아니던가. 벳부 온천에는 보편적인 입욕 매너를 넘어선 법도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탕 둘레에 발을 딛지도 앉지도 말 것’이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거들어서 설명하기를,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특별히 금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벳부의 온천에서만큼은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 것이, 벳부의 어떤 온천에서도 탕 둘레에 앉는 사람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그 밖에도 적당한 자리를 잡는 법, 물을 튀기지 않게 바가지를 쓰는 법, 찬물을 사용하는 법, 자리 정리하는 법, 인사하는 법 등 깨알 같은 팁들을 전수해주었다.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대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무림의 고수를 만나 수련을 하듯 벳부의 온천 법도를 익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어쩐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충실히 수행하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며 돌아서는데 어깨 뒤에서 “스바라시(훌륭해)!”가 울려 퍼졌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리가토 고자이 마시타(감사했습니다.).”
꿈결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온천 수증기와, 코끝을 건드리는 유황 내음이 가득한 지옥 온천 마을 칸나와에서 나는 제대로 지옥의 법도를 배웠다. 뜻하지 않은 특훈을 통과했기에 지고쿠바라온센에서의 아침 온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고 뿌듯했다.
지고쿠바라온센(地獄原温泉) ㅣ 〒874-0044 Ōita-ken, Beppu-shi, Kannawahigashi, 風呂本166
아침 6:30 ~ 저녁 9:00, 연중무휴 ㅣ입욕료 100円(무인함에 투입)
위생상의 문제로 금한다고 하지만, 사실 탕 주변 바닥에 앉아서 씻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봐서 꼭 위생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어릴 때 문지방 밟으면 혼났던 기억을 떠올리면 편하다. 깐깐한 아주머니의 잔소리나 호통을 듣지 않기 위한 팁이니 명심하자.
샤워기가 없다. 좌석도 따로 없다. 오래된 공동 온천이기 대부분이기 때문에 시설이 많이 낡았다. 탕의 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야 한다. 바가지로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더라도 주변에 거품과 물이 튀지 않는 스킬, 대충 팔을 뻗어서 적당량의 물을 퍼 담을 수 있는 손목 스냅이 필요하므로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두자.
고온의 온천이 많아서 탕의 온도를 적정하게 맞추기 위해 대부분의 탕 옆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다. 수도꼭지 자리를 사수하면 뜨거운 탕의 물과 수도꼭지의 찬물을 적절히 배합해 최적의 온도로 씻을 수 있다. 단, 누군가 있다면 꼭 양해를 구하고 찬물을 틀자.
온천의 공용 바가지와 앉은뱅이 의자 등을 썼다면 모두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 기본 매너다. 한국 목욕탕에서는 썼던 바가지나 의자를 씻어서 그대로 자리에 두고, 다음 사람이 편안하게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배려라고 배웠지만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다녀갔다는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이 포인트.
동네 주민들의 만남의 장인 온천에서는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편이 좋다. 아침에는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점심에는 곤니찌와, 저녁에는 곰방와로 인사하면 된다. 조용하게 입욕하고 있는 탕에 들어갈 때는 ‘시츠레이시마스(실례합니다)’라고 얘기해주면 더 좋다. 목욕을 다 마치고 나갈 때는 ‘아리가토 고자이 마시타(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해보자. 비록 어설픈 일본어였지만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어 뜻하지 않았던 인연이나 선물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