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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Nov 06. 2017

알몸의 기념사진, 카미야 온센(紙屋温泉)

입욕기_온천 명인 3단 도전기


    여행 4일째, 드디어 벳부 시내에 왔다. 그동안 쭉 벳부에 머물렀음에도, 벳부 역의 전혀 다른 풍경에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오가는 버스와 기차, 번화한 상점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아부라야 할아버지(벳부 역의 유명한 동상)도 없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 단 하나 없었지만 얼른 벳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역시 온천. 벳부팔탕 중 가장 온천이 많은 벳부 시내로 왔으니, 돌아볼 곳도 가보고 싶은 곳도 정말 많았다. 구글맵에 별을 찍으며 정녕 골목골목마다 온천이 있다는 것인지 믿을 수 없었기에, 얼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소와 가장 가까운 곳의 온천으로 먼저 향했다. 과연 골목을 조금만 꺾어 올라가자 눈 앞에 보이는 저것이 온천인가!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벳부의 흔한 온천 건물. 벳부 온천에는 굴뚝이 없다. 물을 끓이지 않는 온천이니까, 굴뚝이 있을 필요가 없다.


카미야 온센의 입구. 여느 동네 온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온천 입구로 들어가 100엔을 내고 입욕권을 받았다. 카운터를 지키는 아주머니는 나의 '햐쿠엔데스카(백 엔 입니까?)'만 듣고 일어를 할 수 있는 줄 알았는지 무언가 길게 얘기하셨지만, 알아듣는데 실패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는데, 1,000엔을 내면 입욕권 10장에 1장을 더 얹어 11장을 준다는 얘기였다! 센 엔(천 엔)과 쥬이치(십일)로 겨우 추리한 나의 일본어 실력. 이런 실력으로도 온천을 다니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100엔을 내면 주는 입욕권. 대부분의 온천은 입욕권이 없었는데, 이곳은10장 묶음 판매를 위해 입욕권을 발행하는 것 같았다.


    입욕권까지 받았으니 이제 입욕할 차례. 늦은 오후라 그런지 탕에는 할머니 한 분만이 느릿느릿하게 몸을 씻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탕가에 앉아 한 바가지 물을 끼얹었는데, 생각보다 뜨거운 물 온도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씻고 있으니 이걸 어쩐다. 찬물을 틀 일이 생기면 언젠가 써먹겠다고 야심 차게 공부해 온 문장도 그 순간에는 생각이 나질 않아, 어쩔 도리 없이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며칠 뜨거운 물에 들어갔더니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조금 힘들긴 해도 이 정도에 질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벳부의 온천은 원래 뜨겁기로 유명하고, 나는 벳부 온천 명인에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으니 뜨거운 물에도 단련이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쓸데없이 비장한 생각을 한가득 안고 탕에 들어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 곳의 물에는 철분이 많아서 그런지 살짝 뻣뻣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물. 그리고 가만히 즐기는 나. 요산요수가 따로 있나요. 도인이 된 것 같았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일본 동네 온천이나 목욕탕에서 자주 보이는 산 그림. 후지산을 동경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제 슬슬 탕을 나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할머니가 드디어 몸의 물기를 닦고 탕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문득 든 생각. '온천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해볼까?' 잠시 고민한 뒤, 할머니께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노, 스미마센. 샤싱 도떼모 이이데스까(저, 죄송합니다만 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러자 흔쾌히 "괜찮아요(이이데스)."라고 답하더니, 뜻 모를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본어를 못한다는 걸 눈치를 챈 할머니가 바디 랭귀지로 전달한 말뜻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사진 모델을 해줄까?"


    그 말에 놀라서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더 흥미로웠다. "그럼, 니 사진을 찍어줄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일본어로 "데모 누드데스(하지만 누드인데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솔루션을 제시해주는 게 아닌가! "탕에 들어가면 안 보일 텐데?" 이쯤 되니 이렇게까지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온천에서 알몸으로 기념사진이라니. 분명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에 냉큼 탕으로 입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아래 사진이다.



탕의 벽에 바짝 붙으면 안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배운 걸 언제 또 써먹을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평도, 초점도 모두 실패한 사진.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은 뒤 조심스레 괜찮게 나왔냐고 물었지만, 결과물을 확인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알몸의 기념사진을 찍어 준 사이가 된 할머니와 나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벳부에 여행 왔냐고 묻기에, 꼭 써먹으려고 외워 온 문장 "저는 온천 명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를 읊었더니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할머니는 어떤 온천에 다녀왔는지, 어떤 온천이 좋았는지, 어디에서 머무르는지 등 계속해서 질문을 했고 신이 난 나는 잘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한참 수다를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내게 반가움을 표현하려 그랬는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며 한국 음식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할머니가 선물로 준 온천수. 위장과 피부에 좋다고 숙소에 넣어두고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날 무렵, 특별한 사진을 남겨준 할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준비해 간 비장의 무기, 유자차 포션 두 개를 선물로 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물이 가득 담긴 1.2리터 페트병을 건네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내게 "이거 온천수야. 위장이랑 피부에 좋아. 냉장고에 넣어 마시면 더 좋고."라고 하며 손에 페트병을 쥐어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할머니의 답례에 작은 감동을 느꼈다. 먼저 온천을 떠나는 할머니에게,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를 건넸다. "도모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키오츠케테.(정말 감사했습니다. 살펴가세요.)"



카미야온센의 탈의실 한쪽 벽에는, '내가 사랑하는 벳부'를 주제로 벳부의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온천을 떠나고, 나는 한참을 탈의실에 앉아 오늘의 만남이 가져다준 여운을 즐겼다. 평범한 동네 온천을 들어왔을 뿐인데 온천의 문을 하나하나 열고 들어갈수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은 뭘까. 참 이상했다. 알몸의 기념사진도, 갑자기 손에 쥐어진 온천수도. 


    그런 생각을 하며 탈의실 한쪽 벽에 걸린 벳부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근거 없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건, 벳부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온천들이 손짓하며 어서 오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벳부와 조금은 친해진 것 같으니, 앞으로의 온천은 또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정처 없이 부푸는 마음을 안고 나는 또 다음 온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온천 정보


카미야 온센(紙屋温泉) ㅣ 〒874-0942, Ōita-ken, Beppu-shi, 千代町8番の2 

13:00 ~ 23:00, 연중무휴 ㅣ 입욕료 100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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