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말 목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천고래 Aug 02. 2019

그 마음이 약이라고

주말 목욕_경남 통영시 봉평동 '약수탕'


통영시 봉평동, 달리 말하면 봉수골을 알게 된 건 삼 년 전이었다. 책방에 딸린 숙소 하나 예약해 두고 뚜벅이로 떠났던 일박 이일의 가을 여행. 관광지 하나 없는 조용한 동네 골목을 거닐며 시간을 천천히 보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숨어든 곳에서 책을 읽거나 단팥죽을 먹었고, 목욕을 했다. 이곳 약수탕에서.


그러니까 난생처음 '목욕 여행'을 한 곳인데, 여러모로 퍽 인상에 남았던 공간이었다. 다정다감한 말씨의 사장님이 늘어놓았던 수다나, '약수탕에서 훔친 수건'이 인쇄된 재미있는 도난 방지용 수건, 정감 있는 우유 구멍……. 그 모든 게 다시 나를 불렀을까. 우연히도 친구가 봉수골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집들이에 초대를 받았다. 문득 약수탕이 떠올랐다. 목욕 가방을 차에 실었다. 꼬박 삼 년 만이었다.


목욕합니다, 가장 반가운 말.
아이보리색 단층 건물에 위풍당당 솟은 주홍빛 굴뚝. 야자수 나무가 어쩐지 이국적이다.
넉넉한 수건 인심


촘촘히 심긴 벚나무를 따라 봉수골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목욕합니다'라는 입간판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길의 중간 정도 되는 나름 목 좋은 위치다. 부지런히 아침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과,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비몽사몽 한 얼굴의 내가 아래에서 올라와 목욕탕에서 만난다. 그렇게 낯 모르는 이들과 나란히 목욕탕으로 향하는 아침. 목욕탕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정상에 오른 듯 괜스레 기분이 상쾌했다. 


혹시나 뭐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싶어 주변을 살피며 입장. 조마조마한 마음과 달리 뭐 하나 바뀐 게 없었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가장 반가웠던 건 사장님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장님은 나를 기억 못 하는 듯했지만. 일단 목욕부터 하자. 탕으로 향했다. 


2016년(왼쪽)과 2019년(오른쪽)의 우유 구멍.


탈의실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건 '우유 구멍'이었다. 안내문이 바뀌어 있었을 뿐 구멍은 그대로였다. 삼 년 전, 저 구멍으로 우유를 받아먹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장님은 구멍으로 우유를 건네주며,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서 그냥 뚫어버렸다'라고 시원스레 말하곤 까르르 웃으셨었더랬다.


그 밖에도 모든 것들이 기억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는 거. 역시 목욕탕은 아침 시간대가 가장 핫한 걸까. 꽤 북적북적했다. 모녀 지간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와 허리가 굽은 할머니, 새댁처럼 보이는 제법 젊은 축의 아주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할머니와 할머니들. 인파에 비해 과묵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목욕탕은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기억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깊고 높게 만들어진 열탕과 미지근한 탕이 있었는데, 전체 면적에 비해 조촐한 규모였다. 안쪽 세신 하는 방에선 세신사 아주머니가 천장에 달린 봉에 매달려 누군가의 등을 지근지근 밟고 있었다. 세신사 아주머니 등 뒤로 난 유리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환히 쏟아지는 덕에, 그 모습이 마치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채 졸음이 가시지 않아서일까. 밥 먹고 다시 이불에 파묻히듯,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싶었다. 탕에 가까이 다가가 들어가려고 보니 물이 아주, 아주 검었다. 뭔가 물에 떠다니고도 있었다. 벽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매일 대구 약령시장에서 공수한 쑥으로 정성껏 만드는 탕입니다. 제발 물을 넘기지 마세요.' 많은 이들이 때나 이물질로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몸을 담그니 쑥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마치 쑥국의 거대한 건더기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비주얼과 다르게, 기분이 꽤 좋아지는 탕이었다. 눈을 감고 한참을 탕에 머무르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잠을 즐겼다.


인기 많은 목욕탕이 그렇듯, 단골들의 바구니로 빼곡하다.
싹싹하고 정 넘치는 사장님, 단골들과의 대화가 즐거워 보인다.


목욕을 마치고 드디어 카운터로. 흔치 않게도, 사장님께서 활짝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오신다. 


"목욕 잘 했어예?"

"예, 개운하고 좋네요. 저, 삼 년 전에 왔었어요. 그때 혼자 놀러 왔다가 저녁에 목욕하고 갔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이 동네로 이사를 해서 또 놀러 왔어요."

"아이고, 그래요. 친구는 머하는데 이까지 이사를 왔노?"

"회사 다닌다고 그렇대요. 오랜만에 왔는데 그대로 계셔서 너무 반갑네요."

"하이고, 내사 있던 대로 있는 건데 뭐. 근데 얼마 전에 왔으면 내 못만났을낀데 다행이다."

"왜요?"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거덩요. 근데 동호회 사람들하고 여행 갔다가,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를 빌려가 쌔리 막 밟고 신나게 며칠을 탔더니 무릎이 콱 나가대. 그래가 수술했어요. 다 나순 지 얼마 안 됐어. 내내 서울로 왔다 갔다 하고 하이고 마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아, 저런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때 삼 년 전에 왔을 때 요 앞에 자전거 매어져 있었던 거 기억나요. 저한테 수륙터 가서 자전거 타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맞아요, 그때 아주 쌩쌩하니 잘 다녔는데. 수륙터도 내가 갈챠줬는가배? 어떻든가?"

"네, 그때 자전거 타러 갔었는데 참 좋았어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물도 너무 맑고, 진짜 좋던데요."

"하모. 내가 통영 정 붙인 게 수륙터 때문 아이가. 거게가 참 좋아요."


이게 바로, 쑥탕을 만든다는 밥솥.


내친김에 내심 궁금했던 쑥탕에 대해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쑥탕은 예전엔 못 봤던 거 같은데. 좋더라고요."

"아, 그거. 마 자꾸 물을 넘가사서 그게 힘들지요."

"거기 안내문에 대구 약령시장에서 쑥을 사 갖고 오신다고 되어있던데요."

"거게 잘 아는 사람이 있어. 캐가 거기서 쑥을 택배로 받는다 아니가. 그거 받아가 말라가 저 밥솥에 찌고 맨날 해대. 보통 일이 아니라. 밤에 청소 싹 하고 물 새로 받고 망에 넣어가 밤새 우라는 물이라, 진짜 약물이야. 우리는 아는 사람한테 받는 거라 쑥도 국내산만 받지. 근데 사람들이 자꼬 물을 새로 틀고 넘가고 그래. 원래 그래까지 물이 검지는 않거든? 우리는 왕창 넣어쌓니까 그게 엄청 색도 검고 진하다 아입니까. 쑥이 몸에 참 좋다 캐서 약되라고 하는 거거든."

"그럼 매일 쑥을 찌고 하시는 거예요?"

"하모, 여기 오는 단골들한테는 목욕하는 게 낙이고 보람인데. 해야지요."


단골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모습.
언제나 반가운 간판을 볼 수 있기를.


입담 좋고 싹싹한 사장님은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서울의 병원을 오가며 아픈 무릎을 고치느라 고생한 이야기, 그렇지만 자전거를 너무나 좋아해서 전국을 누볐던 이야기, 타지(대구)에서 와 통영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 질녀와 목욕탕을 십 년 넘게 운영하는 이야기……. 약수탕 앞의 벚꽃이 참 예쁘니, 좀 이따 벚꽃 필 때 또 오라는 말에 곧 또 오겠다고,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섰다. 


목욕만큼이나 한참 긴 이바구며 넉살을 늘어놓고 돌아 나오는데, 선잠 자느라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가신 기분이었다. 과연 쑥탕 효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뒤를 돌아봤더니, 멀리서 사장님이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 때야 알 수 있었다. 다정한 사람의 마음도 쑥처럼 향기롭다는 걸. 어쩌면 약수의 비결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 마음이리라. 그가 건네준 기분 좋은 에너지 덕에, 오늘 하루는 거뜬히 행복할 테니.


목욕 가방을 들고 다시 내려가는 길, 아침부터 모닝커피를 공수하겠다며 산책 나온 친구들과 마주쳤다. 커피 향과 비누향을 폴폴 풍기며, 십육 년 전처럼 왁자지껄 떠들고 웃었다. 낯선 동네가 문득 사랑스럽고 정겹게 느껴졌다.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었다.




목욕탕 정보

약수탕 ㅣ 경남 통영시 봉수로 65-1

4:30~20:00, 매주 목요일 휴무ㅣ 대인(초등학생 부터) 6,000원, 소인(미취학까지) 4,500원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내일도 영업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