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블록으로 쌓아 올리는 취리히의 일상 기록
언제부턴가 저체중과는 상반된 그래프로 야금야금 우상향 곡선을 그려가던 체지방률.
겉으로 보이는 내 몸의 숫자만 보고 누군가는 “자랑해? 재수없다” 할지도 모른지만 사람마다 지향하는 몸이 다르고, 도달하고 싶은 컨디션 또한 천차만별이다. 아니, 애초에 이 몸의 숫자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부류도 허다할 것이다.
각자의 관심사와 가치관이 다르다는 걸 기본값으로 전제하더라도, 나에겐 최근 야금야금 오르더니 급기야 앞자리 숫자를 바꿔버린 체지방 수치는 꽤 짜증스러운 궁금증이었다.
‘왜지? 왜 자꾸 오르는거지?…뭘 잘못하고 있는거지?’
누군가에겐 워너비일지 모를 이 체중 안에서, 나는 내 인생의 체지방 정점을 찍었다는 신호만을 포착했다.
해결책을 두고 한참 고민하던 중, 평소 혼자 따라하던 홈트 영상의 주인공과 직접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절묘하게 맞닥뜨린 이 호기를 이용해 전문가의 눈으로 내 몸의 궤도를 다시 잡기로 했다.
내일부터 온라인 PT와 함께 영양사의 1:1 식단 코칭이 시작된다.
이제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는 공포가 밀려오자, 며칠간 잘 지켜온 금주와 금단의 벽이 스르륵 무너진다.
우선 맥주.
도수 3.8도라는, 술인지 보리차인지 모를 녀석 한 캔을 땄다.
며칠 안 마셨다고 그새 주량이 신생아급이 된 건지, 반 캔 만에 기권했다.
함께 씹던 한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이라이트는 단 거다.
일주일만이라도 단 거 끊자고 결심한 지 6일차에 우유와 단백질 파우더에 씨리얼로 덮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지막 양심인 양 투척한 단백질 가루 한 스푼이 단백질인지 설탕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달다.(이곳 프로틴 파우더는 다 달다)
'먹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언제나 식도를 타고 넘어간 뒤에야 도착한다.
내가 먹은 건 시리얼이 아니라 '미련'이었다.
오늘 하루 식단은 완전히 망했고…, 인생은 원래 이런 거다.
내일이면 스크린 앞에서 내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야 한다. 당당한 드러냄을 위해 수강 신청을 한 건데, 정작 시작도 전에 그날 잘 보이기 위해 급살 타파운동을 미리 하는 아이러니라니.
의지에 불타 스트레칭으로 시작하고 AB슬라이드까지 마칠 때만 해도 분명 근력 운동 후에 40분 유산소 운동이 철썩같이 계획에 들어있었다.
시작은 창대했다.
'유산소 40분 가즈아!~'
하지만 근력 운동 10분 만에 마음속 협상가가 고개를 든다.
'야, 근력 운동 하는 날엔 유산소는 30분만 해.'
근력 운동이 끝날 때쯤엔 이미 영혼이 가출했다.
결국 20분도 간신히 버티고 숫자가 바뀌자마자 STOP 버튼을 눌렀다.
‘20분이라도 한 게 어디냐’며 땀을 닦는 '나'란 인간.
운동을 하는 건지, 협상을 나간건지 모르겠다. –협상도 이렇게 하면 망한 협상이다–
식단 좀 어기면 어떻고, 운동 좀 덜 하면 어떠랴.
어쩌면 오늘 내가 저지른 이 자잘한 실수들은 테트리스에서 내려오는 '모양 사나운 블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블록 자체가 아니라, 그걸 대하는 내 태도에 있었다.
학교 다닐 때였지.
수업 끝나고 친구들이랑 오락실에 들러 테트리스 한 판씩 하던 기억이 난다.
똑같은 블록이 내려오는데도, 매 판이 달랐다.
어떤 판은 금세 쌓이고, 어떤 판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그 중에서도 제일 간절했던 건 딱 하나.
긴 막대기!
그거 하나만 떨어지면 판이 싹 비워지고, 짜릿하게 4줄 클리어. 근데 문제는…
그게 진짜 안 온다.
계속 엉뚱한 블록만 떨어지고, 마음만 조마조마해지고.
‘이거 하나만’ 기다리다, 결국 쌓이고 쌓여서 망한다.
'아, 분하다. 리셋. 다시 시작'.
그런데 요즘 문득, 그 게임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산다는 게, 자꾸 뭔가를 기다리는 일 같다.
딱 한 번만 기회가 오면, 딱 이번에만 누가 날 봐주면, 딱 한 번만 상황이 좀 풀리면.
그 ‘긴 막대기’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버틴다.
하지만 정작 삶은 그런 블록만 바라보다가는 진짜 ‘Game Over’ 나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살다보면 정작 가까운 사람과도
각자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환경도 다르고, 가진 것도 다르고, 시작점도 다르다.
나는 불행이라고 우는 소리로 떠드는데
그에게는 행복한 고민으로 들릴 때가 있고,
그가 불만이라고 떠드는 것들은
나의 워너비인 경우도 숱하다.
부러워도 내 것이 될 수 없고,
불만이고 갖다 버리고 싶어도 착 붙어 안 떨어지는 것도 허다하다.
그러니,
인생은 결국, 내가 가진 무기로 싸워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 무기가 작아 보일 수도 있고, 투박할 수도 있지만,
내 손에 쥐어진 그것이 곧 내가 플레이할 수 있는 전부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맵이 넓고, 블록도 좋아.
우린 자꾸 남의 화면만 보면서 ‘왜 나는 저런 게 없지?’ 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테트리스는 결국 내 화면에서, 내 블록으로 싸우는 게임이다.
남이 뭘 가졌든, 내가 가진 걸 어떻게 쌓느냐가 전부다.
내가 지금 쥔 블록이 ‘쓸모없는 모양’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 그냥 잠시 버티는 거다.
다른 조각들과 어울리게끔, 모양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거다.
중요한 건 계속 플레이하는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그 기다림이 오히려 내 자리를 무너뜨린다.
긴 거? 언젠간 올지도 모른다. 안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없더라도 인생이 끝나진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걸 기다리느라 망치는 게 진짜 끝이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조각을 주우며, 지금 쥔 블록을 한 번 잘 돌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를 쌓기 위해.
가장 훌륭한 무기는, 지금 내 손에 쥔 그것이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조각을 주우며
2026년 3월 16일, From Zürich ~
몰도바 작곡가 Eugene Doga의 Gramophone Waltz.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올 법한, 조금은 오래된 우아함이 방 안을 가볍게 맴돈다.
한국 드라마나 예능에서도 종종 배경으로 흘러나왔던 익숙한 멜로디.
조용한 오후, 조금 느려도 괜찮은 날의 배경음.
https://youtu.be/1p0pe-1_xUk?si=SjhIC4mPjgXbou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