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날로 먹고 싶다

허투루 넘지 못할 일상의 심술, 나날이 처절해지는 날로 먹을 궁리

by 온 세상이 내 편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인생을 좀 날로 먹고 싶은 사람이다.

애쓰지 않아도 운이 뙁~열리고 , 대충 뭉개도 결과는 근사하길 바라는 비겁한 욕망. - 그저 나와 맞지 않는 욕망’이라고 부인하고 싶을 뿐, 인생이 내 맘대로 그렇게 안 되니까 그런 걸 안 바라는 척 한것일 뿐, 사실 나는 요행을 무척 바란다.

어제 애한테 잔소리 하고 나서도 생각했다.

‘애고… 네나 나나 뭐가 다르냐… 나도 이렇게 날로 먹고 싶어 안달인데… 너는 젊기나 하지, 난 왜 철도 안 드는걸까..’


오늘같이 날씨 꾸물꾸물해서 기분 축 처지고 되는 일 하나도 없을 땐 비겁한 욕망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1. 에어프라이어 - 돌덩이가 된 콩

내일부터 시작될 식단 코칭을 앞두고, 큰맘 먹고 에어 프라이어를 들였다.

한국에선 이미 한물간 유행이라지만, 식구 없는 타지살이에 망설이다(집에 없는 기계가 없다. 요리 도구의 수가 늘어날수록 요리의 맛이 떨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어제 세일 하길래 ‘사야할 시점이 왔군’하면서 사들고 오는 내내 ‘내일 이걸로 뭘 해 먹는다지?’ 궁리만 했다.


집에 널린 게 병아리콩이고 늘 삶은 병아리콩이 떨어진 적이 없어서 ‘병아리콩’으로 간식 만들어보겠다며 이리저리 레시피를 뒤졌다.

‘하나같이 너무 쉽고 맛있다’는 말들이 가득했다.


마침 남은 삶은 병아리콩이 있기에 꺼내들었는데, 남편 말이 ‘그 병아리콩 좀 이상하다’고 했다.

물에 넣어도 거의 불지 않고 맛도 별로라며, 오래된 콩 같다고 했다.

나는 ‘더 잘 됐다’ 싶었던게 어차피 소금간 약간 할 거고 테스트 용이니 맛없는 걸로 해보자’ 싶었다.

물기 제거하고 올리브유 ‘칙칙’ 뿌려서 파마산 치즈가루까지 버무려서 대망의 새 기계에 넣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물에 불려도 꿈쩍 않던 이 콩들은 기어코 까맣게 타버린 조약돌이 되어 돌아왔다.


살 때까진 설레었는데, 타버린 잔해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도 처참하다.

음식만큼은 늘 솜씨든 운이든 따라주지 않는 '나'란 인간.

장비가 문제가 아니라 내 팔자가 문제인가 싶은 씁쓸함이 새 기계 냄새와 묘하게 섞인다.

이 쉬운 것조차 날로 먹게 해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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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저녁 식사까지 이어졌다.

에어프라이어에 데인 마음을 오븐으로 달래보려 새우를 넣었다.

180도에서 22분.

‘이 정도면 딱 맛있게 익었겠지’라며 호기롭게 꺼냈는데, 웬걸. 새우가 자기 껍질을 생명줄처럼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물이 안 좋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가혹하게 오래 익힌 걸까.

결국 품격 있는 저녁 식사는 물 건너갔고, 나중엔 나이프를 들고 새우 껍질과 피 튀기는 '회치기' 사투를 벌였다.

입에 들어간 건 몇 점 되지도 않는데 기운은 다 빠졌다.

결국 혼자 연어를 썰어 마른 김에 싸 먹고도 맘이 허해서 한 몇 일 끊었던 강냉이를 와작 와작 씹으며 나직히 읖조려 본다.


"인생아, 부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에게 살짝 날 걸로 와 줄 순 없겠니?…."


2. 11.6km, 정직해서 짜증나는 숫자

어젯밤 예보엔 오늘 종일 ‘눈’이 온다고 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완연한 봄이더니, 취리히의 날씨는 다시 겨울로 회항 중이다.

'눈 오면 운동 쉬어야지'라며 날로 먹을 핑계를 찾았건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달리기 딱 좋은 흐릿한 날씨를 내어주었다. 핑계 대고 쉴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결국 몸속의 미련을 털어내려 11.6km를 달리고 왔다.

지난주보다는 기록을 조금 앞당겼지만, 예전 기량을 생각하면 여전히 갈 길이 구만리다.

한 발 내디딘 만큼만 전진하고, 딱 숨이 가쁜 만큼만 기록이 나오는 이 정직한 시스템이 오늘따라 참 피곤하다.


'누가 등이라도 좀 밀어줬으면', '순간이동이라도 했으면' 하는 망상을 한다.

하지만 내 허벅지의 떨림은 정직하게 말한다. 지름길 같은 건 없다고.

땀 흘린 만큼만 칼로리가 타는 이 고지식한 메커니즘 앞에서, 인생을 날로 먹으려던 내 야망은 11.6km의 숫자 뒤로 힘없이 무너진다.

정직함이 미덕이라지만, 가끔은 이 정직함이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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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을 덮고 소설로 튀는 비겁함

책도 마찬가지다.

장서 읽기 모임에 들어가면서 읽기 시작한 6권짜리 시리즈.

진득하니 앉아 커피나 홀짝거리며 읽다 보면 책 여섯 권이 스윽- 끝나는, 그런 우아한 그림을 그리며 시작했었다.


독서조차 좀 날로 먹어보려 했던 심산이었을까.

이번 주까지 끝냈어야 할 철학 파트는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시간을 쥐어짜고 체력을 쏟아부어도, 운동 후엔 뇌가 즉시 수면 모드로 직행한다.

끝까지 붙들고 있다간 완주는커녕 낙오가 뻔해 보였다.

그래서 비겁해 보일지라도 일단 덮기로 했다.


내일부턴 남들 속도에 맞춰 세계소설을 시작할 거다.

뒤처진 걸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것, 이것도 어쩌면 완주를 위한 나만의 '영점 조절'이다.

날로 먹지는 못해도, 최소한 타버린 콩이나 질긴 새우 껍질처럼 인생을 씹기 힘들게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덜 익었으면 덜 익은 대로, 일단은 삼켜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4. 다시, 출발선

타버린 병아리콩 잔해를 치우고, 다 읽지 못한 철학 책을 책꽂이 깊숙이 밀어 넣는다.

인생을 좀 날로 먹어보려고 새 기계를 사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며 발버둥 쳐봤지만, 결국 '내 인생에 그런 요행은 없다'는 것만 확인한 하루다.

새우 껍질과 사투를 벌이다 결국 날연어를 썰어 김에 싸 먹으며 허한 맘 달래는 꼴이라니.


날로 먹고 싶다는 내 간절한 염원은 고작 이런 식으로, 아주 엉뚱한 곳에서나 실현될 모양이다.

완벽하진 않아도 기어코 다시 출발선에 서는 내가 대견한 건지, 아니면 미련한 건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정직하게 달릴 것이고, 아마 오늘보다 조금 더 처절하게 인생을 '날로 먹을' 궁리를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뭐, 인생 별거 있나. 오늘 못 먹은 건 내일 다시 차리면 그만인걸.




끝내 날로 못 먹은 하루...

2026년 3월 15일, From Zürich ~




오늘의 선곡: Paolo Conte - Via Con Me

인생을 날로 먹고 싶은 욕망이 타버린 병아리콩과 질긴 새우 껍질 앞에서 처참히 무너질 때, 나는 이 노래를 튼다.

꽤 자주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일 것이다.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보컬과 경쾌한 피아노 선율은 마치 "인생 원래 그런 거야,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라고 옆에서 깐족거리는 친구 같다.


어차피 요행은 없었고, 인생은 오늘 밤에도 내게 정직한 땀방울과 씁쓸한 실패를 요구한다.

하지만 뭐 어떤가. "It's wonderful"이라고 뻔뻔하게 읊조리는 가사처럼, 우리에겐 망친 요리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날연어'가 있고, 덮어버린 철학 책 대신 새로 펼칠 '소설'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날로 먹기엔 너무나 눅눅하고 질긴 현실이지만, 이 리듬에 맞춰 한 번 더 가볍게 스텝을 밟아본다.

어차피 내일은 또 내일의 정직한 삽질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https://youtu.be/lUP_fex2RaA?si=cgSgwaKkmxHHr3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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