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설득, 경멸당한 희생 - 비계덩어리

한 사람의 윤리, 아홉 사람의 평온

by 온 세상이 내 편


'온 세상이 읽으면' 연재의 첫 작품으로 무엇을 고를지 오래 고민했다.

처음인 만큼,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첫 번째로 꺼내 들게 된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의 단편소설 『비계덩어리 Boule de Suif』(1880)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모파상은짧은 이야기 안에 인간의 민낯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다.

그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는 『여자의 일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언제나 『비계덩어리 Boule de Suif』를 더 먼저 떠올린다.


이야기의 시작은 간단하다.

전쟁 중, 열 명의 사람들이 함께 마차를 타고 피난을 떠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인간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빨리 본색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얼마나 능숙하게 정당화하는지에 대한 서늘한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마차에 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누군가의 희생으로 무사히 지나간다.

그 뒤에 남는 건 감사도, 연대도 아닌 조용한 외면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일상일 때가 많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열 명의 사람이, 한 대의 마차에 오른다.



『비계덩어리 Boule de Suif』줄거리 – 한 사람의 몸값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적군에게 점령당한 루앙(Rouen)에서, 열 명의 프랑스인들이 함께 마차를 타고 탈출한다.

귀족 부부, 상인 부부, 수녀, 교사 부부, 자유주의자, 그리고 창녀 엘리자베트 루세.

사람들은 그녀를 ‘비계덩어리(Boule de Suif)’라고 부른다. 이름보다 욕설에 가까운 별명(우리나라의 ‘걸레’ 정도에 해당하는 어감이랄까)이다.


마차가 중간 검문소에 멈춰 서고, 프로이센 장교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녀가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 너희는 떠날 수 없다.”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씩 변해간다.


• 상인 부부는 “우리가 모두 위험한 상황인데, 당신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아니냐”고 설득한다.

“당신의 희생은 모두를 위한 거예요. 그건 숭고한 일입니다.”


• 수녀들은 말없이 눈을 감고, 마치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기도를 한다.


• 교사 부부는 자유와 애국을 운운하며 그녀를 압박한다.

“프랑스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한 사람의 선택입니다.”


• 자유주의자는 처음엔 군인에게 강하게 저항하더니, 나중에는 가장 논리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는 인물이 된다.

“당신 하나가 거절해서, 이 모든 이들의 고귀한 뜻이 가로막혀도 되겠습니까?”


처음엔 모두가 그녀를 벌레 피하듯 멀리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처럼 말한다.


결국 그녀는 무너진다.

말없이, 울면서, 그 방으로 향한다.

모파상은 그녀의 선택에 아무런 수식도 붙이지 않는다.

그저 ‘그녀는 갔다’고만 쓴다.


희생 이후의 얼굴들

다음 날 아침.

마차는 출발한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가는 길.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말조차 걸지않는다.

감사 인사도, 미안함도, 따뜻한 시선도 없다.


“비계덩어리는 식욕을 잃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그들끼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거룩한 논리였던 '숭고한 희생'의 주인공에겐 물 한 모금도 권하지 않은 채.


그녀는 창가에 앉아, 혼자 눈물을 닦는다.


고상한 가담

모파상은 이 짧은 이야기 안에, 인간의 가장 복잡하고도 추한 심리를 조용히 눌러 담았다.

‘비계덩어리’는 외적으로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지만, 끝까지 신념과 윤리를 붙들고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반면 마차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상하다고 믿으며, 조용히 타인의 희생을 정당화한다.

그 어떤 폭력보다 더 잔혹한, ‘침묵이라는 가담’.


이 이야기의 진짜 공포는 누군가를 죽이는 칼이 아니라, 누군가를 밀어 넣고도 자신은 깨끗하다고 믿는 태도에 있다.

모파상이 보여주는 건 잔혹함이 아니라, 너무 빨리 스스로를 정리해버리는 인간의 얼굴이다.


책 속의 냉정한 구절들

1. 희생 직전의 냉정함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고, 누구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 방으로 가는 길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설득당한 것도,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뿐이다.”


2. 침묵의 압력과 감정의 단절

“수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기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설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였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3. 경멸로의 복귀 – 마차 출발 이후

“아침, 마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았고, 아무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녀가 희생한 사실은 아무 말 없이 과거가 되었다.

지금은, 다시 그녀가 창녀라는 사실만 남았다.”


“감사도, 위로도 없었다.

그들은 전날 밤을 지운 듯,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식사했다.”


모파상은 이 장면들을 통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고귀함을 말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얼마나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는지를.

한 사람의 침묵이 그들 모두의 양심보다 무거웠다는 사실을.


모파상의 메시지

“사람들은 고귀함을 말하며 타인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자신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는다.”


“한 여자의 침묵이, 그들 모두의 양심보다 무거웠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있었던 자격조차, 그녀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나쁘지 않았다.

단지, 그들 중 누구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 뿐이다.”


“마차는 달렸다.

한 사람의 윤리는 버려졌고, 아홉 사람의 평온은 회복되었다.”



【오늘의 단상】

나는 그 마차에서 어떤 얼굴이었을까


누군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희생이 끝난 순간,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었고

다시 처음부터 그녀를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희생을 감당한 사람은

가장 빠르게 고립되었다.

도덕은 그녀를 설득할 땐 힘을 발휘했지만,

감사를 말해야 할 때는 이상할 만큼 침묵했다.

그 침묵은 이해가 아니라 회피였고,

그 조용한 시선들은 위로가 아니라 회복된 질서였다.


나는 그 마차 안의 누군가와 너무 많이 닮았다.

말없이 동조했고, 눈을 피했고,

정당한 척하면서 조용히 누군가를 떠밀었던 날들이

이야기 속이 아니라, 내 삶의 한 구석에는 없었던가?


이 글을 쓰며 문득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늘 '비계덩어리'를 원한다.

우리 대신 누가 좀 감당해주기를,

나만은 안전하길 바라며,

그 사람 하나쯤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그 침묵이 가장 비겁한 선택이었다는 걸,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는 사람 하나를 떠올리며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맺으며

이 작품을 처음 읽고 한동안 책장을 덮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 마차에 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침묵했을까. 고개를 돌렸을까.

아니면 그녀 옆에 앉아, 말없이 손을 잡아줬을까.


생각보다 답은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조용한 가해자’가 되곤 하니까.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침묵이 가장 큰 선택이었던 순간이 많다.


마차는 계속 달린다. 오늘도.

그리고 그 안에는, 늘 누군가가 혼자 앉아 있다...



희생을 권한 자는 늘 자신을 도덕 위에 둔다.
침묵은 무죄가 아니라, 연루다







‘잔인했던 건 침묵이 아닌지'를 물으며,

'온 세상'이 Paris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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