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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필름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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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윤 Aug 25. 2016

#필름남미

중고 필름카메라 하나 들고 남미로 떠난 이야기


  내가 구태여 남미에 촬영도 어렵고 무거운 필름카메라를 들고 간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더 좋고, 편한 디지털카메라를 살 돈이 없어서. 그래서 더 소중히도 아꼈다. 큰 배낭이 아니었다면 패딩을 포기하더라도 필름 40통을 내 목숨같이 챙겨갔을 것이다. 그렇게 필름들은 여행 마지막까지 처음 그 부피 그대로 내 가방 한 곳에 크게 자리하고 나와 함께 남미의 추위를 견뎌냈다.

이거 필름카메라에요?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내게 가끔 물었다. 그리곤 내게 낭만적이라고 했다.


the green house @El Calafate, Argentina


  남미여행 중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한 투어는 빙하 위를 두어 시간 가량 걷고 빙하를 깨어 담은 위스키로 마무리하는 모레노 빙하 미니트래킹이었는데, 이를 위해 나는 첫 나라였던 브라질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해야 했다. 5월 말에 시작된 나의 남미는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고, 6월이 넘어가면 추위가 상당해 빙하트래킹, 파타고니아의 초절정인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래킹, 심지어는 항공이나 버스 이동 또한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상파울루에 도착하여, 바로 다음 날 리우데자네이루로 가 연신 내리는 비로 인해 안갯속의 예수상과 빵산을 상상만 하고 또다시 그다음 날 이과수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3일 밤도깨비 투어 같은 브라질을 뒤로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우수아이아를 거쳐 어렵사리 6월이 오기 전 모레노 빙하가 기다리는 엘 칼라파테에 도착할 수 있었다.


Perito Moreno Glaciar Hostel @El Calafate, Argentinaa cat on the way home @El Calafate, Argentina


  부푼 맘을 안고 "필름 낭비하지 마. 그건 디카가 아냐." 잔소리에도 필름 네 통을 챙기던 투어 전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약 90일 일정에 필름은 고작 40통이었기에 계획 상 이틀에 한 롤을 찍어야 하는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그런 필름을 네 통이나 챙겼으니 그 추위에 마음과 함께 몸까지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 빙하를 눈으로만 보기 아까워 시린 손을 장갑 밖으로 내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파랗고 노란 트래킹 코스를 따라 한 롤을 마무리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위해 버스를 타고 십여 분, 배를 타고 또다시 십여 분을 달려 크램폰에 얹은 발을 빙하 위에 디뎠다. 찰칵, 찰칵, 찰칵... . 카메라를 들여다보니 물린 필름이 벌써 4컷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친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가방에 필름이 두 롤 남았지, 가방이.. 하, 투어버스에 있구나. 

  나는 거의 울다시피했다. 나는 빙하 위에 서있고, 빙하는 심하게 푸르렀다.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빙하를 배경에 두고 손바닥 위에 얹은 영롱한 위스키 사이로 담기는 빛을 촬영하고 싶어 트래킹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추위에 방치해야 했다. 나에겐 그것이 낭만이었다. 그저 내가 필름카메라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연신 디지털카메라와 휴대폰의 셔터를 눌러대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추위에 방전이라도 될까 장갑 낀 손으로 필름카메라를 꼭 쥐어가며 내 눈을 뷰파인더 삼아 깜빡이던 그 순간들이 낭만인 것이다.



  빙하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다가 그 귀한 필름이 아직 감기지도 않은 채로 카메라가 떨어져 버렸다. 일전에 처음 카메라를 선물 받았을 때도 다이빙 후 언니들이 샤워하던 가건물의 문이 덜컥 떨어져 누가 볼세라 문을 잡아주다가 세탁기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놓은 내 가방 속의 카메라가 '툭' 하고 떨어진 일이 있었다. 하여 이미 꽤나 큰 크랙이 있는 카메라라 혹시 틈새가 벌어진 건 아닐까 재빨리 고개를 떨구니 아예 필름뚜껑이 열려있었다. 네 컷의 빙하가 그렇게 방 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울었다, 정말 엉엉. "그럴 것 같더라니, 인생 최대의 걸작을 남겼을 수도 있는데 어쩔 수 없지 뭐."라고 말하는 눈치 없는 남자친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고, 물건을 올릴 곳이 그 작은 콘솔 하나뿐인 작디작은 호스텔 방 때문도, 무책임하게 열려버린 필름뚜껑 때문도 아니었으리라. 그저 나에게 너무 화가 난 밤이었다.


the warmest @Glaciar Perito Moreno, Argentina


  이번 여행에는 내가 가져간 필름카메라에 엮인 사건사고가 담아온 사진만큼이나 많았다. 카메라에게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제일 고생한 건 역시나 여행 내내 내 곁을 지켜준 남자친구다. 빙하 필름을 날렸을 때는 나를 위해 모기퇴치제를 뿌렸다가 날카로워져 있는 나에게 왜 그딴 걸 뿌리냐며 속수무책으로 욕을 먹고, 칠로에Chiloé 섬의 목재 성당들이 가득 담긴 필름을 끊어먹었을 때는 더 많은 성당을 찾아가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운전을 해야 했다. 카메라를 떨어트린 것도, 필름을 잘못 감은 것도 그가 아닌데 나는 여행 내내 쌓이는 감정을 묵은지 마냥 묵혀뒀다가 카메라에 문제가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 쉰내를 풀풀 풍겨댔고, 다행히도 그는 좋은 식성만큼이나 넓은 아량으로 늘 그런 나를 삼켜냈다.



   여행을 마무리할 때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디지털카메라를 사겠노라 다짐했지만, 남자친구는 필름카메라 고가 브랜드를 언급하며 하나 구입하라 권했다. 관광지에만 가면 늘 당신의 디카를 내밀며 본인 사진을 찍어달라 하기에 내 사진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여행 전에도 늘 필름이 현상될 때마다 빠짐없이 메신저로 보내라 명령 아닌 명령을 해왔고, 아직 서툰 내 사진을 가장 응원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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