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개편을 개편하라

부실한 환경분석은 부실한 교육과정을 낳는다

by 온시

연례행사가 된 교육과정 개편


매년 2학기 중간고사 무렵이면 어김없이 교육과정 개편 지침이 교무부에서 내려온다. 빠듯하면서도 여유로운 일정, 부족한 듯하면서도 넉넉한 예산, 그리고 무언가 바뀐 것 같지만 여전한 오류를 품고 있다. 대학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 역시 매년 학과 교육과정을 개편하였다.


달보다 손가락에 더 관심이 많다


교육과정 개편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개편을 주도하는 교수는 교육 내용의 혁신보다 행정 절차를 완수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개발계획서 제출, 위원들의 일정 조율, 법인카드 수령, 1인당 3만 원을 넘지 않는 회의비 결제, 참석자 서명과 증빙 사진 촬영, 영수증 보관, 그리고 기억과 기록에 의존한 회의록 작성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교무부에서는 이런 절차를 교육과정의 내실을 다지는 일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분위기다.

참석자 서명과 꼼꼼한 회의록만 있다면 굳이 필요 없을 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보고서에 빠지면 큰일 나는 것 같은 현실은, 대학 행정의 최우선 가치가 '본질'이 아닌 '비용 집행의 투명성'과 '절차적 무결점'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첫 단추부터 다시 꿰어야 할 교육과정 개편


현재의 교육과정 개편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통상적인 개발 절차는 '산업환경 및 수요자 요구 분석'에서 시작해 '교육목표 점검', '차년도 교육과정 도출', '자체평가 및 컨설팅'으로 이어진다. 첫 단계인 요구 분석은 기업의 '시장조사'와 같다. 시장과 소비자를 알아야 팔릴 제품을 만들 수 있듯, 대학도 교육 수요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 분석이 부실하면, 그 위에 세워진 교육과정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기존 개편 보고서의 환경 분석은 대부분 구색 맞추기 수준에 그쳐, 교육과정의 방향을 설정하고 교과목을 개편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


전문가 요구분석의 문제

매년 산업체에 재직중이면서 교육경험이 있는 겸임교수 및 외래강사 2~3명에게 의견을 물어 산업환경을 분석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먼저 2~3명의 의견으로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데이터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소수의 편견을 넘어서려면 최소 5명, 적정 수준으로는 10명 이상의 의견이 필요하다. 이들이 소속 대학에서 교육 경험이 있다는 점은 장점이면서도 기업의 절실한 요구가 대학의 재정 및 제도적 여건상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타협 가능한 수준의 요구만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단점이라고 하겠다.


재학생 요구분석의 문제

재학생의 의견을 교육과정 개편에 반영하라는 요구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해당 분야의 실무를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에게 어떤 과목이 필요한지 판단하라는 것은 너무 빠르다. 2~3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과정의 만족도나 개선해야 할 점을 묻는 것 또한 의미가 없다.

아이들은 콩, 당근, 시금치, 토마토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부모는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먹이려 한다. 아이들이 싫어한다고 그래 알았어 하고 밥상에서 빼는 부모는 없다. 학생들이 교과목을 판단하는 기준도 이와 유사할 수가 있다. 단순히 어렵거나 흥미 없다는 이유로 과목의 필요성을 판단할 수 있다. 재학생의 의견은 피교육자로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졸업하고 전공 분야에서 1~2년의 실무 경험을 쌓은 졸업생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헌조사의 문제

문헌조사한 내용을 보면 뜬구름 잡기다. 보고서의 목차를 그럴듯 하게 만들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학과 신설이나 정원 조정에도 쓰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한 데이터를 교과목 하나를 도출하는 데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구체적 예시를 살펴보자.

아래 예시는 유아교육 관련분야의 고용동향 분석이다. 총 취업자 수가 약간의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향을 보고 유아교육이나 사회복지 관련 학과의 교육과정을 어떻게 개편하고 어떤 교과목을 새로 개설해야 하는지는 알기 힘들다.

@교육과정환경분석-고용동향.png

아래 예시는 경남 지역은 기계 관련 분야의 인력 현황이다. 중소기업에 재학생의 취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 운영 및 취업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중소기업 취업 대비 교육과정과 대기업 취업 대비 교육과정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교육과정환경분석-지역동향.png

위의 예시는 특정 학과의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보다 대학 본부차원에서 어떤 학과를 신설하고 폐지하고 개편할 것인가 등을 논의하는 상황에 적합하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예시가 특정 대학의 사례가 아니라 전국의 모든 전문대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협의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산업체 요구는 이미 취업센터가 알고 있다


이처럼 전문대학 교육과정은 허술한 분석 위에 세워져왔고, 매년 의미 없는 전문가 인터뷰와 설문조사로 예산만 낭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공신력 있는 외부기관의 평가에서도 절차와 예산 집행에만 문제가 없으면 대학의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고 있다. 교내에 문제를 제기해도 의지를 가진 보직교원이 없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기업에서는 영업부서가 고객의 반응과 요구를 수집하고, 생산부서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만드는 것 처럼 대학에서도 부서 간 연계가 필요하다. 대학의 영업부서는 취업지원센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업들이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구인 조건, 즉 진짜 산업체 요구 데이터가 이미 축적되어 있다.

대학교취업센터채용공고리스트.png

그런데도 대학은 이 귀중한 내부 데이터베이스를 외면하고 있다. 학과에서는 여전히 별도의 자문비와 회의비를 지출하며 외부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실시합니다. 이는 교육과정 개편을 교무처나 교학처만의 행정 업무, 혹은 학과 내 문서 잘 다루는 교수의 개인 업무로 치부하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대학 측에 건의도 하였지만, 불필요한 일이라는 응답만 돌아왔다.


NCS를 활용한 체계적인 요구사항 파악


물론, 취업지원센터의 구인정보를 그대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정부 시절 이벤트처럼 지나갔지만 분명한 장점을 지닌 제도,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NCS는 산업 현장의 직무 요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표준화한 것으로, 막연히 '캐드/3D/포토샵 가능'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이미 NCS를 이용해서 채용조건을 제시하는 민간 기업이 있다.

@NCS활용구인공고.png

위 그림을 보면 '프로젝트관리' 역량은 두 회사 공통 요구사항이다. 만약 취업센터에 구인 요청한 모든 회사가 이 역량을 요구한다면 관련학과에서는 이 역량을 내용을 교육과정에 우선 반영하면 된다.

NCS의 핵심은 '구체화'와 '표준화'다. 스테이크를 주문할 때 '레어, 미디엄, 웰던'같은 표준화된 용어로 소통하듯, 직업 교육에서도 교수자와 학습자, 구인 기업과 구직자 사이에 역량에 대한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다. '캐드를 좀 할 줄 안다'는 모호한 표현 대신, 역량의 범위와 수준을 명확히 약속해두는 것이다.


구인 신청서 양식에 NCS를 활용하자


NCS를 이용해서 채용조건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복잡하지 않다. 먼저, 취업지원센터가 기업으로부터 구인 신청을 받을 때, NCS 기반의 '역량 체크리스트' 양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잘 활용할 것', '성실할 것' 같은 모호한 표현 대신, 채용을 원하는 기업이 전체 NCS 능력단위와 능력단위요소 중에서 채용이 필요한 역량 항목과 요구 수준을 직접 체크하게 하는 방식이다.

NCS활용구인요청서사례-1.PNG

이렇게 취합된 데이터는 엑셀시트 형태로 각 학과에 전달되어 교육과정 개편의 핵심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기존의 형식적인 설문이나 FGI 보다 훨씬 구체적이어서, 교육과정이 산업 현장의 요구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 것이다.

더 이상 탁상공론에 머무는 교육과정 개편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한 실질적인 개편, 즉 '교육과정 개편의 개편'이 시급하다. 더불어 대학의 각 부서가 협업하는 모델이 만들어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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