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 간의 이해관계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2월 말에는 꼭 관두고 나와야지 했으면서.
막상 그 끝자락에 2개월 더 연장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 좀 망설였다.
엄마가 알바 관두는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딸아이의 얼굴이 스치기는 했지만.(2개월-3개월-3개월 반-4개월 반으로 연장되어온 시간들을 딸은 '참아내며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이제 익숙해진 상황과 일, 급여 등의 조건을 생각했을 때 2개월만 더. 의 조건은 취미 삼아 다닌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아무 스트레스도 없는. 이제 막 재밌어지기도 한 찰나의 달콤한 제안이었다.
다만. '이해관계'가 생긴 거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같이 일하시던 3명의 언니들의 입장이 다 달랐고. 그 입장 차이가 서로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첫 번째 언니는 3월 중순부터 7개월짜리 일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었고. 중간에 여행도 계획되어 있어 연장이 불가능했다.
급여조건은 이곳이 더 좋지만 당장 2개월보다 더 길게 장기적으로 할 수 있을 일이 더 절실했다.
스스로 생계형이라 말하며 부지런히 이런저런 일을 해왔기도 했고.
어찌 됐든 연장은 불가.
한 보름 정도는 더 할 수도 있다고 얘기를 했다.
두 번째 언니도 일을 원했고 다른 곳에 당장 2개월 반의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기간은 비슷한데 지금 일하는 곳이 급여조건이 더 좋고, 하던 일이라 익숙하니 옮겨갈 이유가 애매했다.
단지 저 쪽에다 일을 하겠다고 말을 해두었던 게 좀 걸리기는 하나 사정을 얘기하면 이해를 구할 수는 있다.
세 번째 언니는 여기서 더 일을 하고 싶다.
다른 곳에 제안을 받지 못했고. 여행 계획도 있으나 그 기간만 제하고 연장을 하고 싶고. 단, 모두 떠나고 혼자 남는 경우라면 관두겠다고 하며 매우 섭섭해하셨다.
나는 별 스케줄은 없었다.
다른 곳에서 2개월 반 정도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아이를 생각해 조심스럽게 거절한 터였고.
아이와 당분간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도 했고 이른 아침 출근이 슬슬 지겹기도 했었다.
문제는 이거였다.
사이좋게 깔깔거리며 잘 지내던 우리 4명의 사이에 조금의 불편함이 생긴 이유는.
각자 해본 적 있었던 일(예전 직장에서)의 경험치로 일이 할당되었었고.
첫 번째 언니와 내가 하던 일은 아직 마무리가 되려면 멀었다.(두명식 한 팀)
두 번째 세 번째 언니가 하던 일은 거진 일이 마무리 단계라 특별히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4명이 세트로 왔으니 이왕 연장하는 거 4명 모두 같이 연장하자는 말이었고.
잉여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두 번째 세 번째 언니는 살아온 내공으로 잽싸게 캐치를 하신 상태.
첫 번째 언니는 더 좋은 조건의 일이 생겼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건 모두 인정.
하지만 나는 단순히(?) 애 때문이니 남아서 일을 더 같이 하자는 요구를 해왔다. 이쪽 일에 사람이 필요하고 저쪽 일은 마무리 단계이니 저쪽에서 두 명이 남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거나 연장 자체가 불가능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언니의 농담반 협박반의 설득이 나는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두 분이 남는다면 둘 중에 한 분은 나와 첫 번째 언니가 하던 이 쪽 일로 자리를 옮겨오게 된다는 말이 있었고.
언니들의 설득은 협박반 진심반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일을 하기도 어려운데 너 나가는 바람에 나까지 일 못하면 두 달 찌 월급 못 받게 되는 거 너 어쩔 거야.. 응..?"
"너 가면 나도 2개월 반짜리 일하러 갈란다. 그럼 나머지 언니도 혼자서는 싫다니 둘 다 나가게 될 터이고.
나 잉여로 남는 거 싫다.."
이쯤 되니 나도 슬슬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딸 때문에 그만둔다는 이유는 그녀들에겐 단순하고 가벼운 핑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들의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시간이 많았고, 초등생 사춘기 딸을 키우는 예민했던 시간들은 이미 다 지나가 잊힌 듯했다.
나는 제안을 했다.
어차피 나와 첫 번째 언니가 나가고 나서 우리가 했던 일을 두 분이 마무리하게 될 것 같은데.
내가 나가기 전에 시간을 길게 들여 일을 확실히 알려주고 나가겠다.
실제로 내가 맡고 있는 부분의 담당 부장님께 사정을 얘기해서 내 대신 일하게 될 언니께 일을 배울 시간을 길게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분도 알겠다며 인수인계 시간을 보름 정도로 길게 잡아주셨다.
내가 나가기 보름 전까지 저쪽 일을 마무리하고 이쪽 일 인수인계를 받게 해주시겠다고 이쪽저쪽 담당 부장님들끼리 얘기가 오갔으나.
언제나 어느 조직에서나 그렇듯이.
저쪽(두 번째 세 번째 언니들이 하던 쪽)분들이 언니를 놔주지 않았고 자꾸 새로운 일까지 얹어주어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쪽으로 확실히 넘어오기로 되어 있는 세 번째 언니는 맘이 약해 그 일을 받아 자꾸 하고 있었고.(두 번째 언니는 원래 하시던 일을 하시기로 확정)
인수인계를 받기는커녕 새로 주어진 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우는 소리를 하셨다.
아침 커피타임에도. 점심시간에도.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계속.. 나에게 은근한 설득은 계속되고 있었다.
"너라도 남아라.. 너라도 남아있으면 내가 일 배우면서 같이 할 수도 있고.. 응? 애는 다시 설득을 해봐.. 겨울방학이랑 봄방학도 잘 버티고 지나왔잖아.. 애는 강하게 키워야지. 안 그렇니?"
이쯤 되니 나는 솔직히 살짝 짜증이 났다.
아. 도대체 내가 왜 이 순간에 죄인 같은 취급을 받는 건가.
둘째 셋째 언니의 연장이 확정되고. 심지어 셋째 언니의 여행기간마저 빼주겠다고 사정을 봐주셨는데.
그 일주일의 여행기간 동안 둘째 언니는 혼자 밥을 어떻게 먹냐며 셋째 언니의 여행을 취소하란 말까지 나왔다.
물론. 일이 익숙하지도 않고. 잉여의 입장에 연장까지 해주었으니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지 여행까지 다녀와서 일을 하려면 그 공백이 더 커질 텐데 말이 되는 상황이냐...라는 것도 설득은 있었으나.
내가 보기에 그보다는 '밥 혼자 먹기가 너무 곤란하다'라는 부분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살짝 경악.
"아니 왜 혼자 밥을 못 먹어요.. 나는 혼자 먹는 게 더 좋던데.."
했더니.
"아. 그럼 온수야. 너 점심시간에 나랑 밥 먹으러 나와라." 하는 바람에
"저 관두면 여기 안 와요. 왕복 두 시간 거리를 밥 먹으러 나오라는 말씀? 진심.. 정말 진심?" 하는 바람에 분위기 한번 제대로 싸해졌다.
아니 아니. 이 언니들이 팥쥐 같은 언니들이거나 신데렐라 구박하는 계모 딸들 같은 버전은 아니다. 그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두 착하시고. 잘 지내왔었고. 마지막 며칠 살짝 서로 서운하거나 맘쓰이는 순간들은 있었지만.
그거야 뭐 생각하기 따라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밥이야 얼마든지 다시 만나 먹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러나 그 밥은 다 같이 일이 끝나고.
어느 한가한 점심에 다 같이 모여 오랜만에 반갑게 수다 떨며 안부를 묻는 자리여야지 누군가의 혼밥을 안쓰러이 여겨 억지로 날 챙겨 나가지는 만남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담당 부장님과 저쪽 부장님까지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인수인계 날짜를 보름이나 길게 잡아놓았다면.(나라고 이런 부탁하는 게 쉬웠겠나. 갑을병정의 정 주제에.. 주제넘게 부탁드린 거였는데)
응당 저쪽의 일을 시간 내에 마무리하고 그 이후의 시간에 일이 넘어왔을 때. 스스로 냉정하게 끊고 이쪽으로 넘어왔어야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다시 나서서 그 언니가 붙잡고 고민하던 일을 이렇게 저렇게 하고 문서로 남겨 넘긴 뒤 끝내버리시라.. 제안했고.
그렇게 문서까지 만들어 넘긴 언니를 붙잡고 끌고 와 내 자리에 앉혔다.
어차피 내 일이야 어느 자리에서 하던 상관이 없으니 내가 셋째 언니 자리에 가서 내 일을 하고. 셋째 언니는 내 자리에서 첫째 언니에게 일을 배우게 할 요량이었다.
그제야 저쪽 분들은 셋째 언니 어디 갔냐며 어리둥절한 척을 했고.
"아. 셋째 언니. 제가 하던 일 하게 되신 거 아시죠. 인수인계받으면서 이 쪽일 같이 하고 계십니다!" 하고 선을 탁 그어버렸다.
일 시키려던 그쪽 이사님은 그제야 허둥지둥 혼자서 해야 되겠네.. 하면서 주절주절..
원래 그 일은 그 이사님 혼자 하시기로 되어 있는 일인데 '잉여'라는 이유로 잠시 도왔던 거였지. 셋째 언니의 몫도 아니었다.
대충 상황 정리를 해놓고.
첫째 언니가 셋째 언니에게 일을 가르쳐주셨는데.
셋째 언니가 원래 이쪽 일에 전혀 경험이 없으셔서 적응이 뎌뎠고. 그 바람에 첫째 언니도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처음부터 각자 경험이 있는 쪽으로 일이 할당됐었다)
실은 중간에 내가 셋째 언니한테 그랬었다.
"언니. 솔직히 이 쪽 일 경험 없으시면 지금 4개월 반이나 지난 시점에 일 처음부터 배워서, 그것도 두 사람이 하던 거 혼자 이어받아서 하시기에 벅차실 거예요. 언니를 무시하거나 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이 시점에 인수인계를 하는 입장에서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데요.. 차라리 저랑 같이 그냥 나가세요.."(나는 진심이었다. 걱정돼서 했던 얘기였다만)
이 말했다가 나머지 두 언니께 질질 끌려가 혼줄도 났었다.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파이팅은 못할 망정. 왜 그런 얘기를 하냐고. 그리고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못하겠냐고. 배워서 하면 되는 거고 시간도 보름이나 있지 않냐고.
하지만. 인수인계 이틀째에 첫째 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와 소곤거리길.
"온수야.. 어떡하니.. 셋째 언니가 이쪽 일은 진짜 개념이 아예 없으셔서.. 이걸 혼자 해나가실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
-..-...
"그러니까 제가 그랬잖아요.. 괜히 이제 와서 맘고생하고 바보 소리 듣느니 같이 나가시자고....
몰러요... 언니들이 붙잡았으니 책임지시고 완벽한 인수인계를 부탁.. "
아. 머리가 복잡스러웠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4개월 반 동안 엎치락뒤치락 바뀌던 상황과 에러와 개념들을 어찌 다 설명할 것이며.
보름은커녕 일주일밖에 안 남은 상황에. 게다가 우리가 나가자마자 이 언니는 일주일 여행까지 다녀온 뒤 일을 하게 되실 테니 미운털이 좀 박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나오는 그 날까지 맘속으로는 좀 고민이 됐었다.
차라리 내가 애를 설득하고 연장을 해서 하던 일 하며 남아있다면 이 언니들도 맘 편하게 일을 할 텐데.. 하는.
하지만 맘이 불편한 채로 억지 연장을 했다가 나중에 이 언니들을 원망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 싶어 맘을 접었다.
시간은 흘러 마지막 날이 됐고.
아쉬워하는 언니들을 두고 마무리를 짓고 회사를 나왔다.
마지막 날엔 컴퓨터를 반납하고 신세 졌던 직원들께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 시원하다!
길고 긴 4개월 반의 일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과 이래저래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탈출했다는 해방감에 상쾌했다.
직장생활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가 사람 간의 '이해관계'였음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떠올리며 쓴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