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평화로운 중.
일은 끝났고 이사도 마쳤다.
이사를 하는 날 직전까지 일을 하겠다고 연장을 해놓고 이래저래 맘이 심란한 상태로 집을 알아보고, 이삿짐센터를 예약하며 맘이 분주했다.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역시 맘이 심란해서 뭐 빠뜨린 거 없나 자꾸 되새김질하느라 일하는 중간중간 나와 전화로 예약을 하곤 했다.
주말에 둘러볼 수 있는 집을 3군데 돌았고.
돌아본 집 중에 세 번째 집을 계약했다.
게으름 피며 안 따라 나온 신랑은 뭐 별로 상관이 없었다.
이사 8번 정도 하다 보면 도가 튼다.
이삿짐센터 예약, 도시가스 당일 예약, 정수기 설치, 인터넷 연결, 관리비 정산, 당일 부동산 복비까지 드리고 전입신고, 확정일자 받으면 끝이다.
이사 횟수를 얘기하면 다들 놀라기도 하고 대단하다고도 하지만.
집이 없어 전세 만기에 쫓겨 다니는 거니 대단할 건 전혀 없고.
그저 좀 도가 튼다는 건 맞는 것 같다.
집을 정하고 이사날짜가 정해지면.
바로 이삿짐센터 몇 군데를 비교해서 예약을 해둔다.
이삿짐센터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비싼 곳에서도 해봤고 싼 곳에서도 해봤는데 큰 차이점을 느끼진 못했었다.
다만 좀 싸더라도.(싸서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 역시 사람 간의 일이라.
부지런히 일을 돕고 간식을 나르고 커피를 타 드리며 고생하시는 부분에 감사히 인사를 하면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더 세심히 짐을 옮겨주시고, 더 열심히 정리해주시고 청소해주신다.
이사 중간중간 옆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춥고 배고파지는 이 힘든 이사를.
등으로 손으로 짐을 싸고 옮기는 이들이야 얼마나 힘들것인가 생각하면 '물만 준비해두시면 돼요. 점심도 알아서 먹고 옵니다.' 할지언정 저절로 간식이라도 부지런히 사나르게 된다.
이 험한 노동을 매일같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내가 이번에 일을 하며 갑. 을. 병. 정.. 중에서도 정의 입장으로 일을 해보다 보니.
'수고하신다'는 말 한마디, 같이 먹는 커피 한잔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인정인지 몸소 느낀 바가 있어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어차피 다 사람의 일인데.
누군가 누구에게 수고로움을 인정하고. 고마워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해주고 표현해주며 서로를 '인정'해주는 기분 좋은 소통의 에너지라는.
짐이 빠지기 시작하는 8시 반에서 9시 반까지는 신랑과 같이 짐이 나가는 걸 지켜보다.
중요서류나 소중한 물건은 미리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중요한 물건이 뭐 없다. 그나마 결혼반지와 약간의 액세서리, 보험증서 정도랄까. 그나마 요번에 결혼반지 정리해서 팔아버릴까 했다가.. 신랑이 서운해하는 것 같아 멈춘 상태)
온갖 서류와 통장을 정리해둔 배낭을 짊어맨 나는 관리사무소와 은행을 차례로 들러 정산을 하고 차액 자금을 정리해둔다.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간식과 음료를 들고 11시쯤 돌아와 일하시는 분들께 쉬었다 하시라 말씀을 드린다.
신랑과 애도 아침을 제대로 못 먹어 눈이 쾡하고 일하시는 분들도 한껏 지친 얼굴이라. 다 같이 둘러앉아 허겁지겁 빵을 먹어 치웠다.
12시 근처에 짐이 다 빠지고 나면 점심식사.
실장님과 직원분들은 1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도 점심을 재빨리 든든히 먹고 신랑은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러 간다.
1시가 되기 전에 부동산에 들러 자금을 받고, 다시 그 자금을 새로운 집주인분께 드린 뒤에야 새로운 집에 짐이 올라간다.
계약서를 꼼꼼히 체크하고 자금을 확인하고 복비 계산까지 마치면 새 집으로 돌아와 물건이 들어갈 위치를 정해야 한다.
신랑은 부동산에 잠깐 들렀다 이미 새 집으로 들어와 있다.
대략의 위치를 선정해서 알려드리고는 있으나 정확한 위치와 방향은 내가 다시 잡아 말씀드린다.
그 사이 도시가스를 연결하고.
정수기 연결, 인터넷 연결.
오기 전에도 몇 날 며칠을 물건을 버려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새 집에 짐을 풀다 보면 또 버릴 물건들이 잔뜩이다.
중간중간 돌아다니며 100리터 쓰레기봉투에 버릴 것들을 과감히 집어넣고.
슬슬 가구가 자리를 잡을 때쯤 안에 넣을 짐들이 도착하면 다시 간식을 사러 간다.
내가 출출하고 피곤할 지경이면 이 분들은 오죽 배가 고프실까.
매번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순식간에 짐을 빼고 다시 짐을 올리시며 옮기는 노련한 손놀림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좀 다른 종류의 간식을 사 오고.
이번에는 커피를 내려 한잔씩 종이컵에 담아 쉬다 하시자고 건네면 그제야 숨을 돌리며 다 같이 잠시 휴식.
소소하게 얘기도 오가고. 잔을 들고 담배를 태우러 나가시기도 한다.
좀 늦어진다 싶으면 슬슬 일을 거든다.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모아 봉투에 담고. 자리잡기 쉬운 작은 가구들은 신랑과 옮겨놓기도 하고.
물건이 들어가기 전에 얼른 가구 속과 서랍 속을 닦아 말려두고.
평소에 잘 닦지 못하는 가구 뒷면과 꼭대기 부분도 걸레로 훔쳐둔다.
슬슬. 이제 짐 풀기가 끝나면 청소.
대부분 부엌을 맡으셨던 여자분이 마지막 청소를 하시는데 이사 후 먼지 때문에 두어 번 걸레질을 해도 시커먼 먼지가 묻어난다.
그나마 이번 이사 때는 이사 들어오기 전에 며칠 빈집으로 있는 시간이 있어 입주 전 청소를 처음으로 예약해서 했었다.
이사할 때 어차피 신발 신고 왔다 갔다 할 텐데 효과가 있을까 고민도 했었지만. 결과는 아주 만족.
전 가족이 살며 쌓여 있었을 묵은 때를 말끔히 벗긴 뒤 들어갈 수 있어 돈이 아깝지 않았다.
창틀 먼지도 말끔히 없애주시고, 화장실도 반짝반짝. 부엌 그릇 넣는 장도 속까지 다 닦아주시고, 닦을 수 있는 부분은 창문, 벽까지 다 닦아 말끔해졌다.
5시가 넘어 이사가 끝나고. 나머지 비용을 지불했다.
수고하셨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인사를 했다.
헝클어져있던 이불도 말끔히 정리해서 차곡차곡 옷장에 정리해 주셨고, 냉장고 오래된 야채는 알아서 버려주시는 둥 내 살림을 내가 할 때보다 더 말끔하게 정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 뒤로 며칠을 더 쓸고 닦고 버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포기하지 못하고 끌고 다니던 짐들 중에 또 상당 부분을 내버리게 되곤 한다.
아이가 유치원 때 그렸던 그림들을 여러 박스에 담아 이고 지고 다니던 걸 버렸고.
새 가방을 산 뒤 쓰던 가방이 멀쩡해 벽장에 박아두었던 걸 재활용 박스에 가져간다.
책들도 포기한다.
이 책들만큼은 팔 수 없어.. 했던 것들 중에 상당 부분을 다시 팔거나 버린다.
책장을 넘어서서 쌓여 있는 책들은 이제 없다.
아이가 쓰다가 작아진 가방들을 모아 빨아놓고. 작아진 옷들도 정리. 이건 나중에 한꺼번에 들꽃마을에 가져다주면 되고.
벽장 속에 박아두고 다음 이사 때까지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었던 잡다한 짐들도 다 포기한다.
벽장 속엔 오직 비닐 씌운 선풍기 세대와 여행가방 몇 개만 남았다.
버리지 못했던 낡은 프라이팬들도 한꺼번에 다 버렸다. 어차피 다 망가져 쓰지도 못할 것들을 오래도 가지고 다녔다.
직장 생활했을 때 갖고 있었던 명패, 명함, 상장, 상패들도 다 정리하며 버린다. 이 조잡한 것들을 추억이라고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신랑과 나의 중고등학교, 대학 졸업앨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몇 분들의 책들.
계절마다 기분 좋게 손이 가는 옷들과 신발.
쓰진 않지만 결혼할 때 친정엄마가 해주신 그릇세트는 언제 혹시 쓰일지도 몰라 그대로 둔다.
기본적으로 옷장, 침대, 소파, 책상, 책장, 식탁 등은 모두 있다.
하지만 옷장에 넣고, 책상에 넣고 책장에 넣어지고도 더 남는 짐들은 이제 귀챦다.
베란다 벽장에 들어가 먼지 뒤집어쓰고 처박힐 짐들도 이젠 싫다.
되도록 다 버리거나 처분한다.
잦은 이사는 귀찮기도 하고. 때론 좀 서럽기도 하지만.
2년마다 살 터를 바꾸는 일은 그때마다 묵은 먼지와 짐을 덜어내는 일이고.
새로운 곳으로 가 새로운 숙소에 묵어 지내는 여행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며칠은 먼지를 말끔히 닦아내느라 몸이 힘들지만.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니며 버리고 닦는 일은 또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방이 거진 두배로 커진 딸은-큰 평수로 넓혀 온 게 아니라 베란다를 튼 집으로 왔더니만- 자기 방이 제일 좋다며 요즘 한참 기분이 좋다.
엄마가 일하다 관두고 집에 들어와 있어 아침도 제대로 챙겨주고. 간식도 대령하고.
저녁에 학원에서 돌아왔을 때 배곯으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며 기쁨에 충만해 있다.
이래저래 번거로운 이사는 끝났고. 일도 끝냈고.
당분간은 좀 평화로울 예정.
베란다를 터서 넓은 마루에 햇볕이 잘 든다.
좁은 부엌 대신에 햇볕 잘 드는 마루 창가에 식탁을 놓았다.
친정아버지가 세 번째던가 네 번째 이사할 때 다시 사주셨던.
내가 애정하는 6인용 투박한 나무식탁이다.
햇볕 잘 드는 이 곳에서 밥도 먹고, 책도 볼 생각을 하니 맘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