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요. 이 나이에.
딸아이가 학교에서 단체로 스케이트장에 간다고 했었다.
언젠가 배워줘야지 생각만 했다가 끝내 배울 기회를 채 갖기도 전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 소심한 꼬마아가씨가 혹시 겁을 낼까 슬쩍 물어봤더니
"아 엄마. 괜찮아. 못 타는 아이들은 거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대~ 나 말고도 4명 더 있는데 배워서 탈 거야!" 하길래.
휴. 다행이군.
드뎌 그 날이 되어 아이는 들뜬 마음으로 소풍(우리끼리는 학교 밖에서의 모든 활동을 소풍이라고 부른다)을 갔고.
나는 아직 일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출근을 했었다.
돌아오는 시간이 애매해서 3시 반이 넘어 도착하면 학원을 빼먹어도 좋다! 스케이트를 타고나면 무척 힘들 테니.라고 약속도 해뒀다.
한창 일을 하는데 2시 반 넘어 아이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했었어? 엄마가 못 봤네.. 재밌었어?"
아이는 축 처진 목소리로 너무 피곤해서 학원에 안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학원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피곤해 보여 그러라고 하곤 끊었다.
왜 목소리에 힘이 없지.. 너무 신나게 타서 피곤했나.
퇴근까지 찜찜한 맘으로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을 안고 물어봤다.
"재밌었어? 스케이트는 배웠어? 많이 피곤했어?"
아이는 우물쭈물. 으응. 몰라... 그냥... 피곤해...
저녁을 먹이고 다시 조심스레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
"엄마.. 애들이 대부분 스케이트를 어디서 배웠다나 봐. 몇 달씩 배운 애도 있고.
못 타는 애들도 있었는데 금방 배우기도 하고... 나도 배우긴 했는데.. 너무 잠깐 가르쳐주시고 선생님이 사라지셔서..
친구 손잡고 조금 걸어보긴 했는데... 친구도 나 때문에 못 타고.. 혼자 해보려니까 뭐 잡을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의자 가서 앉아있었어..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못타..나 꼴찌야.."
아이는 처음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꼴찌'를 경험하고 오는 길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잘 타고.
잘 못하던 3-4명의 아이들조차 금세 자신보다 씩씩하게 잘 타는 모습에 주눅이 들어 마음이 울적해 돌아온 것이다.
엄마인 내가 단 한 번도 딸에게 1등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
나 스스로가 특별히 욕심이 많거나 하질 않고.
'최고'나 '1등'에 대한 욕구도, 자질도 부족한 인간이라. 내 몸에서 태어난 내 딸아이를 자꾸 내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고.
중간만 해! 뭐 중간에서 조금 잘하는 쪽이면 좋겠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고. 오늘 하루하루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내가 저런 얘기를 해대면. 신랑은 딸아이가 나처럼 물렁하게 살면 되겠느냐고 쓸데없는 얘기 말고 조금은 더 아이를 다그치며 이끌라며 잔소리를 해대곤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 인생관을 아이에게 떠들며 좀 잘난 척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이거 정말 '꼴찌'라는 말에. 꼴찌라니. 꼴찌라고..?
아이고야.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건 나조차 좀 당황스러웠다.
어. 이거 꼴찌는 좀 그렇지 않나. 아주 제일 못한다고? 반에서 제일?
그런 상황에 놓여 한없이 기가 죽어있었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눈물마저 핑. (아이쿠야..)
아이가 1등을 못해 속상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 순간만은 찐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른 애들은 스케이트를 어릴 적에 다 배웠구나.. 그래서 쓸쓸하게 앉아있다 슬펐구나..
진작에 못 가르쳐줘서 미안해..
괜찮아! 이제 엄마 일 관두고 너 개학하면 수요일마다 학원에 안가쟎어? 그때마다 스케이트장에 가자! 엄마가 가르쳐줄게!"
아이는 눈을 크게 뜨며 엄마가 스케이트를 탈 줄 아냐고 물어왔고 나는 자신 있게 그럼~하고 외쳤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스케이트를 탄 건 중2 때 중간고사 끝나고 친구들이랑 우르르 갔던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였다.
물론. 그전에 더 어렸을 땐. 동네 논밭을 대충 얼려서 임시로 비닐하우스 세워 돈 400원(금액까지 기억나네요)을 받고 난로를 쬐게 해주던 그곳이 최초였고. 그곳으로 겨울마다 어지간히 찾아가서 타기도 했었고.
그 이후 아버지께 선물 받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동네를 누비던 그 실력이 어딘가에... (롤러와 스케이트는 좀 상관이 있지 않을까요..)
어찌 됐던 마지막은 중2 아이스링크였다.
선생님께 가서 배우자 했더니 고개를 살레살레 돌려버리니 다른 수가 없었다.
뭐. 몸으로 배운건 어찌 됐든 기억이 나겠지.
시간은 흘러 아이는 봄방학을 끝내고 새 학년이 되었고.
나는 약속대로 일을 그만뒀다.
그 첫 수요일.
우리는 비장한 마음으로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정확히 28년 만에(근 30년이라 쓰려다 세월이 너무 지났음이 끔찍해서 굳이 28년) 딸아이의 손을 잡고. 이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다시 타게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하여봤던 일이었지만.
주눅 들어 상처받았을 딸 앞에서 그 정도 용기쯤이야.
스케이트를 빌려 발을 쑥 집어넣는데. 어. 이거 살짝 긴장이.
아이는 신나서 흥분해있고.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하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다행히 스케이트장 테두리에 잡을 수 있는 봉이 있어 그걸 잡고 살짝 얼음 위에 발을 얹는 순간.
생각보다 미끄러운 낯선 감촉에 흠칫 겁이 났다.
아이도 나를 따라 봉을 잡고 서서히 발을 띄며 걸어 들어왔지만.
우린 둘 다 킬킬거리며 비틀비틀 봉을 잡고 겨우겨우 한 발짝씩 걸어 다니고 있었다.
지난번 배웠다길래 그래도 조금은 앞으로 나가기는 하겠지 했던 예상과는 달리 봉을 잡고도 서툴게 걸어가는 폼이. 손잡아줬다던 그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만 새삼 미안하고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타고나기를 겁도 많고 나를 닮아 운동신경도 좀 없는 편인 건가 싶어 새삼 안쓰러운 맘이 불쑥.
봉을 잡고 한 발 한 발 얼음에 익숙해지려 노력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스링크 중간에 코치로 보이는 선생님들과 4-5살 정도의 꼬꼬마 아가씨들, 유치원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2명이 있고.
손을 잡고 마냥 행복한 얼굴로 타고 있는 연인 3쌍.
그리고 봉을 잡고 삐그덕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우리 모녀.
이게 다였다.
평일이기도 했지만.
이제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도 30년이란 세월이 흘러있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기도 했겠지만. 이제 평일 오후에 학원에 가지 않고 이런 곳에서 노는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나 중2 때는 여기서 노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30분쯤 봉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돌아다니다 보니.
슬슬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아 슬쩍 봉에서 손을 놓고 코스로 들어와 보았다.
정말 드물게 100미터를 20초에 달리던. 잘 하는 스포츠는 단 한 종목도 없으며, 운동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나였지만.
오. 엄마가 왕년에 동네에서 롤러스케이트를 좀 탔거든~
살짝 달려볼까 하며 발을 힘차게 뻗어봤는데 넘어지지 않고 쭉쭉 속력이 붙었다.
아이스링크 바깥 관중석에 앉아있던 엄마들(꼬꼬마 아가씨들과 소년들의)의 시선이 일제히 느껴졌다.
왜 중년의 아줌마가. 평일 이른 오후에. 스케이트를 타며 링을 돌고 있을까. 솜씨 보아하니 왕년에 스케이트 좀 지지던 운동선수 출신도 아닌 것 같은데. 저 여자 정체가 뭐야.. 하며 궁금 해들 할까 봐.
한 바퀴 돌면 다시 딸에게 돌아와 손을 잡고 5미터쯤 이동을 시키고. 다시 한 바퀴씩 돌며 돌아오곤 했다.
아이는 소심하게 발을 움직이며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봉을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엄마손을 잡고 속력을 내보자 해도. 엄마를 못 믿겠어. 봉이 더 안전해. 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엄마가 씽 나가는 걸 보니 같이 신나 해주긴 했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같이 가서 스케이트를 탔다.
갈 때마다 중년의 아줌마는 나 하나였다.
가운데서 전문으로 피겨를 배우는 학생들이 몇 명. 몇 쌍의 연인. 꼬꼬마 친구들. 코치 선생님.
하다못해 이제 그 코치 선생님들조차 나보다 훨씬 젊은 분들이었고.
내가 왕년에 김연아였다구요.. 할만한 실력도 전혀 아닌 데다가.
연인과 함께 온 거예요 코스프레를 하며 손잡고 탈 남정네도 없고 해서.
매번 벤치에 앉은 젊은 엄마들의 관심 어린 눈총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저 엄마들 중에도 스케이트를 탈 줄 아는 분들이 분명 계실 텐데 왜 같이 타지는 않는 건가 의아해하며.
(니들은 내가 이상하지. 나는 니들이 이상허다.)
딸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온 날이면 삭신이 쑤시고 힘들어 정말 곯아떨어질 지경이었지만.
조금씩 스케이트에 자신감을 갖는 딸아이를 보니 맘이 뿌듯했다.
아주 더디게. 조금씩. 늘고 있지만.
괜찮아. 딸아. 엄마는 네가 봉에서 손을 놓는 게 너무너무 무섭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도 겁이 많아 몸으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에 더뎠거든.
그래도 엄마가 그나마 이걸 탈 줄 알아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가 자꾸 엄마의 눈높이로 널 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될 때도 많아..
엄마가 겁이 많아서. 우리 딸도 겁이 많은 것 같고.
엄마가 엄마의 한계 안에서 엄마의 눈높이로 너를 키워낼까 걱정이 된다.
꼴찌라도 괜찮아. 지금처럼 재미나게 익히고 즐기면 되는 거고.
뭐 무엇이든 일등만 하는 친구가 어딨겠어.
누구는 스케이트를 잘 타고. 누구는 수학을 좋아하고. 누구는 자연을 사랑하고. 누구는 노래하는 걸 좋아하겠지.
그게 각자의 재능이고.
그걸 잘 다듬어서.
살면서 일로 삼으면 제일 좋고.
아님 취미로 해도 좋고.
다음에 스케이트를 타러 가면.
이제 봉을 놓고 엄마손을 잡고 한번 달려보자.
좀 오래 걸려도 괜찮아.
덜 겁내고.
조금은 즐기면서 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