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을 딛고 앞으로 앞으로..라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81점! 합격하셨습니다! "
시험이 끝나고 종료를 누르자마자 빠르고 정확하게 점수를 알려주며 합격여부를 말해준다.
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합격'인가.
합격이라니.. 나 합격했다고?!
이게 뭐라고 가슴이 움찔 행복했다.
밖에 나와 보니 초가을 햇볕이 황홀하고 바람이 시원했다. 횡단보도 앞 긴 신호등 길가에 모든 사람들이 산뜻하고 행복해 보인다.
모두가 비웃을지 모르겠으나 저 시험은 운전면허 필기시험이었다.
그 누가 필기시험을 쉽다고 했었던가.
축 쳐져 땅끝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은 우울함이 계속 나를 짓누르던 어느 날.
이러다 정말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아 뭐라도 시작하자 싶어 무작정 달려가 운전학원에 신청을 하고 세 시간 교육을 들은 뒤. 바로 서점에 들러 문제집을 사 가지고 돌아왔었다.
맘에 걸린 채로 '언젠간 따야 하는데.. '를 20년째 중얼거리느니. 당장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따놓자.
나중에 정말 긴긴 일이라도 하게 될 경우 막상 따려고 하면 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해갈 것이기도 했고.
이 아슬아슬한 나라에서 당장 전쟁이라도 일어나면-것도 평일에 애아빠도 없는 사이 집을 탈출해야 할 경우-멀쩡하게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저 차를 두고 아이손을 잡고 뛰어다닐 생각을 하면 아찔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나면 어딜 도망가.. 그냥 집에 있어야지. 길도 다 통제될 테고.." 하는 신랑의 말도 뭐 맞는 말이긴 하다만.
어쨌든 그 어떤 비상상황에 운전을 할 줄은 알아야지 싶은 생각이 있기는 했다는 얘기다.
뭐 암튼. 억지로 나를 내가 이끌어 학원에 등록을 하고 문제집까지 사 왔건만.
도무지. 의욕이 생기질 않긴 했다.
이왕 시작한 거. 일주일 만에 끝내야지 라는 생각에.
첫날 학원 접수하고 3시간 수업. 다음날 필기. 그다음 날 이틀 장내 수업과 시험. 다시 3일 도로주행 수업과 시험.
요렇게 딱 7일 만에 끝내고자 했기에.
그다음 날은 무조건 필기시험을 치러둬야 했다.
대망의 시험날.(나 혼자 대망의 시험날)
누구나 붙는 시험이라며.
그래도 난 아줌마니까 문제집을 다 풀고 가서 봐야지.
노오란 문제집을 펼쳐 대충 살펴보는데. 이게 문제가 1000문제다.
그러니까 1000문제를 다 풀면 백점인데. 이 1000문제 중에 40문제가 시험으로 나온단다.
... ... ...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200문제 중에 40문제.
150문제 중에 30문제.
딱 요 정도 되어야 말이 되는 거 아닌가.
1000문제라니. 이걸 다 풀라고? 나보고?
고민에 또 고민을 하다. 고민하면 뭐하겠나 싶어 열심히 집중모드로 풀어보기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시작해 딱 100문제를 풀었더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허허허허.. 허허..
이거 1000문제 풀려면 15시간 공부해야 하는 건가..
나 태어나서 하루 15시간 공부해 본 기억이 그 어느 순간에도 없었던 듯싶은데.
다들 이거 다 풀고 가는 건가.. 그래도 풀자. 오늘 붙어야 한다!
시간이 흘러 흘러 오전이 다 지나고 오후 1시쯤 되었을 때 한계점에 도달했다.
난 더 이상 풀 수 없다.
문제집이 너무 두껍다.
진도도 안 나가고 지겹다.
1000문제는 무리다.
풀다 보니 상식적인 문제도 많고.
그냥 가서 시험 보자.
떨어지면 마저 풀고 내일 다시 보자.
더 이상은 못 풀겠다 싶어 씻고 나가 시험장엘 갔고 다행히 우수한(?) 성적으로 붙어 너무너무 다행이고 행복했단 얘기.
8월 초 내가 회사에 냈던 이력서는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소식이 없었다.
하루하루 일주일을 기다리고. 다시 일주일이 가고.
단념하자..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메일을 열어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인사팀 담당자에게 메일을 한통 보냈다.
여차저차 해서 내가 이력서를 내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면접을 보고 있는 것이냐. 난 이리 기다리고 있는데 떨어졌음 솔직히 얘기라도 좀 해달라...
한 시간도 안되어 정중히 돌아온 메일엔 지원한 사람이 많아 아직 진행 중이고 당신의 이력서는 아직 검토 전이다. 신속히 진행하여 곧 결과를 알려주겠다.. 는 답변이 돌아왔고.
난 또 생긋 웃으며 희망의 며칠을 보내고 있다 바로 이틀 뒤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낙담하여 땅만 쳐다보는 나를 향해 신랑이 위로랍시고 해 준 얘기는.
"경력 3년 이상을 뽑는 거라며. 니는 직장생활 15년 이상이니 너무 많어. 요즘 경력 3년 차 정도에 빠릿빠릿 젊은 애들이 얼마나 스펙 좋고 똑똑한데 니같은 아줌마를 뽑겄어.. 애초에 가능성이 희박했어. 나 같아도 아줌마 안 뽑을걸.."
"너 지난번에 알바 갔을 때도 복사기 쓸 줄 몰라 여기저기 물어보고 그랬다며. 컴퓨터 뭐 깔다가 에러 나서 귀찮게 하고.
그러니까.. 아줌마 안 뽑는다고.."
"그리고 요즘 세상에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똑똑하고 젊은 애들도 취업이 안되어서 이력서를 몇백 장씩 내고도 면접 한번 보기가 어려워서 맨날 뉴스에 나오고 그러쟎어.
근데 고작 그거 한 군데 내고 안됐다고 머리 박고 우울해한다는 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 이게.
얘가 세상을 너무 몰라. 너무 환상 속에 있는 거 아니냐고."
나도 안다.
그거 인정하기 이상하게 차암 힘들었지만 나 나이 많은 아줌마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했던 일밖에는 없는데, 그나마 그거 다시 취업하려니 별 쓰일 곳도 없고.
본점 어디에라도 가서 뭐 기획이나 재무, 마케팅, 인사 등등 이런 거라도 해봤으면 몰라.. 그저 주야장천 지점에만 있었어서 그저 그런 경험들 뿐.
그래. 나 컴퓨터도 하던 거만 하지. 뭐 새로 깔으라 그러면 여기저기 막 물어보고 그랬었다.
복사기도 요즘은 어찌나 기능이 다양한지. 한 번씩 업그레이드도 하라 그러고. 업그레이드하고 나면 비밀번호도 설정하고 바꾸고.
인쇄도 함부로 못하게 하고. 인쇄하거나 팩스 보낼 때 위에 승인도 받으라 그러고 해서 당황도 하고 그랬었다.
그래. 나 그저 그런 아줌마다.
그런 내가 감히 이력서를 냈었다.
어쩔 건데.
생각이 이쯤까지 미치니 세상만사가 귀찮고 짜증 나고 무기력해졌다.
뭐 그 정도 일로 그러느냐고 하겠지만. 내가 그냥 그랬다.
마침 주기적으로 올 '우울모드' 주기에 딱 걸렸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겐 어엿한 본업이 있질 않은가.
나는 현재 '전업주부'이니 살림을 알뜰하고 산뜻하게 해보자 싶어 굳이 찌든 때 가득한 주방을 타깃으로 삼아 손을 걷어붙였다.
가스레인지 주변에 세재를 뿌리고 물티슈를 이용해 여러 번 닦아 냈다. 선물 받은 천연세재의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해서 독한 냄새도 없이 반짝반짝 은빛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름 뿌듯해하며 그 앞면 벽도 닦아내고 자 이번엔 밥통을 닦아볼까.
둥글둥글 죄 없어 보이는 밥통을 노려본다.
이 녀석은 나름 압력밥솥인데 언제부턴가 밥 짓는 마무리 과정에 치치 하며 김을 내뿜어내는 일을 못해내고 있다.
당연히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는 산뜻한 목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이고.
그나마 갓 지어먹을 때는 좀 먹을만하지만. 그다음끼에 먹으려고 퍼내다 보면 이미 밥은 푸석해지고 맛이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놈의 묵은 때를 닦아내야 할지. 확 하나 새로 살지를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하필. 다시는 영원히 취직이라는 걸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 시점에.
이 밥통은 왜 실실 기능을 잃어가며 제 구실을 못하고 있냐는 말이다.
사실 말이 나온 김에.
마루에 있는 TV도 지난달에 맛이 가서 폐기 가전 수거하시는 분이 가져가 버린 상태이다.
화면이 묘하게 갈라지더니. 붉은색이 많이 보이고. 초록색이 좀 섞여 보이기도 하길래 좀 참고 시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혼자 TV를 보던 저녁.
"펑"하고 연기가 나며 구수한 냄새가 났다. 뭔가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그 뒤로는 전원을 켜 볼 용기가 나질 않았었다.
내가 나이 많은 아줌마이고 경력은 별 도움이 안 되고. 그 옛날 나의 전공은 더더욱 먼 얘기이니 것도 소용이 별 없어 보여.
드뎌 나의 무능함과 현실을 인정하며.
그렇다면 아무 경력이 없는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사무직을 알아보자며 열심히 여기저기 찾아보는 날 보며 신랑은.
또 우울해한다.
왜 당장 딸아이도 있는데. 돈 버는 자기도 있는데. 지금 당장 4대 보험 되는 일자리를 찾아 종일 하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냐. 이다음에 좀 더 나이 들어해야 할 고민을 지금 하는 거냐며 슬퍼한다.
지금 당장 생활비가 들쑥날쑥 마이너스였다가 플러스였다가 하는 상태를 알고 있으면서도.
저 사람은 그게 또 자존심이 상했는 모양이다.
주정이 이어진다.
신랑이 그렇게 못난 거냐며.
내가 누누이 설명을 해줘 봤자 잘 이해를 못한다.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난 뭔가 일을 하고 싶다고. 일을.
이렇게 잠깐 딸아이 돌보며 종일 집에만 있는 생활이 답답한 거라고.
돈 많이 못 벌어도 나가서 뭔가 일을 하면서 바람도 쐬고 새로운 것도 해보고 싶다고. 그게 사무직 이어도 괜찮고. 알바여도 괜찮고. 무슨 일이든지 일단 해보고 정 아니면 관두더라도 이렇게 집에만 있는 생활이 답답한 거라고.
부부라고 다 말이 통하는 게 아니다.
난 아직 내 쏘울 메이트를 찾지 못했다.
며칠 전 저 사람은 술에 잔뜩 취해 술한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새벽에 들어왔다.
비싼 술을 선배가 사줬다며 술을 먹지도 않는 내게 소중히 넘겨주었다.
업체 손님으로 만난 그 사람이 알고 보니 고향 학교 선배였다며 급격히 친해진 모양인데.
연봉이 어마 무시한 그분이 대뜸 신랑에게 니는 얼마를 버냐며 물어보셨는 모양이다.
신랑은 선배에게 순순히 본인의 월급을 말씀드렸고.
깜짝 놀란 선배가 어찌 그걸 받고 살 수 있냐며 두배 줄게 회사를 옮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직 제안(그건 아마 진심이 아녔을지 모른다)이 아니라.
깜짝 놀라며 '그걸 받고 어찌 사냐'는 그 선배의 말이었다.
이혼해 혼자 살고 계시다는 그 선배는 신랑을 종종 불러내어 홀리는 말을 해댄 모양인데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 양반이다.
그날도 그 술병을 어찌나 소중히 안고 들어왔는지 내가 다 두 손으로 받아 들어 냉장고에 넣어놨었다.
볼 때마다 찝찝하게 만드는 술이다.
주말엔 공방에 나가 작업을 한다.
나무를 다듬고 조립하며 작업을 하다 보면 또 몰입의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가기 전에는 또 끌려가는 기분이지만. 어찌 됐든 도착해 작업을 하다 보면 땀을 흠뻑 흘리게 되고. 한바탕 운동을 하고 난 뒤처럼 개운하고 맘이 편해진다.
딸아이의 협탁 하나를 만들어 가져왔고.
신랑 회사에서 쓸 책꽂이는 거진 마무리 단계이고.
남은 나무로 뭘 만들지는 생각 중이다.
면허는 꾸역꾸역 나가고 있다.
오늘도 장내 수업을 끝내고 바로 시험을 보느라 3시간을 연달아 학원에 있었다.
시험을 한 30여 명이 보는데 하필 끝 순서였는지 한 시간을 바들거리며 떨다 거진 마지막에 보게 되었었다.
학생들이 4-5분 간격으로 두 명씩 나가는데 7분 정도 지나면 합격여부가 컴퓨터에 빨갛고 파랗게 표시되곤 했다.
합격하는 인원이 생각보다 많질 않아 괜히 긴장이 됐다.
50%가 넘는 인원이 떨어졌다.
아침 점심 다 걸러 당은 떨어지고. 순서가 자꾸 밀리니 슬슬 긴장이 되다 급기야 졸리기까지 했다.
마지막 두세 사람 남기고 내 차례가 되어 학원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다행히 합격 소리가 들렸다.
합격하면 다시 돌아와 싸인을 남기고 가라고 했었는데 대기실에 들어오니 남은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다시 내일 도로주행 수업을 신청하고 허기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도 같았다.
아. 나 또 '합격'했어. 오늘.
그리고 말이지...
내가 쪽팔려서 신랑한테는 말 안 할 건데.
다시 이력서를 내 볼라고.
요즘 똑똑한 젊은이들도 이력서를 수백 통씩 내고도 취직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실은 일도 중요하고 돈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디든 내 이력서를 받아들여주는 회사가 있을지 궁금해졌달까.
여기저기 머리를 자꾸 들이밀다 보면 혹시 또 알아.
4대 보험 해주는 그럴싸한 회사에 취직하게 될지.
두고 봐. 신랑.
내가 취직하면 확~.
양복 한 벌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