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싶다가도. 게으른 일상이 좋네요. 역시.
긴 연휴가 끝나가는 걸 진심으로 슬퍼하며 몸을 비틀던 신랑이 내게 물었다.
10일이라는 긴 연휴 끝에 올 이 간절한 짜증이 기억나느냐고.
나는 물론 기억한다. 월요병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래서 매 월요일마다 출근하는 신랑에게 뭐라도 먹일 생각으로 주섬주섬 일어나는 내 몸뚱이 속에서는 한편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진다.
어이구. 그렇지. 월요일 출근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지. 저 불쌍한 가장을 뭐라도 먹여서 내보내고 나는 얼른 다시 자자.
같이 산지 16년이 된 신랑이지만 아직도 가끔 나는 저이의 속을 알지 못하는구나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최근 가장 충격적인 반응은 바로 어저깨였다.
본인이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하냐며 끝나가는 연휴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신랑에게. 평소와는 좀 다르게. 장난 삼아 진심으로.
"무슨 소리야. 당신은 70까지 일해야지.
내가 당신 딸내미랑 집에서 알콩달콩 지내며 싸우고, 당하며(사춘기 딸에게 당하며 사는 걸 저이는 매우 흡족해한다) 사는 게 너무 좋다면서. 그러려면 어째야겄어. 자기가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와야 나랑 딸이 재미나게 살지.
맘 단디 묵고 출근 준비 해."
그랬더니 예상외로 낄낄 웃으며.
"알았다! 내 70까지 일하려면 건강해야 하니까 자전거나 한번 타고 올란다~" 하며 오히려 신나게 밖으로 나가더라는 얘기.
그러니까 마누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가 돈도 못 벌고 당신 혼자 애쓰는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럽다..라고 하면 오히려 다운되어 있고.
아예 "당신은 우리 모녀의 노예이며 호구이자 만만이쟎어.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라." 하는 게 오히려 파이팅이 넘치는 상태가 되더라는 매우 황당한 상황.
부부가 암만 오래 같이 살아봐라.
말하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완벽히 알 수 있는 날이 영원히 오겠는가.
지난번 '불합격'의 트라우마를 깨기 위해 도전한 면허는 엊그제 최종 '합격'을 했다.
내 살아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면허를 따고 나니 나 스스로도 대견해서.
추석 친정에 가는 길에 케이크를 스스로 사들고 들어갔다.
밥 먹고 과일 먹고 커피 마시는 타임에 사들고 간 케이크에 촛불까지 붙여 '합격 축하'노래를 강요했다.
드뎌 면허를 땄냐며 물개 박수를 쳐주는 언니와 친정엄마와는 달리.
신랑은 좀 부끄러워했고 딸내미는 얼굴까지 빨개졌다.(딸은 가끔 엄마의 행동을 부끄러워한다)
형부와 조카들은 낄낄거리면서도 기꺼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친정아버지마저 비웃으시려길래.
딸내미 이 나이에 국가고시 합격해서 온 게 얼마나 대견하시냐. 진심으로 축하를 부탁드린다 말씀드렸다.
더불어. 내가 이제야 면허를 딴 건 순전히 아버지 탓이라며. 그 캐캐 묵은 얘기를 또 끄집어내어 대들었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겨울방학에. 그 당시 친구와 면허를 따러 가자고 약속을 해 놓고 아버지께 학원비를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막내한테 주고, 첫째한테 뭐해주느라 지금 돈이 없는데.. 하시면서 말 끝을 흐리셨다.
딱 맘이 상해버린 나는 더 이상 말씀을 못 드리고 방학이 끝나면서 졸업을 했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이제껏 면허를 못 따게 되었던 게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뒤.
그러므로 다 같이 합격 축하 노래를 하시라고 지긋이 강요.
신나는 가족들의 축하노래 후 촛불까지 끄고 잠시 묵념 후 소원도 빌었다.
차.. 가 필요하므로. 어찌 됐든 몰 수 있는 차가 생기기를.
긴긴 연휴가 지나 드디어 두 삼식이가 회사에 가고 학교에 갔다.
나는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고요한 일상이 주어졌고. 그걸 살짝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시댁에 갔다 오고 친정에 다녀오며 그 사이 면허도 따고 집도 치우느라 열흘의 연휴가 금방 지나가버렸다.
맘에 걸려 있던 면허는 따버렸고. 사실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도 않고. 운전이 수월해진다 한들 차를 끌고 어딜 멀리 갈 곳도 없다. 평일 서점에 가며 혼자 차를 끌고 갈 것도 아니고. 나 혼자 등산하겠다며 차를 끌고 나갈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저 도장깨기처럼 벽을 하나 깨친 느낌.
이번 주말이면 공방도 마지막이다.
만들고 있는 책꽂이 마무리하고. 탁자 하나 깔끔하게 만들어 데려오면 과정이 끝나게 될 것이다.
맘 같아서는 더 머물며 작업을 하고 싶지만. 돈도 돈이고 공방까지 거리가 멀어 오가는 길이 너무 수고스럽다.
자유 제작 공방 비를 두세 달치 모아 공구를 아예 장만하는 게 더 싸게 먹히는 길이기도 하다.
소음이 어마어마한 공구를 가지고 작업할 공간이 마땅치는 않지만. 어찌 됐든 다시 연달아 작업을 하자면 좀 가까운 곳에 있는 저렴한 우산 공방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언제나 삶은 도도리 표 같아서.
우울한 맘 깨치고자 뭘 배우거나 일을 하거나 한 다음에 맘이 평화로운 나날이 오면.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긴 연휴 끝 출근을 너무나 우울해하는 신랑을 토닥이며 달래긴 했지만. 아직도 그 느낌은 생생히 기억이 난다.
매 일요일 저녁마다 느꼈던 그 지긋지긋했던 월요병의 우울함.
출근하기 싫다 출근하기 싫다를 외치며 어렵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는 월요일 아침의 그 무기력함, 지겨움, 한숨..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 탁 떠오를 때면.
'내가 미쳤지. 일을 어떻게 한다고. 출근을 어떻게 할라고. 이력서는 무슨 이력서..' 하는 맘이 절로 든다.
"기억은 나냐"는 신랑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했던 일이 그립진 않다. 절대로.
그 이력서가 행여나 합격을 했었더라면 왜 합격이 된 거지 의하해하며 면접을 어찌 준비해야 하는 건지 몰라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돈을 위해 월요병의 아픈 기억을 기꺼이 감내하리라 예상을 하고 있을 뿐. 막상 몇 주 다니다 보면 저녁마다 신랑을 붙들고 내가 꼭 이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닌 게 아니냐며 눈을 부라리게 될지 모른다. (신랑은 영문을 모른 채 내게 또 멱살을 잡힐 것이다)
내 꿈은 무엇일까.
막연하나마 내가 꿈꿔보는 행복할 것 같은 현실 속의 나의 모습이란 건 대충 이렇다.
아이를 좀 더 키워낸 뒤 내가 정말 자유로워지면.
서울보다 공기 좋은 어느 곳에 아담한 건물을 사거나 지어서.
일층에는 작업공간을 꾸미고 그 위층에 살 집을 마련하는 것. 마당이 좀 있으면 좋고.
잡다하게 갖고 있는 그야말로 잡다한 내 재주들을 모아.
나무 다듬어 가구도 만들고 소품도 만드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좋아하는 커피도 종일 내리고.
오가는 사람들이 들리면 향 좋은 커피 한잔을 건넬 수도 있고. 내가 만든 작업의 산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원하면 살 수도 팔 수도 있는. 또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도 있을 공간.
월세 내느라 숫자 계산하며 사람들에게 가식적으로 웃거나 하지 않고. 내 원하는 시간에 맘 맞는 사람끼리 작업하며 어울릴 수 있는 내 맘대로의 공간. 작업실. 공방.
누가 와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하면 그 부탁은 거절할 테다.
내가 만든 데로 맘에 든다면 그걸 가져가시고.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가져가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전에 더 막연하게 꿈꿨던 일은 제주도 목수였는데. 그 장소가 제주도라면 더없이 꿈같겠지만.
이젠 어디든 가까운 곳에 작업할 공간이 있다면 좋겠다 싶다.
보잘것없는 내 일상이 하루하루 지나간다.
누구나 똑같이 받아 드는 일상의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막연히 생각해보는 내 미래가 꿈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무능해 보이는 내가 한심하다가도.
어느 날엔 그나마 갖고 있는 잔재주들을 모아 이런저런 궁리들을 해보며 산다.
모여진 일상의 하루하루가 쌓여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막연히 기대해본다.
크게 아픈 일 없이. 예상할 수 없는 재난 없이.
계절 가고. 아이는 크고.
우울해지지 않고. 맘 상하는 일 없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감사해하며.
배고파 들어올 가족들을 위해 오늘도 따뜻한 저녁식사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