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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찍은 날

제 사진을 차마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by 온수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언젠가는 받아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

슬슬 준비를 해서 찾아와야지 싶었다.

면허 따놓고 면허증을 받아오지 않는 마누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신랑이 퇴근해 돌아올 때마다 "오늘은 찾아왔나?"하고 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별생각 없는데.

아니.. 그럴 거면 왜 딴 거야. 연수는 안 받아?

글쎄.


아무 때나 찾아오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 찾아오자.

증명사진 찍고 가서 찾아오자.


동네 상가에 증명사진 찍는 곳이 새로 생겼다고 했었다.

집에서 좀 멀리 있는 상가이긴 했지만 버스 타고 안 가도 되는 거리이니 거기로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찍은 사람들 평이라도 좀 찾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동네 카페 글을 조회해보니.

심상치 않을 정도로 댓글이 좋질 않았다.

처음에 문을 여신 분이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그분은 너무나 친절하며 사진도 잘 수정해주셨다는데.

얼마 전에 바뀐 여자분은 너무나 불친절하고 사진도 별로라며 악플 투성이.

불친절을 넘어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본사에 알려야 한다(본사가 따로 있는 체인업체인가 보다).. 등등.



나는 또 그냥 나선다.

뭐 사진 한 장 찍는 건데. 뭐 얼마나 친절하길 바라지도 않거니와. 불친절해도 얼마나 불친절하겠는가.

이 동네 아줌마들 참 서비스 정신 너무 강조하시네.



딱 사진 찍을 정도의 화장을 하고.

털래털래 사진관으로 갔다. 걸어서 15분이 좀 넘어 걸리는 거리였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식사를 간다는 메모와 함께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럴 경우 전화를 하지 않고 다른 날 다시 온다거나 했겠지만. 그 날은 어찌 됐든 맘을 먹고 나온 날이라 10여분 기다리다 전화를 했다. 전화기를 들고 신호음이 계속 반복되는데 영 받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보다 조금 먼저 와 기다리는 듯한 다른 중년의 언니가 주위에 서계셨는데 전화 거는 날 쳐다보며 계속 살피고 계셨다.

한번 걸고 다시 10분을 왔다 갔다 하는데 중년 언니가 멀리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다시 사진관 앞에서 또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가게 전화로 걸었더니 그제야 연결된 핸드폰으로 받는 여자분의 목소리.

"40분 있다 오시면 돼요."

아. 이미 30분은 기다린 거 같은데.

이러실 거면 전화라도 좀 미리 받아주시지.

음.



중년 언니께 일부러 다가가 "40분 있다가 오라고 하시네요. 사진관 기다리시는 거죠?" 했더니.

인상이 좀 구겨지신다.

전화를 받긴 하더냐는 질문에. 가게 전화로 했더니 핸드폰으로 연결된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에라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있나.

근처에 있는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고 책을 꺼냈다.



35분쯤 뒤에 자리를 정리하고 사진관 쪽을 바라보니 중년 언니가 안보이신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들어가셔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계시고. 그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여사진사가 돌아와 있다.

어리고 이쁘시다.

문 열고 들어가 "기다릴게요.." 했더니 "예" 하신다.



먼저 찍어 미안하다는 중년 언니께 먼저 오셨는데요. 뭘요. 괜찮습니다. 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정리하시고 거울로 이리저리 보시고는 자리로 앉으셨는데.

조명을 켜고 사진기 앞에 서서 요런 저런 요구를 하시는 사진사의 목소리가 거슬린다.

딱 거슬린다.

미간에 주름이 팍 잡힐 정도로 목소리의 톤이나 말투가 매우 거슬린다.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

사람들이 저 말투에서 그런 걸 느꼈던 건가. 바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요상한 톤의 말투다.

"여기 보실게요! 눈 크게 뜨실게요! 여기여기요! 네네. 다시 보실게요!.."

목소리는 크고 우렁찬데 뭔가 친절하진 않다. 거슬린다.

나 사람한테 '거슬린다'는 표현 정말 안 하는데. 딱 그 느낌이 정확하다. 거. 슬. 린. 다.



아냐. 뭐. 사진 한 장인데. 뭘 깊이 생각하는 건가 싶어 말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사진사 분과 나란히 앉으신 중년 언니는 나보다 10살 정도 연배가 높아 보이셨는데.

본인의 사진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나이가 많이 먹었네. 내가.."

(그렇죠. 언니. 저도 그렇게 느끼는걸요.)

포토샾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수정해 주시는 시간이 지나고 출력된 사진을 받아 들고나가시기까지 20여분이 훨씬 지나있는 것 같았다.



다음은 드디어 내 차례.

면허 사진 찍으러 왔는데 말에.

사진 규정이 바뀌었다며 위에 까만 카디건을 걸치고 안경을 벗어야 한단다.

"예? "

안경을 벗으라는 말에 너무 당황스러워하니 오히려 사진사분이 더 당황하신다.

규정이고 뭐고 안경을 벗고 사진을 찍는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워 면허증이고 뭐고 받는 걸 포기해버릴까 생각까지 들었다.

30년 넘게 써온 안경이고.

안경을 벗으면 시야가 흐려 안경 벗은 내 얼굴을 나도 잘 모를 지경인데.

안경을 벗은 내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닌 게 되는 건데.

아니. 내가 운전할 때 안경을 벗고 할 리가 없잖아. 어차피 안경을 쓰고 운전할 건데. 그럼 "검문이 있겠습니다. 면허증 주십시오." 할 때마다 낯선 경찰 아저씨 앞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듯 안경을 벗어젖혀야 한다는 말인가.



당황해 속 시끄럽던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순순히 안경을 벗었다.

어쩌겠는가. 누드로 찍으라니 누드로 찍어야지.

불친절한 사진사분은 그 특유의 거슬리는 톤으로(정말 묘하게 계속 거슬린다. 특히 사진 찍는 사람 앞에서 쓰는 그 추임새.) 눈을 크게 뜨고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라며 계속 나를 다그쳤다.

렌즈가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눈은 원래 이리 생긴 건데.

그래도 어쩔 것인가.

한껏 어깨까지 추켜세우며 눈썹을 치켜뜬다. 그래 봤자 렌즈의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눈동자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겠지만.



꽤 여러 장의 촬영 끝에 다시 안경을 쓰고 나란히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만. 이 친근하지 않은 사진사분 옆에서 너무나 크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모니터 안에 커어다랗게 나타난 나의 커어다란 얼굴이 너무나 어색하고 못생겨서 말이다.

정말이지 벌거벗은 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작은 점이나 기미, 나도 몰랐던 주름, 매끈하지 못한 턱 라인, 모공, 지저분한 머리끝, 짝짝이 눈썹.

그리고 이 모든 걸 뛰어넘는.

정말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현실의 그 무엇인가는.

나이 든 내 모습.

나이 든 여자의 얼굴.

적나라하게 제 나이를 드러내고 있는 화면 속의 저 여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




자동차학원에 갈 때 두세 번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예약한 수업시간과 딸아이 간식시간이 애매하게 겹치는 날에는 그래도 애를 챙기고 뭐라도 좀 먹여서 보내려고 애 학원 가자마자 뛰쳐나와 급하게 택시를 탄 거였다.

00 자동차학원으로 가 주세요~ 하면 으레 힐끗 나를 보시며 기사님들이 한 마디씩을 하셨었다.

"면허 따러 가세요? 아이고.. 좀 늦으셨네?!"


그렇죠..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뭐가 늦었다는 거지. 딸 생각이 없다가. 딸 생각이 생겨서 가게 된 건데.

내 뭘 보고 늦었다는 거지. 내 나이를 알지도 못하시면서. 흥.


막상 도착한 자동차학원 대기실엔 내 또래의 아줌마는 흔치 않았다.

대부분 20대 젊은 학생이 제일 많았고. 어쩌다 띄엄띄엄 보이는 또래분들.


하지만 그 또래분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분들이 중년 언니라고 여겨졌고.

나는 그보다 살짝 어린 사람일 거라 생각을 했었나 보다.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 "아이고 좀 늦으셨네."라는 말을 듣는 나 역시 그 언니들과 비슷하게 보이리라는 걸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으신 그 중년 언니의 혼잣말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아.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었네..."

거울 볼 땐 몰랐는데 슬쩍 친정엄마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어색하다는 그 언니의 말에 나도 너무가 같은 심정이었다.


"사장님.. 젊고 이쁘셔서 모르시겠지만. 간만에 찍은 증명사진 정말 쇼킹하네요.. 아. 너무 슬프고 창피하고. 저게 제 모습이구나 싶으면서도 인정하기 싫고 그렇네요.. 근데 너무 웃겨서.."

계속 호탕하게 웃어대며 당황의 심정을 토로하는 이 어색한 손님에게 사진사분은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수술을 좀 해보셔도 되지 않겠냐며 실언도 좀 날리시고.

이제부터라도 청춘은 한참인데요 라며 동네 노인정 멘트를 날리시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 슬픈 진심이 전해졌는지 좀 전에 중년 언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얼굴 수정에 심혈을 기울여 주셨다.

한껏 치켜뜬 눈썹은 마치 이마 정중앙에 박혀 있는 듯 미칠 것 같은 어색한 위치에 있었는데.

마우스를 뽁뽁 눌러대며 삼단계나 아래로 내려주었고.

머리 테두리는 사알짝 부풀리면서 지저분해 보이는 끝머리는 슥삭 지워 이발해주셨다.

짝짝이 눈썹도 요리조리 정리를 하고.

턱 밑에 라인도 말끔하게 정리.

점 빼고. 잡티 없애고.

눈도 살짝 키워주시고. 눈 흰자위에 보이는 미세한 핏줄선까지 싹 지워주셨다.


마지막으로 전체 피부톤을 업! 한 뒤에.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내 커다란 얼굴을 증명사진 크기로 뙇 줄였을 때.

거기엔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러나 묘하게 나 같기도 한 내 모습이 있었다.


한결 정리되고 들 어색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글쎄.. 이 사진을 나라고 해도 괜찮겠나 싶어 슬쩍 사진사분께 여쭤보니.

다들 이 정도 수정은 평균으로 하고. 더 심하게 하시는 분도 있으니 걱정 말라 신다.


큰 화면에서 찔끔찔끔 고칠 때는 몰랐는데. 요기조기 조금씩 수선하다 보니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큰 깨달음이 있었다.

이래서 다들 관리를 하고 시술을 받고. 또 수술을 하고 그러는 거구나.

난 뭘 믿고 여태 이렇게 대충 살고 있었을까.

참. 이 무슨 용감한 자만심인가.

집 밖을 나설 때는 화장이라도 좀 하고 다니자 굳게 맘을 먹었다.




나는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내가 40대의 여성이고.

이미 그 나이의 여성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40대의 사람을 20대나 30대의 사람들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20대로 보이는 그 사진사분은 분명 나를 확실하게 '중년아줌마'취급해 주었다. 솔직한 멘트 감사드려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40대로 보이는 내 얼굴이 나도 부담스러운데 말이다.

실은.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랬었을지 모를 일인데 불구하고 나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온 건지도 모른다.



40대인 내가 50대, 60대의 분들과 일하는 게 부담스럽듯.

20대와 30대는 내가 부담스럽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꼰대로 보일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미 그런 짓거리들을 해버렸던 적도 있다. 인정한다.


내가 아무리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아.라고 부정해봤자.

나는 이미 그 나이이고.

그 나이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당연한 건데 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경력 3년 차, 5년 차 이런 사람 뽑는 곳에 다시는 기웃거리지 말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내 얼굴을 보고 내가 느낀 이 확실한 느낌으로 현실이 좀 인정되는 느낌이었달까.




퇴근해 돌아온 신랑에게 증명사진 찍어 면허증을 받아왔노라 얘기해줬다.

안경 벗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봤는데 너무 못생겨서 깜짝 놀랐다는 얘기와 함께.

내 못생김에 나보다 익숙한-오랜 시간 이미 내 얼굴을 보며 살아온- 신랑이 괜찮다며 얼른 보여달라 하길래 찹찹한 심정으로 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야는 누고?"




부들부들 웃음을 참는 신랑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쳐 주었다.

맘이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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