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칫국 끓이기

우리 부부가 화해하는 법

by 온수

나는 또 김칫국을 끓인다.
술에 취해 들어오면 속이 부글거린다는 신랑은 항상 김칫국을 찾는다.
조금은 겸연쩍은 얼굴로 "김칫국 남은 거 있나."라며 동공이 흔들린다.
12시든, 새벽 2시든 '남은 김칫국'을 찾는 신랑을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단숨에 김칫국을 끓여낸다.

내 김칫국은 간단하다.
멸치로만 육수를 내거나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낸 뒤, 쫑쫑 썬 김치를 넣는다.
김치 국물을 조금 넣을 때도 있고, 김치를 넉넉히 넣은 날엔 국물은 생략한다.
팔팔 끓이다가 파를 넉넉히 넣고 좀 더 끓인다. 파를 넣으면 국물이 훨씬 시원해진다.
중간중간 파르르 끓어오를 때마다 뿌옇게 올라오는 고춧가루는 싹 걷어낸다.


이 간단한 김칫국을 얻어먹기 위해 신랑은 기꺼이 고개를 조아린다.
실은 전날 술 먹고 들어온 신랑이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로 '자신을 무시하지 마라'라고 빈정거렸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얘기인가 싶다가 언젠가 나와의 대화에서 기분 상한 적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겨짚었다. 종일 책만 읽고 사는 나와 일 년에 책 한두 권을 읽는 게 전부인 신랑이 말싸움을 하면 가끔 내게 밀리는 날이 있다. 돌아가는 정치판에 대해 날 선 말을 서슴지 않을 때도 있고, 부동산에 대해 관심을 보이다가도 정치인을 비난하거나 세상이 망할 것 같다고 한탄을 한다. 암튼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이래저래 세상을 비관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나는 가끔 거슬리는 순간이 있을 때 조곤조곤 따져 묻곤 했었다.
"당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덮어 놓고 무작정 싫어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세상에 돌아다니는 헛소리 구별해서 듣고. 그러니까 이 책, 저 책.. 이 책들을 읽어보면 다른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꼭 읽어보면 안 될까나.."

글로 써보니 꽤 기분 나빴을 법도 하다.
신랑은 나보다 6살이 많고, 당연히 사회 경험도 훨씬 많다. 때때로 그의 일에 대한 능력에 존경을 표한 적도 있었다. 사회생활하며 맘고생 할 때도 신랑에게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한 적도 많았고. 명쾌하게 대안을 제시하거나. 내 생각을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회적으로 꽤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선 가끔 모질라지만.)


전날 이유 없이(이유가 없지는 않았군요) 내게 빈정거린 게 민망했는지 눈빛을 흔들리며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게 미안한 마음으로 슬그머니 내민 사과의 제스처라는 걸 안다.
기꺼이 내가 끓인 국을 먹고 속을 풀고 편안하게 자고 싶다는 표현이다.
미안했으니 맘 풀라는 표현이다.

샤워하고 나온 신랑은 속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정신없이 국을 들이켠다.
"뜨거운 거 잘 먹는 사람이 마누라 복이 많다더니."
옛말 틀린 거 없다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다. 뜨거운 국을 목구멍으로 바로 넘기듯이 후룩후룩 들이키며 퍼진 김치 건더기도 우적우적 씹고 있다. 보통은 냉면 그릇으로 가득 먹고도 더 달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늦은 새벽이니 보통의 국그릇에 한 그릇만 먹게 한다. 밥도 좀 같이 먹었으면 싶어서 밥도 반공기 같이 두곤 하는데, 한두 숟가락 뜨는 경우도 있고 다 먹는 경우도 있다.




지난주에는 정말 빠짐없이 월화수목금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주였는데, 바로 그 주말 토요일 내 친정식구가 모두 모이는 '방어회 먹기' 모임에 갔다가 술고래 외삼촌들에게 끌려가 술을 또 엄청 먹었다.
점심 식사로 식당에 모여 방어회를 즐기며 시작된 술자리엔 각종 중국술, 와인, 맥주, 소주가 있었는데 그걸 다 섞어 먹고. 다시 작은 삼촌댁으로 몰려가 남자들끼리 당구를 치러 간다고 했다가 2차로 고깃집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들어오셨다.
집에 들어오신 뒤 다시 양주를 꺼내 든 작은 삼촌.
신랑과 더불어 형부, 내 외사촌 남동생, 사촌 여동생의 남편(사위)들은 줄줄이 취해 정신이 나가 보였다.
술판 싫어하시는 친정아버지가 신랑 술 그만 먹게 해라 조용히 알려주셔서 마지막 술자리에 같이 앉아 대신 넙죽넙죽 받아먹었는데 이 술고래 삼촌들은 그 와중에도 양주를 원샷하시는 분들이라 도저히 당해낼 재간 같은 거는 없었다.

큰외삼촌은 이미 정신이 없으신데 작은삼촌은 멀쩡해 보이셔서 도무지 이 술자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작은삼촌 화장실 가신 틈을 타서 언니네와 사촌들을 모두 밖으로 피신시키고 우리도 집을 나섰다. 화장실 다녀오자 모두 없어졌다며 아쉬워하는 삼촌들을 난생처음 꼭꼭 안아드리며 제발 좀 그만 드시라고 정말 큰일 나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내 얘기가 들리시나요. 제발 정신 좀 차리셔요...

한때 외할머니의 큰 자랑이었던 큰외삼촌은 좋은 학교 나오셔서 큰 대기업의 임원까지 하신 분인데 얼마 전 정년퇴직 후 좀 외로우셨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 그렇게 술을 잘 드시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 좀 과음하시는 것 같아 걱정이고.
작은삼촌은 워낙에 외할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당해낼 자 없는 천하제일 술꾼이시다.
외할아버지는 매일매일 소주 한 병 반씩을 반주로 드시는 분이었고, 항상 코끝이 발그레하게 취해 계셨던 기억이 난다.
암튼 이 두 삼촌들과 만나 술을 먹는 자리가 생길 때마다 신랑은 친한 형님들이랑 술잔 주고받듯이 온갖 재롱을 떨며 재미나게 술을 먹곤 해서 사실은 좀 의외였다. 혹시 술을 좋아하는 건가.

그 주말 일요일엔 드디어 술병이 나서 끙끙 앓던 신랑은 김칫국마저 못 먹겠다며 손을 내저었고.
다음 날 월요일 출근길에 얼굴이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회사 가서 술국 사 먹겠지 생각하며 아이 먹일 점심을 준비하는데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이 너무 불편해서 조퇴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어디 가지 말고 김칫국을 끓여달라는 얘기였다.
속이 다 뒤집어진 거 같아 병원부터 들려오라는 내 말은 싹 무시하고 집에 들어온 신랑은 그 매운 김칫국을 냉면 그릇으로 후룩후룩 떠넘겼다. 이번 김장이 좀 맵게 됐다며 친정아버지는 땀이 뻘뻘 나서 잘 못 드신다는 이번 김치가 신랑에게는 입맛에 딱 맞는 김치라며 유독 더 맛있어했다.
병원 가라는 잔소리는 뒤로하고 침대에 가 뻗어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잠든 신랑을 보니 이젠 좀 괜찮겠구나 싶었다.



중년으로 넘어가는 부부에게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남아 있기는 쉽지 않다. (그건 오히려 거의 불가능하거나. 계속 뜨겁다면. 좀 무섭지 않을까요.)
말싸움을 시작해 각자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끝까지 가다 보면 둘 중 하나 성격을 굽히는 일 없이 싸움이 커지기만 해서. 언제부턴가 우리 부부는 싸움을 시작하려다 말고 그만두자 하며 관둬버린다.
각자 부글부글 거리며 속을 끓이다가도 시간이 지나가면 또 뭘 어쩌겠는가 싶어 진다. 사람이 변할 리도 없고. 내 의견도 맞고 저 사람 의견도 맞기 때문이다.
다만. 먼저 와 다정하게 말을 걸거나 사과할 줄 모르는 신랑이 유일하게 내게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는 오로지 김칫국이다.
"남은 김칫국 없나..." 오로지 이 말.
딸과 나는 김칫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신랑이 연달아 늦게 들어오는 평일날에 '남은 김칫국'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후딱 김칫국을 대령한다. 넉넉히 육수를 우려내 항상 냉장고에 준비를 해두고 쫑쫑 썬 김치도 따로 통에 담아 준비해두기 때문이다.

새벽에 홀로 앉아 뜨거운 김칫국을 후룩후룩 넘기는 신랑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맘에 쌓인 앙금이 사라진다.
땀 뻘뻘 흘리며 방금 닦고 나온 샤워 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내던 신랑은 배가 빵빵한 채로 벌렁 나자빠져 코를 골기 시작한다.

너도 다 풀렸구나 싶어 맘이 개운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 혹시 중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