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입니다. 멀쩡합니다.
인터넷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울증 테스트해준다며 몇 가지 질문이 올라와 있길래 체크하고 이메일 주소를 입력했더니만 며칠 뒤 돌아온 답변이다.
"안녕하세요. 00심리상담센터입니다.
우울테스트 검사 결과입니다.
중증 우울증일 수 있습니다.
증상의 개수가 진단기준 요구량을 상당히 초과하고 증상의 강도가 매우 고통스럽고 스스로 다룰 수 없으며, 증상이 사회적, 직업적 기능을 뚜렷이 방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치료방법은 가벼운(경도) 우울증과 다릅니다.
어떤 일에 대한 관심이 급감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다고 느낍니다.
슬프거나 기쁜일에 감각이 별로 없습니다.
종종 좋거나 나쁜 일에 적절하게 반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만일 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별다른 반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증상이 심해지면 망상이나 환각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가난하다고 확신합니다. 또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저건 내 탓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상담센터나 병원을 방문하여 치료 받으시기를 제안합니다."
어쩐지 어쩐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얼른 신랑과 언니에게 결과를 알리며 "나 중증이래"하며 관심을 호소했지만. 신랑은 뭐 그저 그런 반응이고. 여행 간다던 언니는 선물 많이 사 올 테니 햇빛 보며 돌아다니란다.
실제로 저 메일을 받았던 날 즈음에는 심각한 무기력감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슬프거나 기쁜 일에 감각이 별로 없다는 말에 공감됐고. 좋거나 나쁜 일에 적절히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책을 읽는 속도도 현저히 줄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한 내 위안거리이기 때문에 아예 손에서 놓은 상태는 아니었고.
무의미하게 텔레비전을 보기는 하나 아예 '볼 수 없다'라는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복권에 당첨되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그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복권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꾸어오면서 철저히 그 자금에 대한 계획이 이미 상세히 세워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무덤덤하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복권금을 수령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 어느 회가 될지 모르나 그 언젠가의 1등 당첨금 42억(세금 제하고 실수령 28억)은 내 몫이 될 것이다.
망상은 좀 있는데 환각은 아직이고.
'경제적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가난하다고 확신'한다는 부분에서는 곰곰이 고민 중이다.
경제적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도 가난하다고 느끼는 건지, 가난한 상황이어서 가난하다고 느끼는 건지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그건 당연히 전혀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저 메일을 받고 솔직히 처음에는 살짝 놀랍기도 했지만. 왠지 누군가 내 맘을 알아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기도 했다. 저 메일은 단지 00심리상담센터로 상담을 오세요~라는 뻔한 속내가 보이는 광고일 수도 있지만 나는 당시 꽤나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맞아.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어. 이거 뭔가 호르몬이 이상해. 너무 오랫동안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있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욕도 없고.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자꾸 내 팔다리를 주물렀다.
늦게 퇴근해 돌아오는 신랑을 붙들고 "미안해. 혼자 고생시키고."라고 말한 적도 있다.
신랑은 술 취한 와중에도 좀 당황해했다. 이 여자가 좀 심각한가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자꾸 그 장면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서방님의 부고 소식에 정신없이 달려간 장례식장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시아버님.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떠뜨리시며 "이 버러지같은 인생, 이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하셨었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무능 탓이라는 듯 가슴을 후려치듯 내뱉은 말씀이셨는데 나는 그 말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왜 그 어떤 허드렛일을 해서라도 꾸려가야 할 가장으로써의 최소한의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해 못할 의문이 있었다. 나는 그 무능함과 무기력이 싫었다.
근데 그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나 스스로를 버러지 같다고 느끼는 걸까.
그때 그 무능하고 무기력하던 아버님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제 와 그 심정이 좀 이해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온수매트 두 개를 사서 시댁으로 부쳤다.
확실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학대한 적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다. 그건 저절로 흘러가는 '일상'이 아니라 열심히 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어제는 집 주변 도서관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노트북까지 챙겨 들고 20여 분을 걸어 도착했다.
새로 지은 내부와 새책들에 마냥 설레서 한 권 집어 들고 앉아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이 하필 경력단절여성들의 성공스러운 취업 성공기를 다룬 책이었다. 어느 지방 여성새일센터에서 취업시킨 여성 중 13명의 이야기를 취재식으로 엮은 형식이었는데, 모두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무려 어려운 '사무직'에 취직하기도 하고, 4대 보험이 되는 정직원이 되기도 했다며 절절히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이가 넷이나 되는 젊은 엄마가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슬퍼할 시간도 없이 직업훈련을 받고 취업한 얘기도 있고, 20대의 여성분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황에서도 그 병을 이겨내고 다시 취업한 얘기.. 평범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근데 내가 솔직히 가장 가슴 아팠던 부분은.
그 책 여기저기 자꾸 반복되는 그 얘기.
어느 중소기업 사장님도 40대, 50대의 아줌마라는 얘기를 들으면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감히' '사무직'을 바라는 중년의 여성,.. 20,30대의 젊고 예쁜 동료들은 하나둘씩 취업이 되어 가는데...
이런 제기랄.
전혀 파이팅이 되질 않는다고요!! 하고 소릴 냅다 지르고 싶었다.
음. 관둡시다. 이쯤에서.
저는 지금 쫌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닙니다.
사춘기 딸아이 방학이라 학원 숙제를 시키기 위해 전투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내 '버러지'는 잠시 머릿속에서 멀어져 있기도 하고.
부디 저 아이의 중학교 3년, 고등 3년이 어서어서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딸아이의 고집은 대단해서.
학원에 가기 전에 숙제를 미처 다 하지 못한 상태가 되면.
학원버스를 타기 직전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다. 물론, 숙제를 다 하지 못해 가지 못하겠다는 설명 따윈 없다. 그저 배가 아프다는 이유로 들어가 나오질 않는다.
지난주엔 변기에 앉은 채로 문을 잠그고 두 시간 반을 나오질 않았다.
나오라고 달래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엔 제발 나오라고 엉엉 울었다.
저 성격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도 사춘기 때 미친 듯이 엄마랑 싸우며 컸지만, 미친 듯이 속 얘기를 밖으로 끄집어냈었는데. 저 성격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내가 모르는 외부인이다.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다던데.
내가 아직 갱년기는 아닌 건지. 번번이 사춘기에 패배하고 있다.
우선 아이와 이 방학을 잘 보내야 한다. 딸아이는 중학생이 된다.
개학이라도 좀 해야 알바 구직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