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애미
딸아이 방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 세 개를 정리했다.
작년 12월부터 구석에 찌부러져 있던 것들을 굳이 모른척하며 있었더랬다.
세 개 중 한 개는 초등학교 때 쓰던 가방이라 안에 들어있는 알림장을 버리고 쓰레기 버리며 먼지 털면 그만이었지만 나머지 두 개의 가방은 영어, 수학 학원 가방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묵직한 교재들을 꺼내 어루만지다 미련을 버리고 재활용통에 집어넣었다. 꽤 여러 권의 책을 홀쭉하게 비워내자 맘이 홀가분했다. 한편 착잡했다.
딸아이는 지난 12월 번아웃 상태가 되었다.
4학년 때부터 꾸준히 다녀왔던 영어, 수학 학원을 그만두었다. 학원에 갈 시간이 되어 버스가 올 시간이 되면 배가 아프다며 식은땀을 흘렸고, 하필 그 시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 딸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처음에야 배가 아프다니 걱정도 되고, 이제 곧 생리를 시작하려는 걸까 걱정도 되는 마음이었지만.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다 보니 나는 이 일이 꾀병이라 여겨졌다. 몇 번은 집에서 쉬게 하기도 하고 뒤늦게 버스를 타고 학원에 데려다주기도 하는 사이, 배가 아픈 횟수와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화도 내고 윽박도 지르며 원인을 물어봐도 아무 말없이 돌처럼 굳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거나 침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는 딸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이러다 내가 정말 딸아이에게 폭력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마다 부지런히 옷을 챙겨입고 집 밖으로 나가 걸어다녔다.
이유라도 시원하게 말을 하면 좋겠는데 아무 변명조차 하질 않는 딸아이를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불편하고 숨 막히는 심정을 논리 정연하게 표현할 수 없는 '아직 어린 초등학생'이었다는 걸 뒤늦게서야 나는 깨달았다.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니 본인도 해야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과 엄청난 숙제 양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엄청난 분량에 나도 깜짝 놀라곤 했었다.
이야. 이걸 다 이해하고 있는 거야.. 진짜? 이 숙제를 다 해가야 하는 거고..? 그게 가능한 거였어.. 다들 이렇게들 하고 있다고..? ,, 하며 나는 아이를 대견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 순간 벅찼을 것이다.
월수금 영어학원에 가고. 화목토 수학학원에 가고.
다시 그 시간만큼 집에 와서 숙제를 해야 했다. 숙제는 각각 3-4시간씩 걸리는 엄청난 양이었다.
방학이 되면 그 숙제의 양은 훨씬 많아졌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 아이가 딱해 좀 쉬었다 하겠다고 영어학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 학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어머님. 여기 다니는 아이들.. 영어학원만 다니는 게 아니라 수학학원에도 다 다녀요..
수학학원에 하루 11시간씩 가서 특강을 듣는데요. 숙제도 하고요. " 하셨다.
아이를 다그쳐야 하는지 멈쳐서야 하는지 항상 방향을 몰라 괴로워했던 나는 우선 멈췄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는 한껏 더 예민해져 있었고. 분명 힘들어 보였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특강반에 들어간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모든 학원을 다 끊어버리고 쉬게 두었다.
아이는 끝도 없이 빈둥거리며 동영상을 보거나 액체괴물을 만들어댔다. 늦게까지 놀다 아침이면 늦잠을 자고 끼니마다 밥을 맛나게 먹었다.
다시 또 일주일쯤 지났을 때 짜증이 현저히 줄고, 나를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
"엄마처럼 빈둥거리면서 살고 싶어, 나도~"
"엄마는 이미 대학도 나왔고, 결혼도 했고, 애도 낳고. 직장생활도 오래 하다 이제서야 노는 건데."
"치."
아이는 더 이상 배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딸아이의 친구들이 특강반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가끔씩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늦잠자고 일어나 빈둥거리며 동영상만 죽어라 보는 딸아이를 보기 힘들어 그 추운 날씨에도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 걸어 다녔다. 걸어다니며 알게 되었다. 사춘기 조카때문에 맘고생하던 언니가 하루 3-4시간씩 그 추운 한강을 꾸역꾸역 걸어다니던 심정을. 이제서야 나는 깊이 실감하며 한숨이 났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잠깐 개학을 했다가 봄방학을 하고 졸업식도 했다.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 이쁘게 교복 입고, 스타킹 신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다행히도 교복을 너무 맘에 들어 해서 아침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직접 드라이하며 정성스럽게 옷매무새를 만진다.
매일 보는 딸내미 교복 입은 모습이 지겹지도 않은지. 치마 입고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학교 가는 딸내미를 쫓아 나가는 신랑은 그저 실실 쪼개어 웃기만 한다.
아이는 여전히 학원에 가지 않는다. 학교에는 그럭저럭 잘 적응해 나가는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종종 걸어서 집까지 오는 모양인데 좀처럼 뭘 사 먹지를 않는지 집에 오면 출출하다고 난리길래. 학교 나오면 애들이랑 뭐 사 먹고 하진 않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배가 고픈데 아이들이 별로 사 먹지 않고 집에 부지런히 간다고만 했다.
아. 아이들은 어서 집에 돌아가 간식을 먹고 숙제를 하고 학원에 가고 있겠구나...
아주 가끔 친구들과 음료수 한 잔씩을 사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그게 뭐 그리 신나고 재밌는지 열심히 내게 설명을 해댔다.
"엄마, 내가 딸기바나나만 먹었었쟎어.. 근데 애들이 초쿄바나나가 짱이라고 하길래 그걸 사먹었는데 진짜 완전 맛있어!" 라든지.
"엄마, 이게 녹차맛이 나는 아이스 음료인데 완전 맛있는데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이따 얼려서 다시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볼라고." 한다.
내 어릴 적 군것질은 무조건 떡볶이에 만두였는데 요즘 여학생들의 간식거리는 주로 저렴하게 양 많이 주는 생과일주스이거나 아이스 음료인 모양이다. 가끔 불량식품처럼 보이는 사탕이나 젤리 등을 사 올 때도 있는데 요즘도 저런 걸 팔긴 하는구나 신기해하곤 한다.
중학교 1학년은 시험이 없다. 자유학년제라고 해서 주제선택활동이라든지 동아리 활동을 주로 하고 학생들을 좀 자유롭게 풀어둔다.
물론 중학교 2학년이 되면 바로 시험이 시작되고 등수가 나오면서 찬찬히 실력을 쌓아 두지 않은 아이들은 깊은 멘붕에 빠지며 바야흐로 '무서운 중2병'의 사춘기 전사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선 두기로 했다. 더 빈둥거리고 더 놀고.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내가 살아보니 공부 열심히 해봤자 원하는 학교에 다 가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학교 갔다고 해서 모두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봤자 그 일이 본인의 적성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또 처음부터 적성에 맞는 일 했다고 방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40 넘은 이 나이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뭐를 또 해봐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 어린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지금 하는 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이 되어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오늘 당장의 소중함.
오늘 당장 행복하지 않은 채로 먼 미래만을 기약하며 달려나가는 삶이 무슨 그지같은 시간들이란 말인가 하는 깊은 회의감.
나조차도 당장 '오늘'의 행복을 중요시하며 영화 보고, 책 읽고, 머리 자르고, 맛난거 사먹고 돌아다니는데 말이다. (너무 대책없는 엄마인가요..)
이런 날 탓하며 아이를 좀 더 다잡아야 한다고 애 아빠는 나를 다그치곤 한다.
거 애 하나 잡지 못하고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놀기만 하는 중학생이 어딨냐며 인상을 팍 구기곤 하지만.
막상 엊그제도 딸아이에게 질질 끌려가 멀쩡한 핸드폰을 최신폰으로 바꿔주고 돌아온 바보온달이시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우리 딸내미는 물건 사줄 맛이 난다나. 뽀뽀! 하면 달려와서 뽀뽀를 해준단다. (그 하루 뿐이다)
내가 참. 할 말이 없다.
딸아이는 업그레이드된 핸드폰으로 열심히 동영상을 보며 액괴를 만들고 있다.
이왕 이렇게 쉬고 있는 거 하고 싶은 거라도 배우게 해보자 싶어 열심히 베이킹 클래스를 찾고 있는데 대부분 성인을 위한 반이거나 자격증반이어서 청소년을 위한 수업을 찾기가 힘들다.
아. 그렇지. 청소년 중에 요리학원에 가서 쿠키 굽거나 케이크를 만드는 애들이 많질 않겠구나.. 하는 또 당연한 깨달음.
기껏 찾은 가까운 곳은 20세 이상이라고 해서 아예 나랑 같이 가서 등록 상담을 받기로 했다.
이참에 나도 베이킹도 좀 배우고. 집에서 오븐 쓰는 녀자로 활동을 해봐야겠다.
아이가 놀다놀다 스스로 지겨워지거나, 학원 가는 친구들 지켜보며 스스로 불안해져서 슬슬 공부를 해야겠구나 느껴주기를 기다려보고는 있는데.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다.
학원비 굳은 거 몇 달 치 땡겨서 여행이나 다녀올까.
어느덧 훌쩍 자라 딸아이는 이제 나보다 키가 크다. 더 더 커야 할 텐데. 키 말고 맘도 자라고 몸도 자라고 해야 할 텐데.
나는 또 불안한 어미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