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수 Oct 03. 2020

세상 하수

예민 고수


거의 2년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지난 일은 9월 15일까지가 계약일이었고, 그 전주 금요일까지 일을 하고 이틀은 휴가 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드디어 쉬는구나. 이번엔 좀 오래 쉬어야지 하며 마무리를 하며 일했던 동료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쯤. 옆에 일했던 언니가 일이 들어왔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어어. 나는 좀 쉬려고 그랬는데 어쩌지. 하지만 다음 일이 잡힌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냥 짧은 거니까 잠깐 해야지 했다가. 그 일이 두 명이 아닌 한 명을 필요로 한다며 요구 조건이 바뀌었고. 먼저 일을 받은 언니는 혼자 하느니 니가 혼자 해라가 되어버렸다.


바로 다음 주 화요일부터 투입된다고 하니 맘이 급했다.

단 하루 평일이 주어졌고. 그 월요일에 미루었던 모든 일을 해치워야 했다.

마침 재택근무로 집에 있던 신랑과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우선 안경점에 가서 떨어진 시력에 맞춰 아이의 안경알을 바꿔주고 식사를 했다.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은행에 가서 만기가 한 달이나 지난 정기예금을 찾아왔고 바로 옆 건물 안과에 들어가 갑자기 떨어진 내 시력에 대한 상담을 했다. 눈에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선생님과 얘기를 해보니 그저 시력이 좀 떨어진 거라 하셔서 다행이라 여겨졌지만 내심 노안이 왔나 싶어 영양제를 먹을까요 했더니 실은 별 효과가 없을 거라 해서 패스.

병원비를 보더니 그게 실손 처리가 될 거라며 내게 영수증을 챙기라 했다. 보험은 자그마치 열몇 개를 갖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보험처리를 해보지 못한 나였지만, 몇 달 전 도수치료를 하고 실손 처리를 했던 경험이 있던 신랑은 신이 나서 앱을 깔아 사진을 보내면 그게 금방 다 들어온다 했다. 물정 많이 아는 이에게 역할을 넘기고 다음 코스는 국민연금관리공단. 요구할만한 서류를 여유 있게 3장쯤 떼어놓고 바로 동사무소로 이동해 추가 서류를 준비했다.

피부과에 가서 손가락에 자꾸 올라오는 가려움증 상담을 받고, 그 김에 신랑의 가려움증도 치료. 신랑은 검사까지 해야 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나는 홀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다듬으려 했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무려 3군데 미장원에서 퇴짜를 맞은 뒤 황헤어쌀롱이라는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곳에서 다행스럽게도 기분 좋게 머리를 자르고 나왔다.

아래 올리브영에 가서 화장품 떨어진 걸 보충 겸 넉넉히 사고. 문구점에 가서 잘 써지는 볼펜 한 자루, 형광펜 2개, 뒤로 넘기는 두툼한 수첩 2권, 포스트잇도 사야 했다.


일 끝나면 천천히 해야지 했던 별것 아닌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니 하루가 벅찼다.

내친김에 여권 만료된 것도 갱신하고, 검은색 신발도 하나 사야 했는데 그만 피곤해져 오후 5시쯤엔 여기까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 일했던 곳은 무려 16명의 동료들이 있어 든든하기도 했지만. 한편 너무 많은 인원에 치이는 일도 많았고 그날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꼭 누군가의 행동이나 대화들이 머리에 남아 맘이 어지러운 날이 많았다.

대체로 모나지 않은 분들이라 크게 맘 상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이대도 다양하고 각자 살아온 세월이 다른 이들과 종일 붙어 있자니 그중엔 꼰대 같은 사람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도 있었더랬다.

나는 내가 세상 무덤덤하고 무심하고 무난한 사람인 줄 알았다가 이번 일을 하며 크게 깨달은 점이 있다.

나는 세상 예민하고 세상 다혈질이며 그러려니가 안되는 인간이라는 점.



이번에 일하게 되면서 이 세계에서 오래 일하셨다는 유명한 팀장님과도 같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분이 나를 좋게 보아 잘 대해주시는데도 나는 그분의 스타일에 맞춰드리느라 종일 옆에서 무수리처럼 지내다 기가 다 빨려 남 몰래 맘고생을 했다.

일했던 건물 바로 위층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정직원들은 모두 재택근무를 하느라 출근을 안 하고 프리로 일하는 개발자들과 우리들만 쪼르륵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선 "우리가 개돼지냐. 왜 지들만 재택이고 우리한테는 정보도 공유를 안 하고 연락도 안 해주느냐"라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돌아다니자 옆에 있던 언니가 워워 하며 쫓아와 나를 말렸다.

같이 일을 하자면 경력이 많아 일이 빠른 이도 있고 경력이 짧아 배워가며 일을 하는 경우는 당연히 발생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나이가 많아 나는 느리잖아. 니들은 빠르니까. 하며 도움받는 걸 당연시하던 언니와는 한바탕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놓고 사이가 어색해진 걸 풀려는 그 사람을 모른척하기도 했다.


부정적인 사건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잊을만하면 이어지던 수많은 "공구"에 맛을 들여 알짜배기 정보를 많이 얻었다. 어느 언니는 주문하면 바로잡은 주꾸미를 벌겋게 양념해 10팩씩 보내주는 전화번호 알려줬고. 알바 때마다 맞춘다는 짝퉁 명품 반지(명품 반지 디자인으로 똑같이 만들어 보내준다) 공장도 알게 되었으며. 운동할 때 핸드폰 넣을 수 있는 허리춤에 딱 달라붙는 가방을 비롯해 양산, 마스크, 알콜 솜, CJ 상품까지 공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소화가 안된다는 나를 보며 카베진을 알려준 것도, 술떡이 이리 맛있는 건지 알려준 것도 이번에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었다.

온갖 정보를 얻은 나는 내가 팔로잉 하는 인스타에 올라와 있는 보리굴비 공구를 진행해서 신세를 갚았다.



점심시간마다 삼삼오오 주변 맛집을 돌아다니고 커피 한잔 들고 산책도 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도 참 많이 나눴다. 나는 16명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려-한 명 동갑이 있었는데 그녀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막내가 아니다 보니-막내 노릇을 해야 했는데, 뭐 야근할 때 밥 챙기기, 언니들이 사 오신 간식 똑같이 분배해서 나누기 등이 내게 할당되었다.

내가 또 으른들을 모시는 성격이 아니라 처음엔 그저 그런 척을 하며 시키는 데로 하다가. 맛있는 빵집에 들러 빵을 사 오는 언니가 있으면 불러다가 잔소리를 했다. 이거 16등분 하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아시냐고. 다음에는 꼭 똑같은 빵을 16개 사 오시라고. 아니면 사 오시지 말라고.

야근할 때는 메뉴 주문을 받다가. 이게 또 16명의 기호를 맞추려니 한식 도시락을 하려다가 피자가 되고, 또 피자가 다시 핫도그가 되길래 그다음부터는 내가 맛집을 검색해서 4개의 메뉴를 4개씩 시킨 다음 선착순으로 가져가시라고 해버렸다. 주문 좀 받아라 막내야 하면 주문 없어요. 노노.

건물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헐레벌떡 일어나 움직이는 와중 늦장 부리다 못 쫓아온 언니들 앞에서 엘베 문을 닫아 버렸다. 늦으면 버려~라고 참된 교육을 하며.

이쯤 되면 거기서 욕 되게 먹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내 피할을 했다. 나는 어른 모시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늦으면 버릴 테니 그리 알라고.

그리고 막내이니만큼 일은 열심히 했다.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 가야 한다 하면 알아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건 현업을 지원하는 일이라 만만찮았고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다. 진짜다. 언니들 안 보내려고 내가 계속 지원해서 갔다

진도도 미리 빼놓기 위해 노력했다. 막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싶은 건 하고. 어. 이건 염치없는 거 아닌가. 하면 가차 없이 직설적으로 비난.

그리하여 나는 싸가지없는 막내가 되어 몇몇 분들은 나를 욕하실 수도 있었겠다 싶다. 왜냐면 그분들은 대부분 으른들을 잘 모시는 진정한 어른들이었으니까.

내가 못 견뎌 하며 씩씩거리면 그 말을 듣는 누군가-16명 중 누군가-는 항상 그런 거지 뭐. 뭐 그런 걸 갖고 그렇게 흥분하냐. 그러니까 니가 아직 어린 거다(나 여기서 "아가"라고 불리었다...)라며 아무도 심각하게 맞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파르르 파르르 흥분하는 건 오로지 나 혼자인 것 같았고. 나와 몇 살 차이 안 나는 언니들도, 나와 열몇 살이나 차이 나는 왕 언니들도 나보다 인생을 두 번은 도돌이 해서 살고 있는 양 인자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하다못해 울분을 참지 못해 퇴근한 신랑에게 그런 얘기를 해도. 너는 도대체 사회생활을 그리했으면서 그런 사람을 처음 본 것처럼 그러냐. 그런 사람이 세상 비위 맞추기 편한 사람인데 뭘 흥분해서 울분을 토하느냐며 오히려 날 신기한 사람 취급했다.

어. 그런 사람이 흔하다고? 세상 꼰대인데? 모시라며 대 놓고 나보고 그러는데? 내게 왜 모셔? 그런 사람이 왜 흔해? 그런 사람 나 회사 다닐 때 본 적 없는데? 하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인지를 못한 거란다.

아. 그렇구나. 그런 사람 있었는데 내가 인지를 못했구나. .. 모셔달라고 그리 눈치를 줬는데 내가 모셔주지 않았던 수많은 상사들이 이제야 내 뒤통수를 치며 지나갔다. 그래서 나 안 좋아했구나. 그때 그분이. 그래서 공격당하는 느낌이었고 비난받는 느낌이었구나.


사람은 참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더군다나 나처럼 사람과의 접촉이 별로 없는 인간에겐 당연하고도 쉬운 사회생활 지침들이 이제야 머릿속에 박혀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꼰대도 많고, 염치없는 이들도 많으며. 좋은 게 좋은 거고 갑을 병 정은 늘 있어 왔던 건데. 나는 그걸 여태 잘 몰랐다.



덕분인지 몰라도 이번 일은 혼자라 너무 편하다.

처음에야 혼자서 잘 할 수 있을까 싶어 전날 밤 잠도 설치고 갔었는데, 그래도 이제 좀 여기저기 일해봤다고 자리 잡고 컴퓨터 설치하고 이것저것 자료 찾고 인사도 하러 다니고 하는데 어색함이 없었다.

어떤 서류는 어디에 올려져 있겠구나, 기획서는 저걸 기준으로 하면 되겠구나, 대빵은 저 사람인가, 현업은 멀리해야지, 점심으로 갈 분식집 몇 군데를 뚫어놓고 식사 후 걸어 다닐 산책길까지 정해놓으니 맘이 편했다.

아침저녁으로 인사드리는 부장님이 계시지만, 아침에 업무 지시받고 중간에 뭐 물어볼 거 여쭤보고 저녁 퇴근 전에 간단히 보고만 하면 끝이라. 그 외에 내게 말 거는 사람도 없고 모셔야 할 사람도 없으며 염치없는 사람도 없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진정한 내공녀가 되겠다고 다짐도 제법 해둔 터다. 비굴의 끝에서도 자존감이 높은 자가 되리라. 세상 시시한 인간들에 부르르 떨지 말자며 속으로 욕을 삼키는 연습까지 했는데. 이게 건드리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이리 평화로울 수도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혼자 일하는 게 편하다. 



일은 하던 일이고. 하던 일 아닌 일이 주어지면 열심히 물어보며 하다 보면 또 금방 적응이 되니 좋다. 그래봤자 몇 달 일하러 온 알바생에게 아주 중대한 일을 맡길 리도 없고, 대체로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셔서 일을 금방 진행할 수 있었다.

테스트야 늘 해오던 거라 익숙하지만. 테스트를 하면서 결함을 올리는 시스템은 다르다. 근데 그게 또 비슷해서 금방 적응이 가능했고. 단말기도 은행 단말기가 다 거기서 거기라 누가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금방 알아서 데이터도 찾고 만들고 한다.

공용 폴더 여기저기 뒤지다 보면 기획서도 나오고 그 외 다양한 자료를 찾아다 쓸 수도 있고.

이번에 모바일앱이라 테스트폰을 두 대 받아 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은행 앱은 아니고 은행원들이 쓰는 앱을 개발하는 거라 그것도 새삼 재밌다. 누차 얘기하지만 테스트는 재밌다. 그게 참 다행이다.



한참을 일만 하다 지내다 보니 책도 못 읽고 주말에는 대청소 하루, 장보기 하루하면 시간이 다 가서 예전 직장 다닐 때처럼 똑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책을 안 읽으니 생각이 없어지고 단순해져서 글을 쓰고 싶어도 예전처럼 쉽게 노트북을 열수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써지지가 않는다. 꺼끌 꺼글하달까. 뭔가 답답하고 어색하긴 하지만 이러다 영영 글을 못쓰게 될까 봐 이번 달에 일부러 책을 10권쯤 읽었다. (진짜다)

생각이 몽글몽글 피워 올라야 글이 말하듯 쉽게 펼쳐지는데 나는 일을 하면 머리가 딱딱해지는 기분이랄까. 뭔가 한참 만져줘야 하는 상태가 되지만. 실은 안 써지는 와중에도 억지로 한자씩 채워보고 있다.

가끔 오랫동안 비워둔 내 브런치의 오래된 글에 댓글이 달리면. 그게 그렇게 고맙고 반가워서 맘이 금방 뭉클해지곤 했다. 아. 글을 써야지. 내가 뭐하고 지내는지 얘기할게요. 감사해요.라고 댓글만 남기다 오랜만에 맘을 잡고 서툰-언제는 안 서툴렀냐-글을 올려본다.



어찌 됐거나.

인간관계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세상 하수지만.

뭐 어쩌랴. 부지런히 업그레이드하며 살수 밖에.




작가의 이전글 부러움과 질투, 선택했던 상황에 대한 후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