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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Feb 10. 2016

나의 시어머니

실은 그녀를 아직 미워합니다


 첫인상은 '귀티 나게 예쁜 여자'였다.

 처음 내 얼굴 보자며 시이모님 내외분까지 같이 나오셨을 때 시어머님의 첫인상은 곱고 예뻤다.

 6살 차이가 나는 신랑은 그 당시로 노총각이었고, 그 만남을 계기로 얼떨결에 상견례가 진행되고 결혼날짜가 정해졌다.

 주변에 결혼한 친구도 없었고 결혼에 대해 진중한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가 얼결에 정말 결혼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혼 후 명절을 지내고, 어머니의 첫 생신에 동서가 은근히 제의를 해왔다. 동서는 내가 결혼한 뒤 바로 결혼을 한 터라 비슷한 시기에 이 집안 식구가 된 터였고 나보다 5살이 위였다. 다른 집들 보니 명절이든 생신이든 돈은 이 정도로 준비하는 것 같더라.. 형님과 본인이 같은 금액을 드리면 어떻겠느냐. 솔직히 형님이 많이 드리는 게 좀 부담스럽더라 하는 말이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좀 무리를 하던 터라 알았다 하고 금액을 맞추어 드리기로 했다.

 봉투를 드리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시아버님이 전화가 왔다. 소리를 지르며 너희 시어머니가 거지냐며 성을 내셨다. 말도 못 하고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옆에서 놀란 신랑이 전화를 빼앗았다.

 나중에 들으니 동서네는 아예 찾아가셔서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동서는 만삭의 몸이었고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 돈을 적게 드린 죗값이었다.

 그 뒤로 시어머니는 통보를 해왔다. 명절 두 번, 제사 두 번, 생신 두 번 이렇게 6번은 무조건 50만 원씩 내라.

 내 월급이 90만 원이고 신랑 월급이 130만 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우린 집도 없었고, 빚만 4000만 원이었다. 그 빚도 반은 시댁의 빚이었다.

 결혼식을 서울에서 했다는 이유로 식장 비용도 친정아버지가 모두 부담하셨다.

 그 이후 우리는 꼬박꼬박 50만 원씩을 드리고,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추가 용돈을 드리고, 병원비며 각종 세금 등을 부담했다.

 서방님네는 한두 번 드리다가 안 드리는 눈치였다.

 

 


 

 신랑은 결혼 당시 빚이 2000만 원이었다. 우린 직장에서 만났고 맞벌이를 할 터니이 그 정도(?) 빚은 몇 년 안에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집도 없었다. 시댁은 두 번의 사업부도를 맞아 살고 있는 조그만 아파트조차 빚이 잔뜩 인 상태였다.

 

 데이트 당시에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지 몰랐다. 월급으로 데이트 비용 내고, 뚜벅이로 다녔지만 행복했었다.

 

 만남 중간에 느닷없이 연락이 두절된 적이 있었다. 어제까지도 잘 만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연락이 되질 않았고 나는 이유를 몰랐다. 회사에서 휘청 쓰러질 정도로 그 몇 개월이 너무나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시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을 위해 몇십 만원씩 적금을 넣고 계셨는데, 그마저도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신랑이 절망적인 고민을 하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것이었다.

 그리곤 4-5개월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되긴 했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화가 치민다.

 어느 비겁한 남자가 이토록 배려 없이 통보도 없는 이별을 한단 말인가.

 두고두고 몇 년을 그 시절 생각이 나면 욕이 나왔다.

 

 신랑은 사춘기 시절 아버지의 부도를 겪으면서 가난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고, 가난 앞에 사랑은 절대로 가능할 수가 없다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길가에 나 앉은 상태로 사랑이 무슨 사치냐며 그때는 더 좋은 사람한테 가라는 의미로 그랬단다.

 그리 가난한 사람을 철 없이 선택한 내가 무모했던가.

 걱정되셨던 친정어머니가 사주를 봐보니 대뜸 그러더란다. 이 남자 지금 돈이 없네요.. 뜨끔하셨던 부모님이 뜯어말리셨었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말리셨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콩깍지가 씌어 들리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결혼 후에는 아이도 갖지 않았다. 월급날이 되면 둘이 받은 돈을 모아 신랑의 빚을 갚았다. 저금은 당연히 없었다. 빚이 없어지는 걸 보며 기뻐했다. 드디어 2000만 원을 다 갚고 깨끗해진 신용조회표를 보고 싶어 출력을 했을 때, 어찌 된 일일까 .. 2000만 원이 그대로 보였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집에 와 신랑한테 물어보니 얼굴이 사색이다.

 사실 빚은 4000만 원이었단다.

 그 날은 정말 울고 또 울었다.

 

 돈이 모일만하면 시댁에 들어가곤 해서 아예 적립식 상품을 잔뜩 가입했다.

 재직 당시 최고 17개의 적립식 상품에 가입되어 있었다. 월급이 들어옴과 동시에 모두 자동이체로 빠져나가고 최소한의 돈으로 생활비를 썼다.

 2001년에 결혼해 빚만 갚다가 빚을 모두 정리하고 처음으로 적금을 가입한 게 2007년이었다. 첫 적금을 들고 가슴이 뿌듯했다. 그렇게 돈이 생길 때마다, 월급이 조금 오를 때마다 적금을 하나씩 추가했고 나중에 17개까지 가입하게 된 것이다.

 결혼 후 4년 정도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처음엔 정말이지 아이는 엄두도 나질 않았다.

 

 

 


 

  시어머니는 끝없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느 집은 며느리가 시어머니 화장품을 꼬박꼬박 챙기더라 말씀을 하시며 영양크림을 하나 말씀하셨다. 그 화장품을 사러 백화점에 가니 2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영양크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비싼 화장품이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시어머니 말씀이라 몇 년 동안 그 화장품을 사다 드렸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시골에 내려오라 하셨고 그때마다 차비며 용돈이 만만찮았다.

 느닷없이 신혼집에 오시는 일도 많았는데 전화도 없이 집 근처에 도달하면 그제사 연락을 주셨다. 오시면 내가 직장에 간 사이에 속옷 서랍까지 싹 열어보시고, 옷장과 신발장을 뒤지셨다. 부엌에 살림을 싹  다시 꺼내 본인 맘대로 정리를 하신 적도 있었는데 말도 못 하고 저녁에 혼자 울었다.

 나중에 아이를 봐주시던 입주 아주머니가 우물쭈물하시며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다.

 이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이 엄마가 직장에 나가면 애 할머니가 신발장을 열어 신발도 신어보고 옷장을 다 뒤지신다고.. 본인도 놀라서 얘기를 한다며 난처해하셨다.

 이미 그때쯤엔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 원래 그러신다고 했다.

 안 신는 운동화 없니.. 하시면 운동화가 필요해 이미 운동화를 찾아 보고 신어 보신 뒤였다.

 한 겨울에 카디건 하나 걸치고 비닐가방을 들고 오신 적이 있었는데, 형제들 집에 다니러 오셨다길래 알아듣고 겨울 코트 한 벌과 하나 있는 정장 가방을 내 드렸다. 애처럼 좋아하시며 입고 나가셨는데, 그 뒤로 바지며 속옷에 음식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내려가셨다.

 

 

 

 4년 전에 급작스럽게 서방님이 돌아가셨다.

 당시 신랑은 두 번째 직장에서 8년째 근무 중이었고, 2년 넘게 외국에서 주재원으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작은 사업을 하던 서방님은 하는 일마다 왠지 잘 풀리지 않았고,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다.

 평소 쾌활하고 나와 죽이 잘 맞았던 서방님이 그리 되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당시 시부모님이 사시는 집은 서방님 명의로 되어 있었고 그나마 빚이 만땅으로 차 있었는데, 서방님이 급작스럽게 돌아가시자 해결을 해야 했다. 1억 이천짜리 집에 대출이 8000만 원이 넘으니 그 많은 돈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맞벌이를 한다지만 2년마다 오르는 전셋값을 마련하느라 우리에게도 그 큰돈은 없었다. 동서네는 형편이 더 빤했다. 사업은 잘 안되고,  빚도 몇천 있었다.

 

 신랑은 8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8000만 원 받았다. 그 돈은 고스란히 대출상환금으로 쓰였다.

 장례식장 비용 일체와 서방님의 빚도 우리가 정리했다. 마음이 아파 군말 없이 따랐다.

 

 일주일쯤 뒤에 시골에 남아있던 신랑이 2500만 원을 더 보내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이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집을 알아보니 이 돈으로는 어디 옮겨갈 곳도 없어 차라리 수리를 하자고 했단다.

 기가 찼다. 이 상황에 그게 말이 되느냐고 했는데 버럭 성을 내는 신랑에게 알겠다고 하고 빚을 내 보냈다.

 본인들이 알아서 공사를 하겠다고 하셔서 새로운 직장에 출근도 해야 하는 신랑은 서울로 올라왔다.

 

 며칠 뒤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시아버님이 해맑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지금 시내에 나와 대형 TV를 보고 있는데 깨끗하게 공사한 집에 새로 놓고 싶으니 사달라는 말씀이셨다. 순간 멍했다. 치매이신가.. 아들 잃은 슬픔에 정신을 놓으셨나... 옆에 어머님 계시냐고 바꿔달래서 이게 무슨 얘기냐고 했더니... 또 해맑으시다.. 니들이 사 줄 수 있으면 사주고, 안되면 마는 거라며.. 어머님도 옆에서 열심히 구경을 하고 계신 터였다.

 신랑에게 전화를 바꿔주니 눈치가 신랑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 앞이라 좀 화를 내는 척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TV를 구매했다가 취소한 내역이 보였다. 내게 눈치가 보여 샀다가 취소를 한 모양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넘겼다.



 

 일주일쯤 뒤에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중이었는데 시어머님이 전화가 왔다. 정수기를 사달란다. 동네 근처에서 떠다 먹는데 겨울 빙판길에 넘어지면 시아버님 큰일 나신단다.

 정신이 멍하고 아득해졌다. 내가 대답이 없으니, ..그래 내가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이건 꼭 사야겠다시며 다부지게 못을 박으신다.

 버스에서 내려 시내 한복판에서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머릿속 모든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둘째도 낳지 못하고, 아이를 직접 키우지도 못하고 일을 하며 사는데, 물욕도 성취욕도 없는 나는 어서 이 일을 그만두고 아이 곁에 있고 싶은데.. 왜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고 있단 말인가. 이 여자는 도대체 내게 왜 이리 당당하게 이런 요구들을 끝도 없이 해대는가.

 

  말 잘 듣던 며느리가 성을 내니 한동안은 미안해하시기도 하고 사과도 하시길래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부탁은 안 하실 줄 알았지만, 그 터무니없는 상황은 계속됐다. 항상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고, 끝없이 요구하셨다.

 제사를 절로 옮기겠다고 하셔서 몇백을 들여 시할아버님, 시 할머님 위패를 절로 모시게 됐었는데 그것도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제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도 않으시는 어머님이 내게 전화를 하셔서 말씀하셨다. 왜 제삿날인데 50만 원 안 보내냐고.

  어머니가 왜 내게 50만 원을 요구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될 리 없었다.

  나중에 그 얘기를 다시 꺼내 물으니.

 .. 며느리가 항상 보내던 돈인데 안 보내길래 그러셨단다..

 제사 옮긴 거 따로, 돈 따로란 말인 건가. 도무지 상식적인 선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60초 반부터 이미 일 같은 거 못하겠다 두 손 놓아버린 시부모님께 진작부터 생활비를 드리고 있었다.

 다달이 50만 원이었던 돈은 70만 원이 되었고, 지금은 100만 원이다.

 생활비를 드린지도 7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직장을 나오면서 하루는 내가 도대체 시댁에 흘려보낸 돈이 얼마인가 싶어 14년 치를 모두 까서 계산을 해보았었다.

 2억 600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서방님께 몇 천씩 드린 것까지 하면 3억은 족히 넘어갈 터였다.

 우린 아직도 2년마다 올라가는 전셋값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막상 금액이 저 정도나 되는구나 싶으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결혼생활 14년 동안 이사만 7번이었다.

 

 

 그 와중에 또 서울 집에 올라오신 시어머니가 새로운 이론을 펼치시며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시골집이 1억 2000만 원 정도 하던 것이 2억까지 올랐다며 그 집을 팔아 본인을 달라 신다. 서울 임대주택에 들어가려고 이미 몇 달 전에 서울 사시는 이모님 댁으로 주소이전까지 하셨단다. 한 달 100만 원씩 생활비 받으면서 눈치 보는 것도 싫고, 지금처럼 넓은 집에 살 필요도 없으니 그 돈으로 임대주택 들어가고 나머지를 생활비로 쓰시겠단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집이 그렇게 가격이 오른 줄도 몰랐었고, 시부모님 편하게 사시라고 공사까지 새로 하지 않았던가. 자그마치 2500만 원을 들여 도배는 물론이고, 화장실도 새것처럼 고치고, 마루에는 샹들리에 같은 조명도 달아 놓고, 안방에 장롱도 새로 맞춰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였다.

 

 

 그 집의 대출상환금 8000만 원과 수리비 2500만 원까지 보태면 우리가 시댁에 들인 돈은 이미 3억이 넘었고, 앞으로도 두 분의 생활비며 병원비, 세금, 자동차세, 보험까지 깡그리 우리가 부담해야 할 몫인데 그 계산은 온대간대 없어지고 집 오른 값 내놓으라시는 거였다.

 내가 말이 없으니.. 당연히 1억은 니 돈이니 너 줘야지 하신다.

 시어머니는 목돈이 쓰고 싶으신 거였다. 여행도 가고 싶고,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싶은데 도통 추가 용돈이 없으니 궁리 끝에 거기까지 가신 터였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심장이 벌렁거려 저녁을 차려드리고 동네를 두 시간 돌다 들어왔다.

 

 

 그다음 시골에 내려갔을 때 또 집 얘기를 하셔서 기가 막혀 있었는데, 서울에서 잘 된 형제들이 집들이를 한다며 초대를 받았다 반복하신다. 며느리가 열을 받던 맘이 어찌 됐던 본인은 서울에 또 올라오시겠다는 언질을 주시는 것이다.

 서울에 올라오셔도 저희 집에 오지 마세요 말씀드렸다. 어머니 오시면 오시기 전부터 심장이 벌렁거리고, 가시고 나서도 일주일간 잠을 못 잔다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 제가 맘이 좀 편해지면 그때 오세요 못을 박아버렸다.

 이번만큼은 내가 단호했다.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 싶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더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려니 가슴이 답답하다.

 

 차라리 말이 안 통하는 치매노인이시다 생각을 해버리자.. 하다가도 순간순간 말을 바꿔가며 나를 속이려 드실 땐 사기꾼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의무적인 며느리 도리까지만 하고 안부전화는 일체 하질 않는다. 전화를 드리는 순간, 조금 맘을 풀었다 생각하시는 순간, 또 어김없이 돈 얘기가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나는 또 보내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미워하며 괴로워하는 일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천하에 못된 며느리가 되자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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