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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Nov 01. 2023

중년의 해외 노동자 이야기

열사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만난 사람

내가 한때는 말이야 “중동의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폭풍 맞으며 땀에 젖은 오일달러를 벌어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지” 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일부는 맞지만 과장이다. 여름 한낮 대기 온도가 40도 중반을 오르내리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3년 있었다. 건설회사 직원으로 해외영업을 했다. 공사대금을 리비아 현지화나 달러 또는 원유로 받았으니 내가 오일달러를 번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땀으로 목욕해야 하는 육체노동을 하지는 않았다. 사무실과 숙소는 에어컨으로 시원했고,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일 끝나고 동료들과 테니스를 치면서 땀을 흘렸을 뿐이다. 중동에서 일했다고 하면 누군가가 “거기 엄청 덥고 모래바람이 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라고 하면 “네 그렇죠.” 하면서 주제를 돌리곤 한다. 땀내 가득한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피한다. 건설회사에 있었지만 몸으로 노동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차라리 몸을 쓰는게 낫겠다고 푸념한 경우가 있었지만, 리비아 등 중동에서 일한 많은 노동자 아저씨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리비아로 발령받아 출국하는 날 그 분을 만났다. 당시 리비아는 전세기를 타고 갔고, 좌석을 가득 채울 정도로 출국인사가 많았다. 김포공항 (당사는 인천공항 개항 전이다) 출국 카운터에서 회사 해외인력 과장이 나를 불렀다. 

“당신은 저분들을 인솔하여 스위스 항공을 타고 가세요.” 라고 하면서 한 무더기 여권을 준다. 중년의 노동자 아저씨 다섯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도 리비아는 처음 가는 길이라 익숙하지 않습니다.”

“해외 출장경험이 있잖아, 취리히에서 환승해야 하니까 알아서 잘 하고, 트리폴리에 도착하면 공항에는 현지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전세기를 타면 곧장 가는데, 스위스 항공은 10여 시간을 타고 취리히에서 내려 8시간을 대기했다가 트리폴리 편으로 갈아타야 했다. 시간이 두배 걸리고 환승절차를 거치는 것도 고단한데 5명의 아저씨들을 인솔하라니…

그분들도 불만이 많았다. 한분은 대한항공을 탄다고 마일리지 카드도 만들었는데 스위스 에어를 타면 마일리지 적립이 안된다고 투덜거렸다. 다른 분은 탑승인원이 넘치니 힘없고 빽없는 노동자를 빼서 다른 항공편으로 돌린 것이라고 하였다. 

직항 전세기가 먼저 출발하고, 우리는 스위스 항공 카운터로 가서 출국수속을 마쳤다.

항공기 탑승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섯 분 모두 4-50대였고 해외에서 일한 경험은 엄청 많았다. 내가 인솔하기 보다는 그분들을 따라갔다. 

그 중 한 분은 유난히 얼굴이 어두웠다.

“반장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딸이 인사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

이 반장은 해외 건설현장을 돌아 다닌지 10년이 되었으며, 지난번 귀국해서 딸에게 다시는 해외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하지만 국내는 작업이 일정하지 않았고, 비오면 놀고, 추우면 쉬어야 했는데 딸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돈이 더 필요했다. 해외 일자리를 알아보고 고민하다가 간밤에야 딸에게 다음날 출국한다 알렸다고 한다.

해외 현장에 일하러 다니느라 자식도 딸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 딸이 중학교에서 1, 2등을 하다가 이번에 외국어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했다. 당시 외고가 신흥 명문으로 각광을 받았다.

해외는 국내 건설 현장과 달리 회사에서 직접 재용하였고, 노동자는 고용기간 동안 매달 정기적으로 임금을 받았고, 야근하고 휴일근무하면 추가수당을 받았다.

“이번에 리비아 가시면 얼마나 계실 작정이세요?”

“모르지, 기본이 1년이지만 1년만 하고 귀국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당시 회사 직원은 기본 근무기간이 2년이었다. 6개월에 3주 유급휴가를 받고 휴가기간은 근무에서 제외하니 최소한 근무하면 2년 반은 해외생활을 해야 했지만 보통 3년을 채웠다. 회사에서 고용하는 노동자는 기본이 1년인데, 1년을 근무하면 회사에서 편도 항공권만을 지원했다. 1년을 일하고 국내휴가를 가려면 해외현장으로 복귀하는 항공료는 본인이 부담해야 했다. 항공료를 스스로 부담하면서 1년마다 휴가가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2년 근무하고 고용을 연장한다면 왕복항공권을 받을 수 있었다. 단 휴가기간은 무급이었던 것으로 안다.

나는 지사에 있고 반장님은 현장에서 일하니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어느 현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봤다. 처음 배정받은 현장의 일이 끝나 새 현장으로 옮겨 일한다고 하셨다. 리비아에 있는 동안 어쩌다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이 리비아에 얼마나 계셨는지 모른다. 딸이 대학에 가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간 후 이었을까?

그후 해외 출장가면서 생긴 일이다. 공항 환전소에서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 출신으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가 달러로 환전을 하고 있었다. 은행원이 원화가 부족하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안주머니 지갑에서 원화 동전 몇 개를 꺼내 놓았다. 아마 자식에게 선물로 주려 간직했는지 새 동전이었다. 고개를 내밀어 슬쩍 보니 내게 그만한 잔돈이 있었다. 내가 은행원에게 동전을 내밀었다. “이걸로 해주세요.”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100달러짜리 지폐를 세어 그 외국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사장님 고맙습니다.” 라고 나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출국장으로 향했다. 

리비아 사무실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에 의하면 해외취업 알선 수수료가 비싸서 1년 일하면 수수료 갚고 남는게 없었다. 방글라데시 등 서남아 노동자들이 건설현장에 무척 많았는데, 인구가 많았고 일자리가 없으니 수수료를 빌어 해외취업을 하였고 빚갚고 돈벌기 위해 장기간 해외근무를 하였다. 아마 그 외국인도 몇 년만에 귀국하는 것이리라. 그의 자연스런 우리말 어투와 억양이 긴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당시는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이라 비싼 해외전화요금 때문에 가족과 통화도 자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끔한 복장과 든든한 달러 지폐로 지난 몇 년간 가장의 부재를 만회할 수 있기를, 가족과 같이 오랫동안 행복하길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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