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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Nov 01. 2023

유세프

리비아에서 같이 일한 팔레스타인 동료

유세프 (가명입니다)는 영업부서 현지채용 직원이었다. 그는 리비아에 사는 팔레스타인이었고,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나라에서 기독교인이었다. 집안간의 중매로 대부분이 20대에 결혼하는 사회에서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미혼이었다. 리비아는 과거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지배할 때 유럽인들이 들어왔고, 사하라 이남의 흑인들이 이주하여 구성이 다양했지만 다수는 약간 진한 피부색의 전형적인 아랍인이었다. 서구 유럽인처럼 피부가 밝은 편이고 키가 큰 그는 리비아인 사이에 눈에 쉽게 뜨였다. 그는 안경을 썼고 앞머리 숱이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했으며 겅중겅중하며 걸었다. 마치 나이먹은 미국 배우 헨리 폰다가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는 오래 된 피아트 자동차를 몰고 다녔는데 머플러가 고장나 운행하면 부릉부릉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우리 사무실은 2층에 있었는데 그의 자리는 사무실 가운데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칸막이가 있는 응접실이 있었고, 왼쪽에는 차를 끓이고 다과를 준비하는 탕비실 겸 복사실이 있었다. 탕비실에는 태국인 티보이가 있어 손님이나 직원에게 차를 서비스하고 문서를 복사하고 편철했다. 응접실 바로 앞에 타이핑을 하는 마리암의 책상이 있었고, 그 뒤에 직원들이 직급 서열에 맞춰 앞뒤로 나란히 앉았다. 탕비실 앞쪽에도 책상이 있었는데 중간에 유세프와 다른 번역사인 칼레드 자리가 있었다. 나는 유세프 뒤에 앉았다. 사무실 맨 안쪽 창가에 기다란 회의용 탁자와 부서장 책상이 있었다. 부장은 직원들 책상 사이를 지나 자신의 자리로 갔다. 

유세프는 아랍어와 영어를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책상위 서류함에 놓인 서류 중 “Urgent”라고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문서를 필두로 번역 작업을 하였다. 직원이 영문으로 만들어 놓은 문서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타이피스트인 마리암에게 넘겼고, 발주처에서 받은 아랍어 문서는 A4 용지에 영어로 번역하여 담당 직원에게 전달하였다. 영문 서류는 직원이 직접 타이핑하여 문서로 만들거나 보고하였다. 아랍어 문서는 마리암이 타자 작업을 하였고 유세프가 감수하였다. 마리암은 20대 초반의 리비아 여성이었는데 신혼이었고 돌이 안된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근태가 일정치 않았다. 지각이 잦았고 애를 핑계로 출근하지 않기 일쑤였다. 급하게 문서 작업을 해야 할 경우에는 내가 차를 몰고 마리암 집에 가서 사무실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리암이 없으면 유세프가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까지 하였다. 아랍어도 표음문자이니 타자로 문서작업을 하였다.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므로 타자기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아랍어 숫자는 문자와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양식이 정해져 숫자만 기입해도 되는 문서는 유세프나 담당직원이 직접 처리하였다. 번역사로 칼레드도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현직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오후에만 출근했다. 2시에 출근하여 5시에 퇴근하는 파트타이머이었다. 칼레드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할 일이 없다며 중간에 집에 가는 일도 있었다. 부장이 칼레드도 일을 시키라고 해서 신문 번역을 맡겼으나 이내 흐지부지되었다. 우선 필체가 엉망이었다. 그날 신문의 주요 기사를 영문으로 요약해서 달라고 했는데 내용이 빈약했고 글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매일 신문기사 내용이 비슷했다. 가다피 장기집권으로 인한 언론통제 영향이었을 것이다. 영문 번역본을 가지고 칼레드 옆에 앉아서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마리암도 칼레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면서 선호하지 않았다. 유세프가 번역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유세프는 다른 현지 채용 직원과 달리 소위 말하는 빽이 있지 않았고, 그의 통번역 실력은 회사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다른 직원과 달리 출퇴근 시각을 잘 지키는 근태가 분명한 직원이었다. 발주처 사람을 만나고 대관업무를 하는 현지직원도 있었다. 유세프는 리비아 관공서 인사를 만나고 업무를 처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젊어서 레바논에서 리비아 벤가지로 이주하였다 한다. 그는 부모와 같이 살고 있었고 부친은 경험이 많은 건설 기술자였다. 당시 연세가 꽤 되었는데도 건설 공사 물량계산을 했고 일감이 끊기지 않는다고 유세프가 자랑했다. 당시 리비아를 이끌던 가다피 지도자 (1969년 27세 육군중위로 복무중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며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공식직책 대신 ‘위대한 지도자’ 또는 ‘대령 가다피’로 호칭함.)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권을 옹호한다고 했다. 거리 도처에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플랑카드가 많이 걸려 있었다. 유세프는 정치적인 수사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느 날 그가 토플 수험서를 펼쳐 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유세프, 토플 공부하세요?” 라고 물어보았다. 그의 동생이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데 토플 성적을 잘 받아 캐나다에 MBA 유학가고 싶다고 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이 목표였다.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달러도 모아야 하고 토플 성적도 좋아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니라고 걱정했다. 당시 리비아는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었다. 국제선 항공이 리비아 국내로 오고 갈 수 없었고 석유시추 장비도 수입금지 대상이었다. 산유국인 리비아에서 석유수출이 제한되자 많은 경제문제가 발생했다. 그 중 하나가 현지화의 가치 하락이었다. 리비아 화폐는 디나르(Dinar) 인데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이 10배가 차이 났다. 내가 한국에서 100달러를 가져가면 공식환율로는 35디나르 정도이지만, 암시장에 가면 350디나르를 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현지 디나르로 급여를 받는 현지인은 달러로 환산하면 급여가 1/10로 줄어드는 샘이다. 유세프 같이 외국인이 해외 여행을 하고자 하더라도 공식환율로 달러 환전이 제한적이었고, 암시장에서 달러를 사면 몇 푼 되지 않으니 해외유학의 꿈은 쉽지 안았을 것이다.

나는 3년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리비아에서 받은 급여로 전세자금을 마련하고 장가를 갔다. 해외 근무가 목돈 마련에 도움이 되었다. 귀국 후 몇 년 뒤 유세프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다.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 시기에 정파 간에 내전이 발생하였고 대령 가다피는 시민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이후 리비아는 동부와 서부 2 지역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최근 리비아 벤가지의 동쪽에 있는 도시 데르나에서 홍수로 댐이 무너져 약 2만명이 다치거나 실종, 사망하였다고 한다. 댐을 유지 보수하고 홍수 주의보를 발령해야 할 정부가 없었다. 나도 그도 해외노동자로서 리비아에서 일했다. 나는 돌아올 나라가 있고 그는 모국 팔레스타인 아닌 더 나은 삶이 가능한 나라로 이주하고자 했었다. 그가 원했던 캐나다로 MBA 유학을 떠났을까? 리비아에 남아 있다면 2011년 이후 지속되는 내전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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