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날씨의 아이'를 보고.

'삶'과 '세계'의 얽힘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길 바라며

by 김동준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으로 '너의 이름은' 이후에 나온 작품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보단, 전작과의 비교로 인하여 별로라는 사람들의 핀잔을 많이 들은 영화다. 하지만, 나는 '날씨의 아이'가 좋다!


이 영화는 일본의 샤머니즘과 선불교적 가르침을 통하여 삶의 역설과 얽힘을 그려낸다. 그렇기에 이전의 것을 다 포괄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적인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영화의 결말과 메시지는 처음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 나와 있다. 거의 1초 정도 보이는 장면이다.


스쳐 지나가는 책 제목 하나. 빛을 따라서 자신이 살던 섬을 벗어나 도쿄로 넘어온 '호다카'가 읽고 있었던 J.D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대부분 읽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 대부분 읽었기에 내용은 기억나지만 그때 읽었던 감동과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라 확신한다. 부족한 필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해방'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사실 우리는 지옥 같은 삶 가운데 역겹기도 하고 무서운 타자를 만나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일상 가운데도 탈출구의 역할을 하는 '타자'가 있다. 이러한 일상과 '거리두기'를 만들어 주는 사랑스러운 '타자'. 역겹지 않은 순수한 타자, 내가 살아야 하고, 지켜야 할 사명이 생기는 타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해방, '삶' 가운데 '구원'을 느낄 수 있다고 샐린져는 말한다.


이 소설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 영화를 보는 가운데 휘몰아쳤다. 소설의 주인공인 콜필드와 영화의 주인공인 호다카는 참 비슷하다. 호다카도 콜필드와 같이 세상의 역겨움을 보고 살아간다. 집을 나왔다는 핑계로 집을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들을 생각도 없이 문제아 낙인을 찍는 '사회'. 어머니 아버지가 없어도 잘 살아가는 날씨의 아이인 히나의 가족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아동복지사'. 경찰들의 잘못임에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지키기 위해 챙기던 순수한 동심인 '총', 하늘로 가버린 '히나'를 찾기 위해 달리는 호다카를 비웃는 사람들.


호다카가 느끼기에 이 사회는 너무 역겨울 뿐이다. 이러한 역겨운 상황 가운데도 그는 '절실함'을 가지고 달렸건만. '사회'는 '개인'의 절실함을 배제시켜 버리고 히나와 호다카를 떨어지게 만든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사람이 쌓았던 모든 것들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돌아간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호다카는 사회에 대한 반감은 사라진 채로 침묵 속에 살아간다. 사회가 자신을 궁지로 몰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가 자신을 틀렸다고 말하고, 문제아로 낙인을 찍고, 보호감찰을 붙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호다카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모두가 고통받게 되었고 변화되었다고 좌절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 신카이는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도쿄는 원래 바다였단다"


그런데 이 위로는 영화의 호다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위로로 느껴졌다. 내 눈으로 볼 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미쳐있었고, 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얽힘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 공격한다. 이러한 역겨운 삶 가운데 '타자'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자'같다. 하지만 '타자'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신카이 마코토는 얘기하고 있다. '타자'를 만나지 못하고, 역겨워하기만 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이 죽는다고 말이다.


더하여 신카이 마코토는 인간의 편안함을 위해 계속해서 발전했던 문명이, 이제는 인간을 재단하고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변해버린 사회의 모습 가운데 '송구스러움'을 느끼는 호다카의 모습 가운데 원래 바다였던 도쿄를 상기시키며 발전만을 바라보았던 주변을 바라보지 못한 인간의 한계와 자가당착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 있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기에 문명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절규를 외치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속에서 불이 타고 화가 난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 날씨의 아이가 주는 울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문명은 여전히 문명이다. 그 문명을 바라보는 그대의 '마음'과 '눈', 즉, 인간의 '내면'이 노예가 되었는지, 주인이 되었는지, 아님 자유인이 되었는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꿈인 콜필드가 결국 깨달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던 호다카가 히나를 만나자 말자 그녀와 포옹을 하며 "우리는 분명 괜찮을 거야"라고 소리 질렀던 것처럼. 그대와 나의 삶이 이러한 삶이기를 바란다. '일상' 가운데 기적을 경험하고, '영원'의 '찰나'를 음미하길 바란다.


지금 느끼는 그 감정을 충실히 맛보며 음미하며,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괜찮아. 맑은 날씨를 두 번 다시 못 봐도 괜찮아 나는 푸른 하늘보다 히나가 소중해 이 날씨는 계속 미쳐있어도 돼”라고 외칠 수 있는 소중한 타자를 '일상' 속에서 만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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