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너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을 통하여.
<칼 라너>
라너는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의 5 과정을 시작하며 “인간은 자기 본질을 역사 안에서 실현한다.”라고 외친다. 그는 ‘신앙’에 대한 ‘역사성’을 논하면서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통해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역사 안에서 찾으며,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그렇기에 ‘삶’, ‘역사’가 자체가 구원과 계시를 보여준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삶’과 ‘역사’는 단순히 머리로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 ‘앎’의 차원의 언어가 아니다. 하느님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롭게 답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라너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성’과 ‘관계성’에 연관이 되어있다. 그렇기에 니체가 사용하였던 ‘공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집단’이 좋아하는 너머의 곳을 바라는 비겁한 자세를 라너는 취하고 있지 않다.
라너에게 있어서 ‘구원’과 ‘계시’는 모두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는 ‘구원’과 ‘계시’의 ‘역사’와 공존하고 연결성을 가진다. 물론 모든 ‘역사’가 ‘구원’과 ‘계시’를 포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구원’과 ‘계시’가 ‘역사’ 속에서 자신을 열어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과 ‘계시’가 열어 밝히는 것이 단순히 ‘집단’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계시’에 대해 마음을 닫지 않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계시에 대해 ‘신앙’할 때 ‘구원’ 또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라너의 책에서 ‘역사’와 ‘구원’과 ‘계시’는 끊임없는 대화 가운데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복잡하고, 신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계시’는 단순히 ‘앎’의 차원에서 논의될 개념이 아니다. ‘계시’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해석’이 들어가기에 '앎' 그 이상의 '신비로움'이 숨겨져 있다. 그 신비로운 ‘자기 해석’은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성과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일차원적으로 ‘자기 해석’을 해석하는 작업을 ‘삶’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론 인간의 ‘자기 해석’을 통한 '삶'은 하느님 자신에 의해 구성된 현실의 '자기 해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에 의한 자기 해석을 통해서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역동적인 ‘보편성’ 안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라너는 ‘보편성’에 대해 말한다.
‘보편성’에 대해서 라너는 ‘계시’가 과연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결국 라너는 “많은 종교사 가운데서 이 하나의 구원과 계시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으로 통일적인 구조 및 정확한 전개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 종교는 ‘보편성’을 논하고, 주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성서 이전의 세계를 말할 수도 없고, 이후에 흘러간 ‘역사’에 대해서 ‘보편성’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성서 이야기를 떠나서, 지금 당장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너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사건’을 ‘인간’이 ‘초월’을 소유하고 있을 때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초월’을 소유하는 ‘신비’ 가운데 있음을 주장한다. 즉, ‘삶’ 자체가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너의 이 주장이 이러한 초월적인 역사와 보편적인 역사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역사와 초월적인 역사 가운데 ‘통일성’을 찾기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라너의 주장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이외의 사람이 들었을 때에는 ‘그리스도 사건’에 멈추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기에 보편적인 논의를 한다고는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기 양여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신비’를 가지고 있는 인간, 초월 가운데 있는 인간이라고 주장함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성과 한계성을 넘어설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은 모두에게 참 가치 있는 ‘깨달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은 자기 양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과 관계하였다.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역사 속에서만 가질 수 있다. 이 역사라는 지평을 ‘삶’ 가운데서 깨달은 순간 ‘인간’은 ‘한계성’을 넘기 위해 발버둥 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반성과 넘어서려는 노력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의 ‘삶’은 ‘초월’의 역사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괜스레 과거 어느 날 비 굉장히 많이 내렸던 것이 생각난다. 왠지 그 ‘빗소리’ 속에서 ‘인간’이라는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계속해서 변화하는 존재인지 생각하였다. ‘삶’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만 여전히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생각 가운데 라너가 말하는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하며 세계와 함께 하는 하느님, 자기 자신을 역사 안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삶’ 가운데 ‘인간’과 함께 하는 하느님, 인간과 ‘대화’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비’와 ‘경외감’이 생겨난다. 괜스레 생각나 계속해서 듣고 있는 유재하의 노래 가사를 나누며 글을 마무리한다.
<유재하 앨범 커버>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어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어진 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