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이지 않은 ‘삶’

종교 없는 세상에서 종교 말하기 <니시타니 게이지의 "종교란 무엇인가">

by 김동준

‘선(禪)’은 ‘깨달음’이다. '선(禪)'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살피고자 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특징이다.


시대를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은 우리는 점점 논리적으로 변해갔다. 학교를 다닐 때 한 교수님께서 한 말이 기억난다. [과거의 학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보다 여러분들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얘기를 듣고 자신감에 차올라 과거 사람들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는 착각에 살았다. 역시나 과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논리적이지 못한,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나였다.


하여튼! 과거와 비교해 지금은 보편적으로 '논리적'인 세상 가운데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현재 ‘비논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대의 것이고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기에 '비논리적'인 것을 어떻게든 수정하고자 한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허무’가 들어왔다. 논리를 맞추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고, '사람됨'을 포기하며, 서로를 공격한다. 이 상황이 '허무'다. 이 세상은 여전히 ‘허무’에서 발버둥 치고, ‘허무’로 회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세상 속 ‘선(禪)’은 머리 굴리기를 멈춰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언어’라고 함은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이제껏 말했던 ‘언어’는 ‘앎’의 차원에서만 진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무지’를 전제해 둔 앎이 아니라, ‘주체’인 인간의 머리에 들어있는 '지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기계적 인간, 폭력적 인간이 세상에 등장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말이다.


이러한 세상 속 처음 선사들의 글을 읽으면 이러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뭐가 대단해서 이렇게 말하지? 이 사람들은 인간 ‘이성’의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 속 어느 날 문득 나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던 순간. 잡고 있던 펜을 던지면서 모르겠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흐릿한 자유가 느껴졌다. 그 순간 든 생각은 내가 그렇게 요구하는 '구조'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 습득 행위 자체가 ‘집착’이었고, 사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무지’를 포괄하지 못한 과거의 모습이구나라는 것을 말이다.


이들의 글은 ‘체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이라는 장소에서 나타나는 ‘깨달음’은 그저 머리를 굴린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는 것을 탈체적으로 느끼게 된다(233).


이 느낌을 통해서 우리는 순간순간 시간에 있으며 시간밖에 있음을 느낀다. 이 안에서 우리는 절대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이제껏 철학의 방향은 ‘주체’의 힘을 어떻게 줄 것인가. 어떠한 업적을 만들고, 체계, 구조를 쌓을 것인가라는 고민 가운데서 성장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러한 체계와 구조, 업적, ‘주체’의 힘을 버리고 우리는 그저 살아가야 한다. ‘무’ 위에 깔려있는 자신을 ‘공’의 장에서 봐야 한다. ‘무’ 위에 있는 사물을 ‘공’의 장에서 봐야 한다. ‘무의미’라는 단어를 통해서 현실을 비판하고, 거기에 목을 매다는 철학이 넘쳐난다. 나는 그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수많은 글은 읽지만, 그들의 논리성에 경탄하지만, 그보다 더 큰 ‘생명’의 ‘신비’ 가운데 순응하며 ‘공’의 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자 ‘삶’이지 않은가. ‘무의미’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또한 종교가 이 세상 가운데 살아 있을 수 있는 길임을 생각하며.


image.png 니시타니 게이이치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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