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가운데 만나는 ‘타자’(1)

- ‘지옥’ 같은 ‘앎’을 넘어 ‘무한’인 ‘의미’로-

by 김동준

1. 서론 : ‘앎’의 폭력

J.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보면 ‘홀든 콜필드’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콜필드는 전쟁 후 미국 사회에 살고 있다. 이중 잣대가 뚜렷한 사회에서 주인공은 비틀거리고 역겨움을 느낀다. 명백한 악의 대상을 삼고 승전국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이 정당하고, 지금의 사회는 건강하다는 헤게모니가 넘쳐난다. 이러한 몇몇의 사람들이 재단해 놓은 사회에 그와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문제아로 낙인을 찍히게 된다. 선생의 말을 듣지 않던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던지, 퇴학을 당하던지, 사회는 건강하고 어른들은 건강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주인공을 옥죄고 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자’와의 만남 가운데 책임감을 진다기보다, 사회의 무의식 가운데 ‘타자’를 억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가식적인 단면을 퇴학을 당한 콜필드는 전부 체험한다. 춥디 추운 뉴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의감을 느낀다.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관계로 ‘문제아’ 취급을 한다. 자신의 친구들은 어차피 퇴학을 당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일을 미룬다. 그리고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드러낼수록 주인공은 숨 막히는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소설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 결국 그는 뉴욕을 떠나려고 한다.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자신이 너무 싫고, 더러운 것이 묻는 것이 싫어서 도망가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기대하며 서부로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동생인 피비가 눈에 밟히고 그녀의 순수한 모습을 통해서 그는 떠나지 아니하고 어른들의 세상에 살아간다. ‘피비’의 순수한 모습 가운데, 그에게 무한함으로 다가오는 여동생을 통해서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모든 것들을 더러운 것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세계를 찾으려고 했던 ‘홀든 콜필드’는 ‘타자’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그는 불어오는 자유 감에 휩싸여서 비를 흠뻑 맞아도 바보같이 웃으며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타자’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아니, 그저 있었던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선’을 열어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다가옴을 통해서, 그 얼굴의 ‘의미’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바로 ‘타자’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해서 작금의 한국 사회를 레비나스의 사유로 따라가려 한다.


작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은 ‘타자’는 지배와 억압의 대상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엇인가에 갇혀서 모두를 판단하고, 옭아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의 이유를 찾으려면 수없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온 한국의 무의식에 대해서 파헤쳐야 한다. 다양한 무의식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교 문화와 샤머니즘 문화가 합쳐진 ‘가족주의’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무의식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타자'들. '가족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타자'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거환경에 자신의 활동 반경에 들어온 침입자로만 생각하며 그들이 이러한 사람이라는 ‘앎’의 방식으로만 바라보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받아들이는 우리가 보는 눈을 바꾼다면, 아니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꾼다면, 그들이 주는 ‘명령’에 아무 말 없이 순종할 때 변화를 모두가 느껴본다면이라는 푸념 섞인 소리를 가지고 본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2-1. ‘타자’는 나를 만들어 낸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는 단순히 나와 함께 사는 부딪히는 사람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이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보면, 하이데거가 ‘존재자에서 존재로’라는 슬로건을 내밀고 철학을 했다면,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의견을 그려나감을 제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존재’를 엄폐하는 무엇이다. 하지만,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는 무엇이다. 그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존재자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이다. ‘현존재’의 시작은 ‘죽음’을 마주 보는 것이고, ‘죽음’으로부터 몰려오는 불안과 염려를 통하여서 ‘현존재’로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는 찾아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후기 하이데거 사상으로 가면 ‘기다림’으로 바뀌긴 하지만 말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상과는 비슷하면서 다른 길을 걸어간다. 그가 수용소에서 썼던 첫 작품인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해서 그는 필립 네모와의 대화집인 『윤리와 무한』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저 있음’과 아주 비슷한 경험들 가운데 불면증을 들었다. 불면증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때 ‘나’가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다. 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함은 나의 주관과는 동떨어진 ‘객체’ 차원이다. 그러한 비인 격성이 나의 의식을 빨아들인다. 그리하여 의식이 비인격화된다.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깨어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하지만 아마도 ‘음악이 다 끝난’ 절대 부정 이리라, 그러나 ‘그저 있는’ 이 두려운 ‘경험’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음악을 멈출 수’도 없는 총체적 불가능성을 본다.”


그는 ‘그저 있음’을 ‘il y a'라고 한다. ‘il y a'라고 하는 것은 창조되기 전에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철학은 주체를 어떻게든 세우려고 했다. 모든 것들을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와서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의하면서 ’ 주체‘의 힘을 끝까지 키웠다. 하지만 그들이 키워오고 하였던 ’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있음‘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들만 만족해하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마치 작금의 한국의 대부분 사람들과 같이 말이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말한다. 자신은 ’ 주체‘라고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남들을 억압하고, 남들을 핍박하며, 자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유를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성은 전혀 없으면서 자신이 ‘주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대한 비판이다. 즉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전혀 없이 아무렇지 않게 깨어 있는 이들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지도자가 자신보다 물리적 위치상 높은 곳에서 말하는 것을 순종하며 사유하지 않고 그저 습득만 하여 남들을 비판하고, 억압하고 하는 모습을 보아 제대로 된 ‘존재자’의 모습을 가지지 않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서 많이 의미를 부여했다면, 그는 ‘존재자’에 대해서 많은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글을 읽어보자.


“우리는 이 있음의 개념을 어떤 ‘존재자’로부터, 즉 외재적 사물이나 내재적 세계로부터 빌려오지 않는다. 확실히 있음은 외재성만큼이나 내재성도 초월한다. 심지어 이 개념은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는다. 존재의 익명적 흐름은 주체, 인격 또는 사물 등 모두를 침략하고 침몰시킨다.”


그가 볼 때에 하이데거의 ‘존재’는 ‘자아’의 것이고, ‘관계’만 가능한 무엇이다. 분명 ‘현존재’로부터 알 수 있는 ‘있음’이라는 명사의 근원적인 동사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지평인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il y a'와 같이 창조되기 전에 있는 무엇과도 같은 것인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 존재‘에 대한 개념을 ’ 무‘로 따로 축출시킴으로 ’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러한 담론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레비나스는 말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 주체성‘이 진정으로 형성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주체라는 ‘존재자’는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타자’를 계속해서 자신의 것에 소급시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자기 자신과 친숙한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에게 얽매이게 된다. 그 이유는 ‘존재자’로서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주체’가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한 ‘무엇’이 항상 자신을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저 있음’의 상황 속에서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가 자신의 삶 가운데 흐르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에서 나오는 무거움을 통해서 동일화하는 ‘주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주체’는 ‘타자’를 만나게 된다. 레비나스의 글을 읽어보자.


“홀로 있는 자아에게 타인은 공감을 통해, 즉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를 통해 인식하게 되는 다른 자아, 타아이다.”


즉, 한계를 느끼기 전까지의 ‘주체’는 모든 것을 ‘현재’라는 시간에 묶으며, 동일화시키고 있다. '삶‘을 산다고 하기보단, 자신만의 ’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 한계‘가 찾아온다. 그 한계 자체가 ’ 타자‘인 것이다. 이러한 ’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주체’는 자신의 입장에 환멸을 느끼고, 무거움을 느끼는 순간 이어서 그는 ‘시간’ 안에 속해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 가운데 ‘자아’의 폭력적인 모습을 마주 보게 된다. 이제껏 자신의 ‘시간’의 지배자이고, 남들을 지배하고, 정의하고 하던 재판관 같은 폭력의 모습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시간’이라는 지평에 같이 있는 ‘타자’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타자’의 모습을 통해서 ‘주체’의 오만방자함은 깨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체’의 모습을 버리고, ‘주객 관계’의 모습을 버리고, ‘자타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전까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던 ‘주체’가 나와 같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타자’를 만남으로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 순간’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의 상황은 그러지 못하다. ‘타자’는 적이고, ‘불편함’ 그 자체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삶 가운데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타자’의 탓을 한다. 그들과의 만남 가운데 불어오는 ‘의미’를 찾지 아니하고, ‘앎’의 폭력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이 누구 인지를 알게 해 준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저 있음’의 폭력으로 넘쳐 있는 삶 가운데 우리는 ‘타자’의 만남을 통해서 ‘자아’를 알게 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너머에 있는 ‘누가’가 아니라 ‘자아’ 자신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존재자’라는 것을 레비나스는 말한다.


참고문헌

1) J.D. 샐린져, 호밀밭의 파수꾼, 이덕형, 문예출판사, 1998.

2)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다산글방, 2005.

3) 엠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민음사, 2003.

4) 엠마누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그린비, 2018.

5)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6) 성신형, 틸리히와 레비나스의 윤리적 대화, 한들출판사, 2018.

7) 엠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김연숙 박한표, 인간사랑, 2010.


괜히 글을 마무리 하며, 한때 나를 촉촉하게 만들었던 노래를 공유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5gvofiXHb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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