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 같은 ‘앎’을 넘어 ‘무한’인 ‘의미’로-
2-2. ‘타자’와 나는 ‘몸’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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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 ‘타자’라는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와서 ‘신’의 자리에 놓기도 하는 몰상식한 몇몇의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몸’으로 만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글을 읽어보자.
“나는 신체로서 실존한다. 다시 말해 상승된 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그 결과 스스로를 내가 의존하는 세계 속에,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목적들 앞에 위치시킬 수 있는 기관으로서 실존한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신체에게 모든 것은 이미 성취된 것, 이미 행해진 것이 아니다. 이렇듯 신체가 있다는 것은 행해진 것들 가운데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고, 타자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내가 된다는 것이다.”
‘타자’와 ‘자기’의 만남은 육체적인 만남인 것이다. 이전 서구의 형이상학은 ‘삶’을 얘기하지 않았다. ‘앎’만을 얘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정신’에 대해서만 말을 했다. 이러한 철학의 분위기로 서구에는 무시무시한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 바로 ‘전체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을 통해서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전쟁은 외재성을 보여 주지 않으며, 타자로서의 타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전쟁은 동일자의 정체성을 파괴한다.”라고 레비나스는 말하며, 전쟁을 통한 이전 서구의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나아간다. ‘현전의 형이상학’, 소위 말하는 ‘근대 철학’, ‘주체 철학’들은 ‘만남’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에서 세계를 분리해 내었다. 자신의 머리를 통해서 남들을 판단하면서 나아갔다. 분명 철학을 함에 있어서 몇몇의 인물들을 통하여 ‘한계’를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모든 세계를 만들어 갔고, 더하여서는 신까지 창조해내고 있었다.
신까지 ‘창조’를 해내는 근대철학 앞에서 전쟁은 시작되었고,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남’과 ‘대면’이 이루어지는 철학이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는 “우리는 숨 쉬기 위해 숨 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책한다. 이 모든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삶이다. 삶은 하나의 솔직성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려는 ‘향유’의 개념과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철학은 저 너머의 것에 대한 고도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껏 근대와 자신이 나타나기 이전의 철학들은 모든 것들은 가장 기초적인 것들이 이론들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런 것들 위에, 이러한 삶 위에 철학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내가 버는 삶은 벌거벗은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먹을거리의 삶이다. 삶에 몰두케 할 뿐만 아니라 삶을 ‘차지하고’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은 여기의 이 내용들이다. 삶은 이 내용들의 향유다.”
철학의 가장 기본 되는 것은 서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한 근원을 찾고 그러한 이유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작금의 한국의 상황도 그렇다고 볼 수가 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것 자체도 막고 있다. ‘가족주의’이라는 이름하에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체성’이 우리를 계속해서 죽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에 대한 질서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성’은 ‘죽음’이 왔음에 모든 것이 끝이 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혈안이 되어서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무한’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말하는 것이다. ‘몸’으로 만드는 ‘타자’들에게서 오는 ‘무한’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익명적이고 무의미한 현존이 아닌, 구체적인 현존,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호소로서 다가오는 타자와 관계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타자의 ‘얼굴’은 ‘전체성’을 가지고 있는 ‘주체’의 모든 것들을 깨뜨리고 우리의 ‘삶’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얼굴’은 ‘주체’에게 포함되는 것을 거부한다. 얼굴은 제대로 ‘파악’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얼굴’은 ‘앎’에 대한 산물이 아닌, ‘몸’으로부터 오는 ‘삶’에 대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을 했듯 ‘몸’의 먹고, 마시고, 즐긴다. 이러한 가운데 ‘타자’의 ‘얼굴’은 명확하고 확실한 사실 그 자체다. 가장 명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명령’ 그 자체고, ‘무한’ 그 자체이다. 이러한 ‘얼굴’을 바라봄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면서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된다. 이러한 ‘얼굴’을 바라보는 방법을 아는 사회가 필요하다. 단순히 ‘얼굴’을 앎이 대상이 아닌 자기에게 불어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2-3. ‘타자’에 대한 ‘책임’
레비나스의 철학을 음미하면 ‘타자’에 대한 반복적인 주장을 통해서 결국에는 ‘주체성’에 대해서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많은 이들이 우려를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철학은 ‘주체성’에 대한 ‘옹호’이다. 레비나스가 다른 이의 존재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는 올바른 ‘주체’의 ‘주체성’을 논하기 위해서다. 주체는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호 가운데서 ‘주체’는 ‘타자’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원래의 것을 계속해서 말한다. 그중에 ‘주체’가 올바른 ‘주체성’을 챙길 수 있는 것은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을 가지기 전에 우리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대속’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대속’이라고 하는 것은 ‘타자’가 우리에게 ‘고아, 과부’로 보이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저서인 『존재와 다르게』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한다.
“우리들 각자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 앞에서 죄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는 더 죄인이다.”
'타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그러한 '앎'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한자'라고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자신의 일치성을 잊고 그저 '대속'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주체'는 '책임'으로 이어진다. 레비나스의 '책임'은 단순히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 이들에 대해서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상황과 상태 가운데서 사람들과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책임'은 비대칭적이다. 앞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용문같이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죄인이고, '타자'가 죄인이라도 내가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함께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불어오는 '대답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이렇게 밖에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 있어요.”라고 말이다. 이러한 고백은 내가 보고 있는 무엇에 대해서 확실한 '앎'의 사태가 아니다. 단지 '무한‘한 것을 바라본 '유한자'의 '무한'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이러한 책임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타자'가 주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부름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주체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내게 가까운 것은, 그가 가까운 공간에 있다거나 또는 부모처럼 가까워서가 아닌 것이고. 내가 그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다가선다는 면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가까움 가운데 계속해서 타자는 명령한다. 얼굴을 통해서 명령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책임까지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서 형성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을 대리한다고 까지 말을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자신의 책임에 있어서 자신의 주체가 계속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책임’을 통해서 자신을 제대로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3. 결론 : ‘삶’ 가운데 ‘무한’한 ‘의미’를 찾아
레비나스의 철학을 통하여서 폭력의 기저에 있는 ‘가족주의’를 희석하려는 작업을 하였다. ‘가족주의’는 참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가족을 더 좋은 길로, 더 좋은 방향으로 보내려고 하는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그로 인해서 ‘타자’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참히 살육의 현장에 침묵하기도 하고, 동승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종교로 치부됨이 참으로 가슴 아프고 속상해서 쓴 넋두리라 생각해 주길 간절 바란다. ‘절대자’의 이름, 고작 글자로 적힌 '사상'을 가지고 와서 ‘타자’를 억압하고, 때리고, 욕하고 하는 이러한 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 아픈지를 모르겠다.
이 텍스트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있는 ‘가족주의’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풀어쓴 글이다. 하지만, 현재 세계 또한 한국사회와 못지않게 자신들만의 ‘가족주의’를 세워나가고 있다. 모두들 자국민 우선주의로 노선을 바꾸고, 대수롭지 않게 돈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하에 약한 국가들을 짓밟고 있는 상황이 넘쳐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레비나스의 철학은 하나의 ‘과제’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음에 자신을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공부하고 난 뒤에 열심히 움직이는데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마주해서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 가장 기초적인 것은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자기가 씹던 빵을 타자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몸’을 생각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홀든 콜필드’가 몸으로 생각하다가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인 ‘피비’가 자신을 따라 자기 덩치만 한 여행가방을 가지고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던 순간, 그리고 순수한 그녀가 회전목마를 타고 있을 때, 쏟아지는 비 가운데 모두가 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 순간을 음미하고 웃으며 동생을 바라보던 그처럼 말이다. 그저 사랑하고, 그저 책임을 진다면, 그저 그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순간’ 순종하고 따라간다면 참되고 무한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참고문헌
1) J.D.샐린져, 호밀밭의 파수꾼, 이덕형, 문예출판사, 1998.
2)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다산글방, 2005.
3) 엠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민음사, 2003.
4) 엠마누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그린비, 2018.
5)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6) 성신형, 틸리히와 레비나스의 윤리적 대화, 한들출판사, 2018.
7) 엠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김연숙 박한표, 인간사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