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귀속 지위, 바꿀 수 있던 성취 지위
옆사람이 뭐든 자랑을 하면 듣기에 거북하고, 자랑하는 그 사람이 추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자랑하는 김에 한 턱 내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도 내 일 만큼 기뻐해주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와이프가 겪은 아이 엄마들의 모임에서의 경험과 내가 회사에서 겪은 경험에서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있어서 정리해 본다. 비슷하게 느낀 부분은 다음이다.
다들 쉽게 어디 동네 살았었는지는 이야기하는데,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를 대화 주제로 삼는 건 조심스러워진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단순히 어디 동네 출신이고, 어디 대학교가 나왔는지에 대한 팩트 수준의 이야기를 다루려는 건 아니다. 좋은 동네, 좋은 학벌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좁혀본다. 왜 부자 동네 출신인 건 자랑이 되고, 좋은 학벌은 자랑이 못 될까?
반대로 부자 동네 출신인 건 내가 태어나자마자 이미 정해진 것이라서 어떻게 할 수 없이 주어진 것인 반면, 좋은 대학교 입학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더 칭송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실상은 학벌 자랑에 비해서 부자 동네 출신 자랑이 말하기도, 듣기도 편하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세 가지 가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상황의 원인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것은 보통 상대적인 좋은 것이기 때문에 늘 소수만 가질 수 있다. 부자 동네는 태어나자마자 얻는 '귀속 지위'이고, 좋은 학벌은 '성취 지위'이다. 소수가 가진 좋은 것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귀속 지위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반면 성취 지위는 내가 노력해서 충분히 바뀔 가능성이 있었던 무엇이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을 부러워하는 게 차라리 내 마음이 덜 찔리지 않을까라는 가설이다. 부자 동네에서 태어난 사람을 보면 (재테크를 잘해서 이사 간 사람은 성취 지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논의 포인트가 아니다.) 그냥 부러워하거나 어릴 때는 부자가 아닌 부모를 탓하는 정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좋은 학벌을 대할 때 보면, 공부를 소홀히 한 본인 모습이 바로 떠오르기 때문에 불편해진다. 또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경쟁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승자이고 내가 패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는 씁쓸함도 느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부자 동네 자랑이 좋은 학벌 자랑보다 나은 것이다.
2. 좋은 학벌을 가졌지만 잘 나지 않은 사람을 한 명은 꼭 알고 있다
부자 동네 출신인 사람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건 별로 없다. 그냥 부자인 사실 그 하나만으로 우리의 평가는 모두 끝난다.
반면에 좋은 학벌인 사람에게는 흔히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생각보다 멍청하던데?"
"학벌 좋다고 무조건 일 잘하는 건 아니던데?"
부자 동네 출신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좋은 학벌인 사람에게도 그냥 '좋은 학벌임'이라는 그 사실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평가를 내리기가 쉽다.
이처럼 성취 지위는 귀속 지위보다 단단하지 못하고 주위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이렇다 보니 좋은 학벌 자랑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자 동네 출신인 사람보다 더 반박할 거리가 많은 느낌이 들고, 더 나아 보이지 않는다.
"학벌 좋다고 돈 잘 버는 것도 아니라서 저는 제 딸 공부 막 열심히 안 시키려고요."
3. 이미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는 돈이 되었으며, 성취의 가치를 낮게 보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
간단하게는 위의 엄마 말처럼 좋은 학벌이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아니므로, 좋은 학벌이 자랑 거리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학벌 자랑은, 자랑거리도 되지 못하는 걸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선진국 중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과거보다는 점점 계층 이동이 어려워져 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보면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안 해 본 남의 노력을 폄하하기가 참 쉽다.)
그런데 실상은 부자 동네 출신이, 좋은 학벌까지 겸비해서 둘 다 가져가는 경우가 많고 대물림해 주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점은 애 키우는 입장에서 좀 무서운 면도 있다.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