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논리적 가능성, 가능 세계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생소한 방향으로 업무 추진을 하고 싶어 하는 담당자 또는 나 스스로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화 상황이 벌어지는 게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 A님, 이거 이렇게 하고 싶은데,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 (하기 싫다. 음.) 할 수야 있죠, 근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하는 게 더 구현하기도 편하고 간단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원하시는 방향의 이러한 점도 같이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시간과 자원이 무한정으로 주어지기만 한다면 할 수야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한정적인 리소스를 가지고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하기에, 할 수야 있더라도 "하기 어렵다"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가능한데,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가능과 불가능에 쓰인 ‘가능’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말이 된다. 위의 대화에서 처럼 할 수야 있다고 이야기할 때, 철학 전공자는 금세 '논리적 가능성'과 '가능 세계'를 떠올린다. 해당 내용은 논리학이나 언어철학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간단히 개념을 풀어보자. 예를 들어 '돼지는 이족보행이 가능하다.'라는 명제 P를 살펴보자. 우리의 현실 세계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돼지는 사족보행만 가능한 동물이다. 만약 돼지가 사람처럼 두 발로 설 수 있다면, 그 동물을 우리는 "돼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 돼지는 이족보행이 불가능하므로, 저 위의 명제 P는 거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충분히 돼지가 두 발로 서서 다니는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와 무관하게, 그러한 세상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 세계에서라면 해당 명제 P는 참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상상으로 충분히 구성이 가능한 세계를 '가능 세계'라고 한다.(라고 이해하면 초보 수준에서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반면, 아무 세계나 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글쓴이 프리츠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살아 있지 않다)."라는 명제 Q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해당 세계를 참으로 만드는 가능 세계를 구성해 보자. 하지만 구성이 되지 않는다. 명제 Q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양자택일의 관계이지 둘 다 동시에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이처럼 '가능 세계'는 '논리적 가능성'이 전제되는 개념이다.
멀리 돌아왔다.
회사에서 "할 수야 있다."라고 할 때, 돼지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의미 수준의 가능 세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아야 하고, 현실적으로는 무한한 자원이 주어진다는 가정이 있을 때 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늘 자원은 한정적이다. 회사 업무 및 세상만사는, 제한된 조건 아래서 최적의 결과치를 이끌어 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현하는 데에 그 정수가 놓여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