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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츠 Feb 08. 2024

회사에서 성취를 이뤄도 마음이 헛헛한 이유

개념: 소외, 마르크스

회사 업무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가령 그 일의 주인이 분명해 보이는 특허를, 회사 업무를 하며 냈다고 치자. 그 특허권은 대개 그 사람이 아닌 회사의 소유가 되며, 특허 제안자는 적정량의 보상을 받고 마무리된다. 기본적으로 회사 인프라를 사용해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회사 업무는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이 그룹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A~Z를 모두 다 하기보다는 특정 영역에서 전문성을 보이며 일을 나눠서 하게 되는데 그렇게 나온 업무의 산출물을 보면, 내 것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PM을 했다면 조금 더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겠지만, 산출물을 통해 얻은 성과가 나의 성과로 곧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미 받은 월급이 그 성과에 대해 지불되는 값이리라.


보상을 받고 성과 평가를 받았으니 '내' 산물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여기서 이제 (주로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살펴보자.


내가 해낸 일로 인해서 보상을 받고 성과 평가를 잘 받더라도, 그래도 소외가 발생한다. 내가 만들어낸 산출물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고 회사의 자산(=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농사를 짓고 그 곡식을 추수하여 자기가 소비하는 경우에는 소외가 없거나 적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자가소비를 위한 생산은 잉여 생산을 낳지 못하고, 그에 따라 교환에 의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외'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가소비를 위한 생산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무언가를 달성했는데도 돈 이외에 나에게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면 그게 이러한 소외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다음 다뤄 볼 '소외'는 '워라밸'에 잘 녹아 있다. 소위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는 일과 일 이외를 명확히 분리하고 일을 최소한 덜 하면서 돈 버는 수단으로써 활용하며, 나의 행복은 일 이외의 진짜 '라이프'에서 찾겠다는 태도이다. 일을 하더라도 일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이번엔 노동의 산물이 아닌,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된 노동이라는 해석이다.


회사 일도 내가 하는 행동인데, 내가 내 행동으로부터 소외된다라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 분리될 산출물을 만들기 위한 노동은, 내가 '나'로서 내 행복과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사와의 계약 관계에 의해 내게 주어진 일을 대리 수행하는 구조로 바라본다면?


물론, 그러한 일을 대리 수행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일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체적으로 일하라는 이 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일하라."

"CEO라는 생각으로 일하라."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 개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노동을 비판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데 관심 없다. 그냥 회사 일 열심히 해도 마음이 어딘가 허한 이유가 무엇일지 쓰고자 했다. 자본주의 망하면, 우리 가족 못 먹여 살린다. 망할 일도 없어 보인다.


회사가 나를 따돌리는 것('소외') 같을 때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면 헛헛한 마음이 조금은 채워진다. 왜냐하면 글은 나의 글이요, 나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기 위해서 팔리기 위해서 쓴다면 또 노동이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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