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어촌은 정말 교육 소외지역일까요?
좋은 일 하시네요.
저는 올해로 9년째 농산어촌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도심으로 떠나지 않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자생할 방법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때에 따라 연결의 방법을 고민하지만, 보통 ‘교육’의 형태로 만남을 지속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100up 아카이브 페이지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멘토리의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말합니다. 저는 종종 이 말이 불편합니다. 농산어촌을 ‘교육소외’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배경에 있다고 느껴질 때 특히 그런 마음이 듭니다.
농산어촌은 정말
교육 소외지역일까요?
농산어촌에 사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지역의 아이들을 돕는 일’이라는 인식은 어디서 온 걸까요? 우리는 ‘교육’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농산어촌을 교육 소외지역이라 인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을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농산어촌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단체는 학습지원을 중심으로 대학에 가는 것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대입을 준비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것이죠.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측면에서는 확실히 농산어촌은 소외되어있습니다. 트렌디한 정보를 얻기도 어렵고, 전문 학원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에 필요한 지원입니다. 하지만, 대입이 교육의 전부는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멘토리는 농산어촌 각각의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심에서는 할 수 없는 우리 동네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청소년들은 지역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가지고 대입을 넘어서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동네에서
뭘 할 수 있어요?
청소년들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농산어촌의 청소년들이 중학생이 될 즈음부터 동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낮아집니다. 도시를 선망하고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 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멋지고, 예쁘고, 재미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숙제는 우리 동네에서 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경험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함께 찾아가는 것입니다.
멘토리가 만드는 교육의 핵심은 청소년들이 ‘우리 동네에서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라는 욕구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주제는 오랜 시간 논의가 되어온 주제이고 마을 교육, 대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만든 마을’ 속에서 청소년들의 의견이나 고민은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9년간 농산어촌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프로그램을 만들기 전에 당사자인 청소년들과 충분히 함께 고민했나요?’라는 질문을 했지만 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았습니다.
농산어촌이 다양한 교육의 장이 되려면, 주체인 청소년들이 동네에서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도록 하는 일이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멘토리의 교육프로그램은 농산어촌에서 만나는 청소년으로부터 시작하고 청소년으로 향합니다.
9년간 농산어촌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며 (1)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자질은 도시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량은 충분히 기를 수 있다는 것과 (2) 농산어촌에는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이 존재하고 지역 주민, 기업, 학교, 지자체가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관점을 학문적 지식 습득에서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습득하고 다시 실제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로 옮겨오면 도시의 청소년들보다 농산어촌의 청소년들에게 더 다양한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교육은 입시를 위한 것이라는 공식을 부수면 농촌에는 ‘교육소외’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리얼월드러닝’의 가능성이 남습니다.
청소년들과 대화하다 보면 ‘여행’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농산어촌에 살고 있는 청소년 역시 학교-학원-집이라는 반복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지리적 접근성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가진 강점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청소년들도 동네에 대해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고 여행하며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마을에 대한 정보 알아오기'라는 숙제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여행을 하기 위한 여행지를 조사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단순한 여행 계획을 넘어서 여행 기록을 남기기 위해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담아올지를 미리 기획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에 대한 조사를 이어갑니다. 청소년들이 지역의 이야기를 활용하려고 하는 마음만 생긴다면, 농산어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습니다. 강원도 영월, 충남 보령, 인천 강화의 청소년들이 마음먹고 시작한 '里모델링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강원도 영월 산골짜기에는 지역민들도 잘 모르는 ‘효자열녀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한집 건너 한집씩 효자열녀비를 받았을 정도로 효심이 깊은 고장이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장독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죠. 산골짜기 마을이라 임진왜란도 겪지 않아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장독에서 담은 장은 풍미가 깊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소포장 패키지를 디자인해서 어버이날 펀딩을 기획해봤습니다. 2021년에는 실제로 만나 볼 수 있어요.
충남 보령시의 청소년들은 소모적인 지역의 머드 축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지역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상품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게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사용하던 벼루를 발견했는데요. 보물로도 지정된 이 벼루는 보령시 남포면에서 3대에 걸쳐 제작되고 있습니다. 벼루의 쓰임새가 한정적이어서 어떻게 변신할지는 아직까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청소년들이 이 스토리를 어떻게 재해석할지 기대하고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관련해서 아이디어가 있는 분들의 연락은 환영입니다.
인천 강화군은 역사의 고장입니다. 수많은 항쟁 속에서 파생된 많은 유적들이 있는 곳이죠. 하지만 강화의 청소년들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이 역사의 고장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너무나 고루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청소년들이 강화군 전체의 브랜딩을 새롭게 하여, 젊은 세대들이 자연 속에서 힙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도시로의 기획을 진행 중입니다. 그 시작으로 ‘강화 갯벌 영화제’를 2019년 12월에 진행했어요. 강화가 가진 바다, 갯벌, 온천, 낙조, 이 네 가지 요소와 청소년들의 감각이 더해져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농산어촌에서 활동하며 알게 된 농산어촌의 강점은 ‘공동체’입니다. 가끔은 더 힘들어지는 순간도 있지만, ‘우리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힘이 향할 때는 도시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애들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지
한 번은 충남 보령시의 청소년들이 교통 편의시설에 대한 불편함을 제안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도로를 점유하고 시설물을 세워야 했습니다. 행정적인 절차를 밟으려면 6개월도 더 걸리는 일이었지만, 청소년들의 프로젝트에 동의해주신 운수회사 관계자분들과 시장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셔서 택시 승강장과 왕복 4차선 도로를 청소년 마음대로 활용하여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 강화군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지역 조사를 해야 했는데 마땅한 교통편이 존재하지 않아 이동에 어려움을 겪은 적인 있는데,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이장님들이 동참해 주셔서 경운기와 트랙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터넷으로는 알 수 없는 동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농산어촌의 플러스 요인은 청소년들이 움직일 때 마을 전체가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같은 지향을 갖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역 주민, 기업, 학교, 지자체는 농산어촌 청소년들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습니다. 농산어촌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만드는 공간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쥐불놀이를 하는 농산어촌의 청소년은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가재 잡고, 쥐불놀이를 활용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가능합니다. 농산어촌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장점은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합니다. 농산어촌에는 전통과 역사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와 이야기까지 가공되지 않은 재미있는 도구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습니다. 멘토리는 ‘농산어촌의 다음세대가 만드는 새로운 농산어촌 다움’과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글. 멘토리 이사장 권기효
편집. 씨프로그램 러닝펀드 매니저 문숙희
러닝랩 펠로우십(Learning Lab Fellowship)이란
씨프로그램은 지난 2년간 러닝랩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배움에 대한 여러 시도를 지켜봐 왔습니다. 동시에 의미 있는 실험이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과 환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수많은 만남과 고민 끝에 2019년 11월 러닝랩 펠로우십을 시작했습니다. 러닝랩 펠로우십은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배움의 환경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실행하는 팀을 대상으로 지금 필요한 작업을 이행하기 위한 유연한 자원을 제공하며,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합니다.
멘토리는 농산어촌 청소년에게 리얼월드러닝의 기회가 열려있음을 믿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러닝랩 펠로우십을 통해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어른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을 목표합니다. 농산어촌에서는 어떤 배움이 가능할지 그 시도의 기록을 매달 한편씩 시리즈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