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청세 자기인터뷰 #02. 이재빈
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문 토론의 장입니다. 2017년까지 전국 28개 지역에서 2만 명 넘는 청소년들이 참여해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같은 큰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C Program은 청소년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기 힘든 질문을 고민하고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 있게 담아내는데 필요한 자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2017~) 정세청세를 함께 한 청소년들이 자신을 인터뷰한 글을 소개합니다.
말이 좋아 진정한 소통이고 혁명이지, 탁상공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으냐.
살아온 시간이 20년도 안 되는, 대부분 인생을 제대로 경험하기는커녕 학교를 벗어난 적도 없다시피 한 꼬맹이들이 인간과 삶, 정의에 대해 무엇을 논할 수 있으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세청세와 함께하며, 최근에 위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나의 시간을 정세청세에 쏟아붓는 건가. 내가 다른 청소년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야 있겠다만, 그게 이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세청세 행사장에는 14세에서 19세의 청소년이 모인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이 세계와 소통하는 인문 토론의 장이니, 그 주체가 청소년임은 조금도 이상할 게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토론을 나누는 주제는 결코 쉽지 않다. 당장 이번 주제만 봐도, 2018년의 대주제는 '인간이라는 가능성'이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 보기 위한 여섯 개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질문은, 대문호이자 사색가인 레프 톨스토이도 평생을 고민하게 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데 세 시간밖에 안 되는 행사가, 혹은 길다고 해 봐야 보통 두 달이 채 안 되는 행사 준비 기간이나 2018년 한 해가 충분할 리가 없다. 대략 두 달에 한 번꼴로 있는 행사는 전국의 더 많은 청소년들과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있는 것뿐, 우리의 사유는 시간의 제약이라는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터무니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부터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우리는 공부를 한다. 기획팀의 일원으로서, 공부 페이퍼를 쓰고, 공부 모임에 참여하여 나의 의견을 남들과 나누며, 점점 나의 생각에 살을 붙이고 깊이를 더한다. 이번엔 인문학 캠프에 참여해 다양한 강연을 듣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굳이 정세청세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글을 쓰는 건 언제든 할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수업을 듣는 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이미 학교 공부에 지친 내가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활동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리는 없으리라. 내가 정세청세 활동을 이어 나가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 중 하나도 '학교와는 다르다'는 점이니, 그 점 하나만은 분명히 할 수 있다. 학교와 정세청세의 어떤 측면이 다르냐고?
사실 끊임없는 비판이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교육도 겉보기엔 상당히 훌륭한 축에 속한다.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 보면, 단순히 개념과 문제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나 심화 탐구가 가능한 제시문들도 상당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활동을 우리가 직접 접할 일이 없다는 거다. 과목을 막론하고 선생님들은 시험 진도를 맞추기에 급급해 시험에 출제되지 않는 부분은 넘어가기 일쑤고, 우리가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는 이유도 시험 고득점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혔는지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일렬로 줄을 세우고 그 순위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로 인식하는 게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은 '공부'에만 치중하지 공부의 '목적'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런데 정세청세에서는 다르다. 이곳에서의 배움은 우리가 배움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고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배운 내용이 시험 문제가 되어 우리를 오답으로 유도하지도 않는다. 아니, 애초에 정답(正答)이 없으니 그럴 수도 없다. 각자가 내놓은 해답(解答)이 있을 뿐이다. 그 해답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명확한 하나의 정답을 확립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각자의 의견을 들어 보고, 이런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을 깨달으면 그걸로 된 거다. 우리는 기존의 학자와 사상가, 교육자들이 집대성해둔 내용을 암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확장적인 사고로 그들의 생각을 때로는 비판하기도 하며 더욱 성장한다. 배운 내용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내용을 이해하려 기를 쓸 필요도 없다. 상술했다시피 행사와 같이 우리의 고민도 끝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존의 프레임에 국한되지 않고 내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1회를 준비하면서, 교육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이 불확실한 미래의 순간을 위해 확실한 현재의 순간을 희생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비상식적인 구조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실제로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었는데, 공부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미래가 행복하기 위해서 현재의 불행이 전제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말이다. 질문을 받고서는 곧장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볼 수 있는 모습이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제기했다는 대답을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내용까지 언급하며 청산유수처럼 내놓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해 보면 내게 던져진 질문도 충분히 합당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앞으로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일 뿐, 합당하거나 당연한 것은 전혀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가치가 양립 가능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내 머릿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나 마저도 알게 모르게 선입견에 휩싸여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 내가 정세청세 활동을 이어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의 해답을 찾는 데 한 발짝 다가가게 된 듯했다.
다치는 것은 물론 두렵지만,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두려워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으며 몸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작은 실수를 두려워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의 발판을 다지는 중이다. 말하자면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아닌, 탁상공론(卓上共論)을 지향하며, 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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