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 청명]은사시나무_세상에닿(도록 돕)다

by 은사시나무

엄마탐구생활레터 쇼얼

함께 헤엄치며 서로를 키우는, 육추의 계절 이야기



vol. 2 청명, 세상에 닿(도록 돕)다



복지관 대학부를 마친 후 준이는 첫 월급으로 내게 순댓국을 사주었다. 처음 치료실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을 때 자기는 4학년이 되면 치료실을 그만둘 거라고 늘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법 마음이 잘 맞았고 긴 시간을 만났다. 15살 준이는 오랫동안 자기를 괴롭히던 아이에게 참다못해 주먹을 날렸고, 그즈음에 자신은 다른 아이들처럼 왜 길 찾기가 어렵고 도움 반을 가야 하는 지를 부모에게 따지듯 물었다. 19 살이 되었을 때 언젠가 이룰 독립을 바라며 장보기와 계산하기, 요리하기를 연습했다.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었을 때 또래 친구들은 학교, 군대 등으로 흩어졌고 거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연애, 결혼은 꿈꾸지 말라던 엄마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직장도 얻고 잘살아 보려고 늘 애쓰지만 차가운 시선, 건조한 말투를 종일 느끼다 비슷한 하루, 비슷한 주말을 보냈다. 준이는 가끔 통화를 하면 많이 외롭고 슬프다고 했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할 수 있는 공간, 사람이 없었다. 난 고민 끝에 그림 선생님을 소개했다. 준이는 어릴 적 뇌 손상으로 시지각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의지만큼은 간절하고 강렬했다.

여기까지가 5년 전 이야기이다.

우연히 5년 만의 출근길에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림을 그만둘 거라 했다. 취미로는 충분히 배웠다며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단다. 평생 만날 거라던 그림 선생님인데,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준이. 순댓국을 사줬던 23살은 어느새 33살이 되었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직장은 어떤지, 내 힘든 일도 전하며 웃었다. 그러다 오랫동안 그렸던 그림들이 집에 잘 걸려있는지 물었다. 준이는 단 한 번도 방에 그림을 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야 너무 했다. 나무 그림도 멋지던데, 하나라도 걸어두지, 자랑 좀 하지.” “뭐 그러게요.”


이상했다. 내 속이 시끄럽다. 누군가에게 그림을 꼭 보여주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외로운 마음이 채워졌다가 나눌 그 누구, 어딘가가 없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야. 그림 나중에 가져와. 내가 닿다 벽에라도 걸란다.” 그리고 일요일, 교회 공간 중 초록 리본 도서관 빈 벽이 눈에 들어왔다. 비어있는 그 회색 벽. 저곳을 우리 친구들에게 ‘세상을 닿는 벽’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청명에 비로소 봄바람이 회오리처럼 일고 겨우내 쌓인 생명력이 일제히 분출된다.

청명은 움츠리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나는 때 음이 완전히 양으로 변하는 때다.

그래서 나무 심기에 적당하다. 비로소 밭갈이하며 봄 농사가 시작된다.

<때를 알다. 해를 살다. 윤종빈 >」

그렇게 2026년 청명에 시작된 세상에 닿다 벽에는 느린 거북이, 지성이의 여섯 작품이 걸렸다. 직접 고른 여섯 개 그림은 색연필로 그렸다. 곤충, 자연,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지성이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있다. 눈이 커다랗고 똘망한 잠자리들이 날고, 꽃내음을 맡고 꿀 먹느라 바쁜 벌과 나비, 양계장 실습 다녀온 후 그려낸 암탉들과 마당 꽃들, 내 별명인 은사시나무를 멋지게 그렸다. 지성이의 시선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바라본다. 느린 거북이처럼 작업은 제시간대로 충분히 가져야만 한다. 매우 꼼꼼해서 칠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린 시절 사진부터 엮어보니 그림은 지성이의 말, 느낌, 생각, 사랑이 전해지는 통로였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계속 무언가를 그려왔고 다채롭게 자기가 마주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학교 교사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다. 어쩌다 만난 치료실 아이들이 그만두지 않아서, 같이 먹고 놀고 싸우고, 걷고, 그리고 같이 쓰다 보니 내 동무, 친구들이 되었다. 낳은 두 딸보다 오래 본 사이인 친구들은 생애 반 이상을 나와 같이 보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며 벌이나 나비처럼 도움을 주려 한다. 이는 내가 만나는 윤, 진, 하, 연..... 모두에게 가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비로소 봄바람 불며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는 청명.

생명의 힘이 번질 때 땅을 뒤집으며 봄 농사를 시작하듯

나도 뒤집고 뒤섞여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다.



은사시나무

곰렉씨, 화파와 순복이 두 딸과 대화할 때 신이 납니다.

처음 만난 6살 제자가 32살이 되기까지 함께 세상에 닿기 위해 애쓰는 치료실 교사입니다.

청명, 세상에 무언가 도움을 주는 동무가 많단 걸 느끼게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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