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

30일 시필사

by 정연주

"마음에 병이 나서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나무가 미소 짓는다 그걸 들으며 아니 그런 사연이, 나는 짐짓 놀라고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듣고 있으면
어쩐지 눈물이 난다

"수목원에는 나무가 많다고 들었어요 거기에도 병든 마음이 많이 있어요?"
그런 말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무는 빛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둘러싸인 채 느리게 생장하고 있었다

"수목원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끝으로 나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상스런 생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번성」, 황인찬, 『희지의 세계(민음사)』


올해 가장 집 값이 뛴 한남동 리첸시아에서 오래 전 스튜디오를 운영할 때다. 일이 없는 날은 남산도서관에 갔지. 남산도서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라이브러리가 아닌 도서관 뒷 쪽 공터. 한 줄로 줄지어 선 오래된 나무들에게 사열 받듯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벤치에 앉아, 무용함을 생각했다. 일이 줄어드는 것, 쓸모가 없어지는 것, 이렇게 사라져도 되는 건가. 남산에 한번씩은 같이 왔던 남자친구들도 생각했다. 특히 남산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함께 잡지를 보고, 한솥도시락을 먹었던 남자를 떠올리고, 그는 이제 이사님이 되었구나. 비빔밥을 같이 먹고, 배드민턴을 쳤던 또 누군가는 어느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고.


어쨌든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는 조금 탈색되어 읽힌다. 빛이 들어오는데, 지금이 아니다. 오래된 순간의 빛. 아니, 생각해보니 빛나던 순간 같기도 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같기도 한.


이 시는 2014년 11월 방문한 남산도서관 정간물실- 『현대시학』에서 처음 읽었다고 기록한 것이 있다. 왜 갔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도 모르게 “마음에 병이 나서, 잎이 나서” 묵지빠! 하며 읽기 시작해, 그냥 좋았다.


#번성 #황인찬 #희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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