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필사, 신해욱
맑고도 무거운 날이었다
그는 쓱 웃으며
나의 한 쪽 어깨를 지웠다
햇빛이 나를 힘주어 눌렀고
그를 벗어나는 자세로만 나는
그에게로 기울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시간이란
이제 다시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쓱 웃으며 나를
나의 의미를 미리 지워버렸다
시. 신해욱, <간결한 배치(민음사)> 중
*
남녀가 한낮의 벤치에 앉아 있다. 햇빛이 내리쬐자 어깨를 나란이 한 그림자가 그려졌을 것이다. 그는 장난처럼 가까이 와 그녀의 그림자 어깨 한쪽을 지웠다. 그에게 그림자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려면 그녀는 현실에서 그를 벗어나야 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별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 이별이 시작되었을 거라고 믿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