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30일 시필사

by 정연주

소리의 크기를 표시하는 단위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

세탁기 소리는 청소기 소리보다 다정하고

재채기 소리는 코 고는 소리보다 우습고

가위질 소리는 물 끓는 소리보다 단정한 것 같아


연못의 고요는 허구야 물고기들이 떼로 트림을 하고

야구장의 함성은 언제나 침묵과 고요의 시간 뒤에 오고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나갔지만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았다

희고 딱딱한 귀가 오늘은 파도 소리를 담으러 바다로 간다


한달 전에도 일년 전에도 내 귀는 거기 달려 있었는데

십원짜리 동전처럼 쓸모없이 생각되었는데

머릿속에서 귀는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남의 뒤통수는 늘 시원하게 보인다


파도는 시원할까 날마다 조금씩 뜨거워질까

추억을 녹이며 죽어가는 노인들의 미지근한 백발이여

평범한 소리를 담기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많은 거 같아

나는 매일밤 잠이 들고 말았지만


「스파이」, 이근화, 『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이 시를 읽은 후에는 어떤 소리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지. 그리고.


일본 여행을 하다가 우리말은 외국인에게 어떻게 들릴지 문득 궁금해졌다. 뜻은 알 리 없이 듣기만 해도 중국말, 일본말, 프랑스말의 차이를 금새 알아맞히는 걸 보면 언어에도 보이지 않지만 형태가 있겠구나 싶었다. 억양이 단조로운 서울 말씨는 차가운 러시아어와 닮았다 싶고, 일본 말씨는 싹싹하고 곁을 내주지 않는 컨시어지 같다는 생각, 프랑스 말씨는 솜사탕을 뜯는 기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서워 덜덜 떨었다. 조금 커서는 내뱉으면 사라지는 소리가 바람처럼 자유로워 부러웠다. 하지만 누군가의 별 뜻없는 소리에 사로잡혀 악다구니를 쓰기도 하고, 또 어떤 소리에 위로 받아 그만 엉엉 울어버리기도 하면서, 소리는 참으로 다양한 표정을 가졌다는 것을알게 되었다.


가끔 좋아하는 단편소설이나 에세이를 낭독해 소니 녹음기에 녹음해 둔다. 신기하게도 그저 책을 읽는 것뿐인데, 나중에 들어보면 그날의 공기와 볕의양, 낭독하는 나의 자세와 기분, 그즈음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소리에 녹음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나만의 사운드 북은 일종의 소리일기 같은 것이 된셈이다.


죽기 직전, 누군가의 목소리는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온다고 한다. 나는 누구의 목소리와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될까.(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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