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새로운 표준을 배워야 할 때
지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올리브가 한 마디 했다.
“변재원 님 아직 별일 없나 봐요. 무슨 일 있으면 카톡 보내라고 했는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정책국장이자 카카오임팩트의 펠로우이기도 한 변재원 님이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을 위해 정부 청사가 있는 세종시에 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넌지시 올리브에게 물었다.
“변재원 님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생기면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기자회견도 하고 같이 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작년에 읽은 한 칼럼*에서 고병권 교수는 심보선의 시 ‘형’의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는” 문장을 인용하며 <두 번째 사람, 홍은전 작가>에 대해 썼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시뻘게진 눈알을 본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다. 그걸 알기에 나는 세 번째에 서고, 겁이 날 때는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도망친다.”
그는 그래서 '두 번째 자리가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첫 번째 사람의 슬픔을 기록하는 홍은전 작가도, 이십 년째 제자리인 세상의 절망과 싸우는 변재원 님도 그 두 번째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다.
문득 두 번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몇 번째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카카오임팩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활동가와 혁신가들의 지원군이 되겠다고 했다. 과연 우리는 슬픔에 기댈 어깨를, 도움에 내민 손을 잡아줄, 그런 조직이 될 수 있을까. 당장 두 번째 사람이 될 패기나 여건이 되지 않더라도 세 번째, 네 번째라도 든든히 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한 주다.
*'고병권의 묵묵_두 번째 사람 홍은전' (경향신문, 2020. 10.12)
장애인의 날을 보내며 최근 읽고, 보았던 것들 중 몇 가지 소개.
1971년 장애 청소년 캠프에서 시작한 미국 장애인권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바깥세상과 달리 정상이라는 압박감이나 차별적인 시선을 받지 않는 이 캠프에 참여한 친구들은 이후 스스로의 권리를 자각하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1972년부터 미국에서 시작한 장애인권 운동. 한국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차별금지법, 교통 접근성(이동권), 탈 시설 운동 등을 위한 투쟁과 성취, 변화를 보여준다.
장애-비장애의 프레임을 벗어나 온전히 인간답게 일상을 누리게 하는 캠프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낸다. 가족이 자신을 과잉보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일 권리’, 사생활의 권리를 보장받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결국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캠프의 지도교사이며 1970년대 장애인권 운동을 이끈 단체 디스에이블드 인 액션(Disabled in action)의 활동가 쥬디 휴만은 맨해튼 도심을 휠체어로 막고, 보건교육복지부 샌프란시스코 지사 건물을 점거 농성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언제 원하는가?” “지금!”
“어디서?” “여기서!”
+ 벅참과 분노의 아카데미상 시상식 +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
<크립 캠프>는 2021년 올해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시상식 자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휠체어를 탄 감독과 주인공이 레드카펫에 설 수 있도록 경사로가 있는 무대를 만들고 방송사는 자막과 수어 통역을 제공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장애인이 만들고 출연하는 영화가 많아져야 하는 이유”라고 언급했다.
<크립 캠프> 덕분에 단편,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시상자로 첫 번째 오스카를 수상한 농인 배우 말리 매틀린(Marlee Matlin)이 나와 수어로 후보들을 소개했다. 여기까지 너무 벅찼는데, 아니 수어 하는 매틀린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다른 배우들을 비추기 시작. 이럴 거면 왜 수어로 소개하는 거야, 사운드와 자막이 나오니 상관없다인가... 하면서 분노했다.
김초엽-김원영 이름 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 주간지 <시사인>에서 번갈아가며 연재한 글을 묶어 낸 책이다. 김원영 작가의 전작들을 모두 읽어서인지, 개인적으로 김초엽 작가의 글이 더 좋았다.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 김원영 저, 사계절출판)』에서 밑줄 그은 몇 개의 문장들.
“수어로 의사소통하거나 음성 대신 문자 정보를 제공받는 것보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정상성 규범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86p)”
“지금 이곳의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장벽을 해결하는 일을 ‘언젠가’ 기술이 발전할 미래로 자꾸만 유예한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 수어 통역을 실현하는 데 최첨단의 놀라운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87p)”
“만약 사회가 ‘앉아 있는 것’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설계된다면 사람들은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을 것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132p)”
“인류 역사의 보편은 언제나 매우 특정한 신체, 백인-남성-시스젠더-이성애자-비장애인-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중립적 템플릿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 햄라이의 주장이다.(204p)”
책에는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걸음마’ 광고를 언급하며 ‘감동 포르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술은 장애인에게 정상성을 선물하고, 비장애인들은 그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감동을 받고 장애인들은 희망을 얻는 것이다. (중략) 스텔라 영이 비판했던 ‘감동 포르노’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KT는 2020년 AI 기술로 농인 목소리를 구현한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에서 눈물 흘리며 감동하는 관객은 청인이고 목소리는 청인이 듣기를 희망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많은 농인들이 이 광고의 문제를 지적했음에도 KT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2021년에는 “목소리 찾기”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김초엽 작가의 인상적인 멘트들
“수상을 하게 되어 기자 회견을 할 때 기자들에게 나의 장애 여부를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 작품에 다른 이미지가 덧씌워질까 봐요. 의외로 모든 언론이 언급하지 않았고, 언론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이 있는데 먼저 요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청각 장애를 갖고 있으니까 장애와 관련된 뭔가를 개발할 때 저에게 당사자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많이 문의가 와요. (청각 장애도 다 레벨이 다르고)그런데 저 하나만 조사해서 유의미한 데이터가 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장애와 관련된 기술은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굉장히 개인적인 동기로 개발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좀 더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장애인을 위해 내가 돕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성평등을 이루어야 되는 것처럼 장애도 사회적인 관점에서 실현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 시민의 책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립을 다시 생각한다' 중에서, 김도현(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문학 3』2020년 1호에서
“미국의 1세대 자립생활 운동가인 주디스 휴먼(Judith Heumann)은 자립을 의료적이고 기능적인 정의에 따른 자기돌봄의 수행이 아니라 “표준적인 몸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정신(mind)의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사회적 장애 모델을 정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는 자립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립 개념의 전환에 따라 전미자립생활협의회(National Council on Independent Living, NCIL)는 자립생활을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타인의 개입 또는 보호를 최소화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자기결정권’이 자립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중략)
도쿄대학교 ‘당사자연구팀’ 구마가야 신이치로 교수가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시설에 너는 살라는 건 보호가 아니라 배제다. 시설 밖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시설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발달장애인 시설에서 30년 산 여자가 나와 소통하지 못한 건 그의 몸 탓인가? 소통의 책임을 양쪽이 져야 한다면, 나는 왜 나를 기준으로 그의 장애 때문에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최한별 사무국장은 “혹자는 장애인이 탈시설 여부를 선택하는 것이 자율성의 존중이고, 이것이 곧 CRPD(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을 읽어보면 이 선택은 시설에서 나갈지 말지가 아닌, 지역사회에서 가져야 할 선택의 권리이자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to live in the community, with choices equal to others)”라고 설명했다."
유선애 작가의 인터뷰집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한겨레출판)』> 중, 아티스트 예지는 이런 답을 한다.
그동안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어떤 배움은
고의적으로 잊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는 관습이나 관성에 의해 배워온 정상성 또는 표준이라는 것에 대해 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서는 것이 아니라 앉는 것, 걷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것, 청각이 아니라 시각이 디폴트인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식과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변화의 줄 맨 끝에라도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