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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자의 휴머니즘

사르트르를 사유하기 위한 첫 번째 앎

by 고휘연

이 글은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실존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인간은 왜 자유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왜 모범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인간다울 수 있는가?



인간은 왜 자유로운 존재인가?


사람은 본(本)을 타고나지 않는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기 전에 그것의 필요성을 느낀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의자는 편하게 앉아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도구의 필요성, 즉 생산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본(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목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떤 성격, 본성, 성질, 본질은 그가 살면서 만들어간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나는 무엇이다.”라는 말은 그가 존재한 이후에, 나중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사람은 그가 살아가는 동안 선택의 순간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엔 오직 그 자신뿐이다. 어떤 천사가 내려와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이건 꿈인가? 그 천사는 진짜였나?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가?” 그리고 “내가 하는 행위는 옳은 것인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천사가 진짜라고 믿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 또 어떤 행위가 옳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그 행위가 그른 것이라기보단 차라리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또 그 선택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고독할 것이다. 어느 누가 그 천사가 진짜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 명령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할지 지옥으로 끌어내릴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엔 자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또한 그 몫이 있기에 선택에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 그리고 선택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또 하나의 사실을 시사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宣告) 받았다”라며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인간은 왜 모범적이어야 하는가?


“인간은 자유를 선고(宣告) 받았다”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은 까닭에 선고(宣告)를 받은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까닭에(또한 선택이 온전히 그의 몫인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근데 그 선택과 책임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걸까? 무엇을 위한 선택이고 무엇에 대한 책임일까? 선택과 책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모범적이어야 하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택에 관하여, 선택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선택하는 자신은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것이다. 내게 명령했던 천사가 진실로 천사의 목소리라고 믿으려 할 때, 그때 나의 결정이 순수한 나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의식이 나의 것이 맞나? 사실 악마가 선택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선택의 순간에 오직 나뿐이었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의식이 온전히 나의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내게 명령한 그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그걸 듣는 나는 어디에 있나. 꿈속인가, 현실인가? 나는 진짜로 존재하는 건가?
근데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분명히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의지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 의식은 나의 것이다.
이로써 선택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사실은 더욱 명백해졌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내가 확실한 존재이듯 타인도 그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타인도 자유로운 존재로써 선택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지구촌 혹은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세상은 나와 타인이 자유로운 확실한 존재로서 서로를 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살고, 죽는다. 이로써 인간은 ‘시튜아시옹’-인간이란 세상에 있고 세상에서 노력하고 타인 사이에 존재하고 거기서 죽는다는 필연성-이란 한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는 선택은 시튜아시옹 안에서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선택은 타인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타인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만약 결혼이 당연한 시대에 어떤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이 두려워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겠다 하면 그의 생각을 나의 경험에 빗대어 받아들이진 못해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순 없다. 또 나는 그러한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또 한 명의 비혼 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택의 영향력은 자기 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비혼 주의도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 위치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그렇게 정의하게 된다. 그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고 해도 그는 자신을 정의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은 강요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를 피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필연적 선택을 하는 행위 또는 선택지를 창조하고 또 다른 개념의 인간을 창조하는 행위를 ‘앙가제(engage)’라 하고 앙가제함으로 자신의 본(本)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한다. 인간은 시튜아시옹이란 필연성 속에서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앙가제하는 존재, 그리고 그에 대해 전적으로 앙가주망 하는 존재다. 그리고 시튜아시옹에 종속된 이상, 앙가제와 앙가주망은 필연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두려운 게 있다. 그것은 나의 글 때문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잘못 이해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필력이 부족해서 의미 전달에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잘못 읽혀서 타인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식을 정리하고 공유해야만 얻을 수 있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는” 깨달음과 지식의 흐름을 주도하는 인간이 되는 기쁨으로 나를 앙가주망하고 나와 더불어 타인을 앙가제하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다울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을 항상 현재로, 어떤 목적으로 내던진다(=기투(企投)한다). 이에 있어서 그의 주체성 말고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결정했고 그 행위 자체로 나를 투사함으로써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 내가 써야 할 글은 선험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즉 내가 써야 할 글은 내가 쓰게 될 글일 것이다.

간혹 휴머니즘이 어떠한 인간을 목적으로 삼고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상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명예를 중시해야 하고 고귀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휴머니즘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나치들 사이에선 유대인을 혐오하며 그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서는 것을 일종의 명예로 여겼다. 또한 그런 사람들 위에서 독일의 ‘정화’를 이끄는 히틀러는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숭앙하는 것은 유아독존적 휴머니즘에 귀착되거나 파시즘에 귀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숭앙처럼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맹목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반면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은 어떤 인간이 가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에게 있어 존재는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자신을 기투(企投)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에게 있어 그가 선택해야만 하는, 혹은 그를 규정하는 선험적인 것들, 예를 들면 나치즘, 파시즘, 또는 어떤 존중받아야 할 가치들도 없다. 오직 그가 살아가면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진실을 외치는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험적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기투(企投)하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이 파괴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실존주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범적인 인간성이란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류라는 범주 안에 속하는 개인이 결코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연히 발현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지향점은 인간에게 강요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ps. 나치즘이 민족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으므로 나에겐 파시즘의 한 종류로 보인다. 그러나 나치가 어떤 이들이건 간에 실존철학이란 범주에서 나치는 그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나치가 되기를 선택한 경우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택의 순간에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 인간이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알리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나치와 평범한 인간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한 사회가 선험적으로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인격을 우상화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현된 계급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애의 결핍은 독일인과 유대인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독일인은 스스로 자신들의 인간성을 타락시켰고, 유대인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선험적인 것은 맹목적으로 변질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즉 차이는 사회가 구성원의 정신적 자유를 제한하려 하는 것과 구성원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나의 삶을 복기하다.

지난해 말부터 실존주의에 대해 공부하면서 선택과 책임을 아무렇게나 남발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나 스스로를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독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무지했고 오만한 사람이었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 글을 쓴 이유, 형편없는 글솜씨임에도 쓴 글을 여러 번 퇴고하고, 지인들에게 보여주며 냉정한 평가를 바라고, 한 책을 수십 번 읽고 적고,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조금이라도 좋은 글을 쓰려는 정신노동을 감내했던 이유는 바로 이 글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란 진실과 마주해서 겸손해지고 신중해지고 조금은 이타적으로 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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