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관한 질문은 곧 나에 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이렇게 나와 인간을 같이 고민하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철학적일 수밖에 없기에 익숙하지 않거나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항상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했다. 나에게 들이닥쳤던 오랜 장마가 나를 늪지대로 만들어버려서 더 이상 나무를 심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나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독자는 이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나에게 재앙이 닥쳤는지, 왜 비가 멈추지 않았는지, 그리고 나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장마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가진 삶이, 아니, 오직 그것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한 친구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형, 저는 신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차라리 과학을 믿을래요.”
이에 대해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과학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해. 그 명료하다던 과학도 틀린 답을 제시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신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또한 인간에겐 그분이 있어야만 해. 선을 구원하고 악을 심판하는 그분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짐승보다 나아질 수 있겠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요즘 종교는 너무 세속적인 것 같아요. 모 교회 비자금 사건도 그렇고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려는 일도 있었죠. 게다가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도 보여요. 목사가 대선과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 일도 생기고 있잖아요. 저에겐 그들이 자기 뱃속을 채우려고만 하는 짐승으로 보여요.”
내가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들은 신앙이 부족한 것뿐이야. 신앙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이라면 짐승처럼 행동하진 않아.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신앙심을 공고히 해야 해.”
그가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저는 신앙이 없어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환경을 만들고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신앙보다 중요할 거예요.”
나는 말했다.
“아니야. 그런 생각은 분명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갈 거야. 왜냐하면 선악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일 테니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쁠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우리가 그것을 아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야. 게다가 인간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해. 따라서 완전한 존재자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을 하든 자신도 모르게 항상 어긋나고 말 거야.”
나는 계속 말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과학과 철학의 목표이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신앙을 배제하고서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그런데 과학과 철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찾은 답이 틀렸더라도 그것들이 언젠가 기어코 옳은 답을 찾는 이유, 또 우리의 삶이 고뇌로 가득하더라도 결국 옳은 길로 나아가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항상 보살피시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과학과 철학이라도 신앙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무용한 것이 되어버릴 거야.”
이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끝내 돌려놓지 못했다. 그는 나로 인해 종교를 부정하는 마음을 더욱 굳히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대답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신 외의 모든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가져야만 한다고 그 목적은 신앙이 되어야만 한다고 오직 신앙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겐 듣기 매우 거북하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재판장이라도 된 것처럼 선포했다. 신앙은 증명되었다!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느님의 은총이 너와 함께하기를! 나는 신앙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판결을 경건하게 읊곤 흡족해했다. 그것도 소심하게, 마치 다른 정신을 용납하지 않는 정신처럼. 그러나 그 어리석은 행동은 재앙을 불러왔다.
장마였다! 맹목적 믿음으로 내리는, 다른 가치들을 썩히고 없애는 그런 장마! 나는 다른 가능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서 친구를, 올바른 지식을, 영혼의 성장을 쏟아지는 비에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들은 장마로 인해 더욱 썩어갈 것들이었다. 성장의 공백에서 느껴지는 공허함, 단호한 말과 행동이 불러온 허무함, 이제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마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더 이상 꽃 피우지 않을 것을 알고 느끼는 슬픔. 마치 물먹은 수박처럼 하나같이 맛없고 하나같이 악취를 풍기는 것들이었다. 왜 장마는 멈추지 않을까? 나에게서 모든 것들은 결국 그렇게 썩어 없어질 운명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장마를 견디다 못해 사라져 버린 것들을 그리며 괴로워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주인의 존재, 오랫동안 내 의식에 숨어 교활하게 나를 이끌었던 정신, 때와 장소에 얹혀살면서 다른 얹혀사는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탐욕스러운 자, 정체성! 그런데 이미 많은 영혼으로부터 우상 숭배되고 있는 그자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정체성은 내게 이렇게 명령했던 것이다. 신앙을 증명하라고. 그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너는 크리스천이지 않냐고 물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교활한 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라 착각한다. 그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무엇이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인간은 그것에 연민을 갖는다. 혹은 그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렇게 인간은 그자를 우상화한다. 그리곤 노예가 된다. 정체성의 노예, 맹목적인 믿음을 갖게 하고 재앙을 불러오는 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라고. 바로 이것이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말은. 그래서 나를 진정으로 나답게 해주는 말은!
나는 진정한 재판장이 되어 그자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것은 앞으로 모든 행동을 내가 주인으로서 행할 것임을 선포하는 축제이기도 했다. 그자의 몸이 밧줄에 매달리고 괴음이 나오고 파르르 떨던 것이 멈추자 비로소 장마가 멈추고 햇빛이 구름을 뚫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