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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철학 정초(미완)

힘의 네 가지 축들에 관하여

by 고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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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문제는 정답이 아닌 표현을 기다린다.* 세계는 가능태로서 언제나 인간에 앞서 있다. 세계는 한 정신으로 서술할 수 없고 그렇다고 모든 정신이 한 세계를 서술할 수도 없다. 길을 잃고 표류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항해를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천체가 있다. 그것이 지평선 너머로 하강하고 나면 그와 같은 별들이 모여 강을 이룬다. 밤바다의 보이지 않는 파도와 고음의 바람 소리로 인해 이 어둠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지만 어쩌다 한 번 드러누울 때면 그렇게 펼쳐진 우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은 늘 불안과 양립하고 있다. 나는 늘 그렇게 이미 도태되어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하면서도 신비를 본다.

살아가는 데는 현실적 문제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 신중하게 안전한 다양한 방법을 계획하는 일은 중요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나의 철학적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확립할 필요도 동시에 느꼈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철학자가 되고자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다. 고맙게도 얼마 전 또 다른 해달이라 불리는 누군가에 의해 좀 더 면밀하게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반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철학적 성찰이자 지향하고자 하는 바임과 동시에 대화 가운데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말들이 많이 들린다. 동시에 철학에 대한 오해도 쌓이고 있다. 철학은 밥통이 아니다. 그래서 굶어죽기 십상이다. 그러한 것을 도대체 뭐 하러 배우려 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가난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꺾고 비틀어버리는지를 명백하게 보았다. 한국에선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것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어린아이로서도 그러하다. 그렇게 편견은 현실이 된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적이 있다. 이 현실이 도대체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부모의 탓도 어린아이 스스로의 탓도 아니고 불쾌한 욕지거리나 내뱉던 주정뱅이의 탓도 꼴사나운 조언으로 허세를 떠는 놈들의 탓도 아니었다. 정말 미치겠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개 탓이라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아무에게나 헛소리를 해 대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렇게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명상을 하면서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연예인들 가십거리 따위가 상전을 차지하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떠도는 예쁘고 볼품없는 것들만을 그저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며 가망없는 몽상만 해대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꺾이고 비틀리고 있다.

철학은 인간을 지향한다. 지금까지 쓴 것에 관해 단순하게 말하자면 “배고프다” 라는 낱말이 때때로 다르게 들리는데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당연히 실소가 터져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러한지 이미 알고 있다. 아니면 적어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히딩크가 “나는 배고프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것이 한 어린아이가 실컷 뛰어놀다가 와서 하는 “나 배고파” 와는 다른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계를 직관하는 것과 서술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해와 사실관계의 배경을 명확하게 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능성이 꽈리를 틀고 있다. 시스템은 이 가능성에 한에서 기능한다. 삶도 결국은 거기서 계속된다.





1.



한 국가가 어떤 통일적 가치를 지향하며 전체성에 빠지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이데올로기를 전 국민이 함께 말하는 시대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 해도 또는 한 사회가 전 역량을 이데올로기의 일련화로 집중시키더라도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실존적 차이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모든 스크린에서 같은 뉴스가 송출되고 있어도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같은 지점을 같은 방식으로 지향하지는 않는다. 화재뉴스에서 누구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고 누군가는 인터뷰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또 누군가는 활활 타오르는 대지를 보며 작열하는 예술성을 포착한다. 이러한 실존적 차이는 인간의 일상의 개별성을 보장해 준다. 그 차이는 존재자들 간의 개별적 시간성이란 전제 위에서 성립하고 사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불러옴으로써 사회를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대화와 토론이 유의미해지고 놀라움에서 즐거움과 슬픔이 양립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해 보기로는 인간의 모든, 그 차이에서 비롯된 일상들이 도덕적 잣대에 의해 생매장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한 사회의 모든 사태에 대한 전 국민적 참여가 그 사회의 도덕을 점점 고체화된 이데올로기로 변모하게 함으로써 그리하고 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모난 부분을 깎아 예쁜 틀에 알맞게 집어넣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를 묵인하는 개념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이다. 왜 그러한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명사회를 기능하게 하는 제1의 요인은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언어로 상호작용하는 인간은 개념을 필요로 하는데, 그 개념은 오직 차이를 깎아냄으로써만 쓰여진다. ‘나뭇잎’ 이란 단어는 모든 나뭇잎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모든 나뭇잎들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단어는 통일성을 띄는 것이다. 또한 단어의 이러한 통일적 지향성과 별개로 단어의 통일적 포괄성이 있다. 내가 ‘나뭇잎’ 을 쓸 때, 그 순간 만큼은 그것이 나뭇잎의 모든 차이를 암묵적으로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의미는 단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나뭇잎’ 을 쓸 때, 그것이 차이를 포괄한 것인지 아닌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란 범주로 포섭되며 단지 경험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인식되고 확정된 것만을 포섭한다는 점에서 통일적이다. 왜냐하면 인식-경험 바깥의 실재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 또한 가능성 그 자체로서 마치 ‘나뭇잎’ 이란 단어의 통일적 지향성처럼 통일적으로, 즉 차이를 묵인함으로써의 가능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더해 의식은 다만 포착하는 행위이자 지향과 다름이 아니다. 의식의 주요 특징은 편집이다. 시야 속 전 영역을 의식은 모조리 포착하지 못하며 단지 어느 한 부분에 시선이 닿을 뿐이다. 오감으로 주변 영역 자체를 그대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다만 의식이 이를 편집할 뿐이다. 그런데 모든 의식이 같은 정도로 편집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두뇌의 기능력에 따라 그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는 가정 하에) 기능력의 또 다른 이면은 —힘은 어떤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로— 에너지의 소모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곧 의식함이 피로감과 관련한다는 의미이다. 즉 의식은 기능하기 위해 편리함을 추구하며 감각의 편집을 통해 그리한다. 상호작용은 사회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 생물학적 메커니즘 위에서도 기능한다. 두 개체가 언어를 주고 받을 때 각 개체의 의식은 본능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모든 단어에 대해 그 단어가 차이를 포괄하고 있음을 생각할 여력은 점점 줄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상호작용은 차이를 묵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상호작용과정에 포함되는 개념들 또한 차이를 묵인함으로써 생성된다. 개념의 건축물인 이데올로기는 따라서 차이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차이를 묵인하는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을 존속시키는 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다. 현시점에서 아직은 개별적 시간성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는 언어의 통일적 지향성과 통일적 포괄성, 그리고 의식의 편집, 즉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세 가지 메커니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형성의 주체는 단지 무의식이고 생물학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서 실존적 차이에서 비롯된 일상들이 도덕적 잣대에 의해 생매장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데올로기에 관한 장황한 고찰을 너머 어떻게 일상이 묻히고 있는지를 말해야 하는 지점에 온 듯하다 : 한 사회의 가치판단은 점점 획일화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한 가치의 일련화를, 바로 그 언어와 의식의 특성들에 기초하여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현 한국사회는 약자에 대하여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가?

얼마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출근길 시위가 화제였다. 일명 전장연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시민을 볼모로 잡았다. —서울시장과 그 국회의원들에 의하면 말이다— 계속된 “볼모 잡기” 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볼모 잡기”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들과 이준석 국회의원과 전장연 대표와의 설전 그리고 시민들 간의 논쟁 등으로 전장연 시위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과열되었었다. 법적 분쟁에 까지 이어졌고 서울중앙지법이 이렇게 판결했다 : “전장연은 5분 지연시킬 시 500만 원 벌금,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승강기 동선 미확보 19개 역사에 2024년까지 설치”. 전장연은 이에 수용했지만 오세훈 시장은 “법치를 파괴하는 조정안” 이라며 수용을 거부했다. 반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상황에 대해 공감과 불만이 한데 섞인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던 것 같다. 어떤 시민들은 시위의 정당성과 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지만 어떤 시민들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시위로 인해 쌓이는 불편함을 참지 않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전장연 시위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관하여 언론에 보이는 사실들 외에도 강단과 일상에서라도 많은 다양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논란에서 한국사회는 단지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논쟁 만을 거듭한 끝에 아직 그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시민의식은 단지 주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선 필자는 이준석 국회의원과 박경석 전장연 대표의 토론은 핵심을 어느 정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토론에서 그들은 현실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특별교통수단(저상버스와 장애인 콜택시 등)의 지역 간 이동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뤘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시와 정부가 아니면 적어도 국힘정당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장애인의 요구를 당장 100% 달성하기란 현실적으로 (예산문제 등으로) 어려운 문제이며 시간이 지연되고 있지만 점점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 속도가 느릴 순 있어도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중증 장애인에 대한 교육과 일자리에 대한 언급과 장애인의 탈시설권에 대한 언급은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꼭 필요한 사안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 토론을 진지하게 봤던 사람은 알겠지만 박경석 대표와 이준석 의원의 토론 능력과 토론에 임하는 태도의 격차가 너무나 컸다는 것이다. —이 것은 박 대표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하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전장연 시위의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토론에서는 양측의 관점의 차이, 정보의 차이, 화술의 차이가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된다. 이 토론은 그 격차 때문에 시청자들로 하여금 태도논쟁에 빠지게 했으며 나아가 시위에 관한 도덕적 가치판단을 유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통해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처우 상황이 어떠한지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보단 전장연이 어째서 “시민을 볼모를 잡는” 시위를 하고 있는지 왜 하필 지하철 차량 개폐문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말하기 바빴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의가 도덕적 잣대에 의해 와해되었다. 그 잣대가 어떤 토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 해도 그러하다. 도덕적 잣대는 그것에 어떠한 정의가 있든 사람들의 오감을 한데 묶어 다양성을 와해시킨다. 한편으로 의식은 그 자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자극에 반응한다. 이 이유로 다양성의 와해는 사회를 위협하는 늘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 도사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전장연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몇몇 부분으로 갈라져 점점 더 제각각으로 격화되고 고체화될 것이었다. 지금도 전장연의 시위는 그 설득력과 정당성을 잃은 채로 이어가고 있으며 각종 뉴스기사의 댓글에는 도덕적 논쟁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이상 정치인들은 이 문제의 핵심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어느 지하철 역사에는 “전장연 시위로 시민 여러분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는 팻말들이 수를 놓아 시민들의 통로를 좁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후속 세대는 또다시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점점 구속력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그 기능력 자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도덕적 잣대에 의한 다양성의 와해는 곧 ‘실존적 차이의 무마’ 를 의미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전장연 시위와 그에 대한 논의는 당연코 한국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어떠한지를 향해야 했으며 이것만이 전부였어야 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논란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 토론자들의 역량과 정치인들의 발언은 단지 주변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들이 반복될수록 정상적인 논의는 점점 불가능해질 것이 자명하다. 시민의식이 격화됨에 따라 논의의 유연함과 신중함도 타자에 대한 관대함도 사라질 것이다.

도덕적 잣대는 이와 같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사회가 병듦에 따라 그 구성원의 삶도 병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다. 실존적 차이는 우리에게서 슬그머니 달아나 그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일상의 특별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사회가 전체성을 띄게 된다는 의미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도덕이 격화되고 고체화된 사회, 즉 차이가 사라진 사회에서 다양성은 도덕적 잣대에 의해 와해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와해된 사회에서 문화는 후퇴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정치는 고이고 썩은 내를 풍겨 순수한 사람들은 가까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까지 쓰면서 독자에게 또 다른 한 가지를 말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이전까지의 문단들에서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전장연 시위에 대한 한국 사회 내의 상황은 어떤 거대한 흐름이었다. 필자는 그것이 한민족의 숭고한 도덕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민족은 단단해졌던 것이다. 반면 민족으로서는 가슴을 뜨겁게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 그것들이 그들 스스로를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란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기능하면서 자신들을 돕고 있으며 나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차갑게 하는 것들은 늘 어렵고 재미없다. 그것들은 오감을 유혹하지 못한다. 그래서 민족의 의식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것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본모습이며 단단해져서 사회의 생기와 유연함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단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민족은 사태의 책임소재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2.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한계 지어져 있음은 오늘날 보편적인 지식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하여 단지 일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반면 그 한계 지어진 주체는 사유와 인식을 단지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하다. 주체는 무엇을 인식한다. 주체는 무엇을 사유한다. 이는 그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들을 과정 또는 결과로써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주체는 이처럼 한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은 어디까지나 관성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인식은 그 자체로 생성되지 않는다. ‘무엇을 인식함’ 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타자는 인식-주체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그저 영원히 수수께끼 일 뿐이며 단지 상호작용을 통해서 오는 이미지들을 그 나름의 구현된 정신형식으로 지엽적이고 자의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인식은 이렇게 또 다른 존재자에 의한 관성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한계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한계라고 인식하게 한 그 관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관성은 이제부터 인간의 인식과 사유 간의 관계에 관한 고찰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사유는 일반적으로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이란 4가지 법칙을 따른다. 바로 참-진리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다. 필자는 이 4가지 법칙들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먼저 동일률은 ‘A=A’ 와 같이 두 개의 항이 서로 일치함을 의미한다. 엄밀하게는 변수 A가 가리키는 값과 변수 A가 가리키는 값이 서로 같다는 말이다. 이 법칙에 따라 명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다” 는 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는 이 명제 그 자체로는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알고 있다” 가 중요하다. 역사책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라는 명제가 꾸준히 참으로써 전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정치란 나눔이다” 라는 명제는 훨씬 더 복잡하다. 명제를 이루는 두 항 “정치” 와 “나눔” 은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현상에 불과하므로 신체적으로 감각할 수 없다. 이는 또한 이성으로는 그것들에 대하여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정치와 나눔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란 나눔이다” 라는 명제가 참-진리이길 바랄 수는 없다. 정치가 나눔이기 위해선 두 항들에서 서로 상보적 관계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인은 나눌 수밖에 없다” 혹은 “나누는 것은 정치와 다름이 아닐 수 없다” 와 같이 정치와 나눔이 서로에 대해 필연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치란 나눔이다” 명제가 보편적으로 참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순율은 명제가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법칙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는 —축구선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유명한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맞을 경우에는— 참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살아있다” 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여기서도 “정치란 나눔이다” 와 같이 각각의 감각할 수 없는 항들로 이루어진 명제라면 더욱 복잡해진다. “정치란 나눔” 이지만 동시에 “빼앗음” 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눔은 빼앗음” 은 정치라는 시대적 개념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어서 배중률은 ‘A or ~A’ 또는 ‘A V A’ 로 표현되며, 두 개의 상반되는 명제는 참 또는 거짓으로만 나뉘며 이 외에 중간값은 없다는 원리다. 즉 두 명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아니다” 는 각각 참 또는 거짓이며 이 외의 값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라는 사실이 참이기 위해선 그가 철학자라는 사실이 기술된 역사를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그 토대가 되어야 함을 앞서 살펴본 바, 만약 그러한 토대가 없다면 그가 철학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참과 거짓 외의 값인 “알 수 없음” 이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충족이유율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법칙이다. 이는 곧 모든 사태가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며 그렇기에 그 필연성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논했듯이 문제는 단순히 명제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그가 철학자인 이유는 물론 그가 실제로 훌륭한 변증술로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무엇보다 그것을 사실이라 서술한 역사가 널리 읽히고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 어떤 결과가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다.

이렇게 진리-인식을 위한 사유의 4가지 법칙의 불완전함을 간단히 논해봤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사유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주체의 시대적 배경이다. 주체에게 있어 배경은 어디까지나 시대에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주체의 배경은 주체를 한계 짓는다. 그러한 배경이 있어서 명제의 값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명제는 주체에 의해 그의 배경을 수놓는 이미지로써 끌려온다. 반면 언어는 이 이미지화 과정 전체를 그리고 그 결과를 주체에게서 기능하게 한다. —서술의 진행을 위해서 앞서 논했던 단어의 성질을 다시 상기하자면— 이러한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는 주체에 의해 두 가지 특성을 갖게 되는데 통일적 지향성과 통일적 포괄성이 그것이다. ‘나뭇잎’ 이란 단어는 모든 나뭇잎을 가리키기 때문에 지향이요, 나뭇잎 각각의 차이를 무마하기 때문에 통일적이다. 또한 단어 ‘나뭇잎’ 은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로 하여금 그 차이들을 경험적으로 포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포괄적이요, 그러나 그 단어는 가능성 안에 포섭되며 그 가능성 또한 차이를 무마하는 지향성을 띄기에 통일적이다. 이때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 두 가지 성질로 인해 무용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띄게 된다.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된다. 그런데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단어들 간의 관계의 연결성에 있다. 그것은 논리이고 이 논리를 구성하는 배경이고 문화이며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임을 타당하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다. 이 연결성이 없다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임을 판단하는 것은 완전히 요원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 ‘판단이 요원해짐’ 이 곧 단어-관계의 무용성이 된다. 이 문장의 두 성질이 바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관성의 본모습이다. 이 단어-관계의 두 성질에 의한 인식을 토대로 사유가 이루어지며 그렇게 이루어진 사유로 또한 인식한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사례가 데카르트의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에 있다. 그는 여기서 주체에 의한 인식의 확실성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그 서술 과정에서 관성에 의한 인식 추동을 볼 수 있다.


“ … 그렇다면 지금 의심하고 있는 그 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하는, 즉 사유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하다. …”


이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그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 과 “존재” 가 그 스스로를 가능케 하는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나” 일 수밖에 없다는 단어-관계의 연결성에 기초한 가정이다. 반면 단어-관계의 무용성에 의한다면 이러하다 : 생각이 있고 그래서 생각하는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무엇이 ‘나’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을 주체라고 인식하게 한 관성이 있었다. 주체(主體)의 사전적 의미는 —필자의 방식대로 엄밀히 정의해 보자면— 말과 행동의 주인 된 형태란 의미다. 이는 곧 의식의 모습이며 그것도 시대적 배경 안에서의 의식으로서 또한 신체에 결부된 의식으로서 주관적인 의식이란 모습으로 보여지는 형태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주체에 대한 이 정의가 과연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가? 명제가 관성에 의해 시대적으로 판가름된다면 필자의 그 정의가 어째서 ‘주체’ 를 가리켜야만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할 때 비로소 ‘주체’ 라는 단어가 앞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며 단지 그 서술이 ‘주체’ 를 필요로 했음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주체’ 는 인식이다. 우리가 앞서 논했던 ‘한계’ 가 바로 일종의 인식이었던 것처럼 ‘주체’ 또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관성으로 말미암은 또 하나의 인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것을 주체로 인식하게 한 관성을 형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이를 추적할 때가 왔다. 데카르트의 생몰은 1596년 3월부터 1650년 2월까지다. 그런데 1618년 5월부터 유럽 내에서 약 30년간 종교전쟁이 발발한다. 그의 나이 단 22살부터 죽기 약 2년 전까지 그 전쟁을 보았단 얘기이며 이는 사실상 그의 모든 학문적 활동기간이 종교전쟁이란 배경 속에서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 전쟁은 인류 전쟁사 가운데에서도 참혹했다고 전해진다. ‘30년 전쟁’ 이라 불리우는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스 교회 간의 이념전쟁 동안 약 800만 명이 사망했고 전쟁의 주요 지역이었던 독일은 그 전역이 질병과 기근으로 파괴되었으며 도덕은 타락하여 마을은 공과 보상을 충당하려는 용병과 병사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탈당했다. 데카르트도 참전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는 그의 생애 동안 그런 참사들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17세기 유럽 사상은 15-16세기부터 비롯된 스콜라의 전통적 우주관의 파괴를 시작으로 케플러와 갈릴레이를 거치며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이어져 온 기계론적 세계관으로서의 자연과학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유한하며 중심에서부터 존재하는 우주라는 중세-스콜라적 우주관에서 무한하며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관으로의 이동, 천체를 움직이는 것은 영이 아니라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한 운동이라는 설명 등은 기존의 중세-스콜라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위태롭게 했다. 세계가 인간 이성의 합리적 사고로 완전하게 파악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시대를 지배했다. 데카르트는 그러한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서 이성과 그 주체 그리고 그것의 확실성에 관한 인식이 추동되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중세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년~430년)의 저서 <de vera religione(참된 종교)>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si fallor, sum(만일 내가 의심한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대가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지 식별하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의심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거든, 이 확실성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라. …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유의 법칙을 확립할 수 있다 : 누구든지 자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자는 [적어도 자기가 의심을 한다는] 한 가지 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 [의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실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자기로서는 의심을 않는 진실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는 진실한 사물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확실성과 사실상 완벽하게 닮아있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참된 종교” 인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통해 기계론적으로 세계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이 확실성을 통해 이성 외적 세계의 실재를 증명하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 확실성으로 내적 세계의 진리를 인식하려 했다. 필자는 그의 서술을 통해 그에게 데카르트와는 다른 확실성에 대한 인식 추동의 관성을 볼 것이다. 우선 그의 외재적 실재와 내적 세계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허위는 기만을 일으키는 그 사물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갖춘 미의 정도대로 자기의 형상을 감지하는 자에게 나타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관의 과실 때문도 아니다. 감관은 거기에 감지된 영상을 정신에 전달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는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이를 인식하는 주체가 어떠한지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외재적 사물과 내적 세계의 관계를 위계질서 하에 정립하면서 내적 세계의 중요성을 위에 두려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에게서 주체를 인식하게 한 연결성이다. 반면 무용성에 의하면 이러할 것이다 : 이성이 있고 그의 바깥이 있을 수도 있고 거기에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있고 그 인식의 주체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인식 주체의 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그 상태에 관한 생각도 있을 수 있다. 이제는 앞선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무엇이 이 관성을 형성했는지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 … …







3.



태초에 신체는 외재를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으로 감각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두뇌활동은 사물들을 각각 정지해 있는 상태 또는 움직이고 있는 상태로 인식했다. 그렇게 서술은 주어와 동사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동사로 표현되는 운동은 시간을 구분하는 지표로서 시제에 대한 인식을 추동했고 곧이어 시제가 서술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기초이자 필수가 되었다. (말하자면 동사는 언제부턴가 반드시 시제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서술이 반복하여 재생성됨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엔 저기 매달려 있던 사과가 오늘은 여기 떨어져 있고 내일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는 서술은 시제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사과와 시간의 흐름과 이를 보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서술이 최초이자 최후의 서술이고 또한 앞선 서술들과 뒤이은 서술들이 오히려 이보다 더 큰 풍부함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술은 더 이상 표현의 수단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반복됨으로써 새로운 인식 그 자체이자 그것의 토대가 됨과 동시에 신체-감각을 이끈다. 말하자면 시제는 서술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과 이에 대한 두 개 이상의 서술은 앞선 서술들과 뒤이은 서술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그렇게 된 서술은 새로운 서술임과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서술의 토대가 된다. 이 외재에 대한 신체-감각에서부터 촉발된 인식에의 충동이란 과정의 총체적 흐름 하에 서술은 반복하여 재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술의 계속되는 재생성’ 으로부터 곧 다음 세 가지를 연역할 수 있다.

첫째, 언어의 재형성과 서술의 재생성은 서로에 대하여 상호적 관계에 있다. 서술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서술의 재생성은 곧 언어의 재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그러하다.

필자는 언어가 앞서 논했듯이 태초로부터 신체와 상호작용에 의한 두뇌활동의 촉발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주어-동사 형태를 따른다. 그것은 신체가 세계를 태초에 주어-동사 형태로 서술하게 하는 감각을 서술에 의해 추동당했거나 그러한 인식을 추동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 말인 즉, 만약 신체가 세계를 존재와 운동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감각했다면 언어가 주어-동사 형태가 아닐 수도 있었겠으나 서술이 신체로 하여금 세계를 그렇게 감각하도록 추동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쩌면 시간 자체가 지각되지 않아서 언어에서도 시제표현은 애초에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과거-현재-미래가 지금처럼 직선적 흐름으로서의 시간으로 이해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나 또는 흐름이 순환하는 시간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서술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시간관은 오랫동안 직선적이었고 지금도 이러한 시간관은 보편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시간관 하에 서술도 오랫동안 재생성되어 왔다.

둘째, 서술의 재생성은 신체-감각, 인식, 세계를 재생성시킨다. 또한 서술은 그것들을 토대로 반복되어 재생성된다. 모든 서술은 최초이자 최후의 서술임과 동시에 앞선 서술들과 뒤이은 서술들의 가능성으로서 있다. 그러한 서술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서로를 재생성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 서술이 유일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앞선 서술들과 뒤이은 서술들에 있어 가능성으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요소들이 바로 신체, 인식, 세계이다. 태초에 서술은 이들에 뒤이어 생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은 태초에는 서술에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에 의해 재생성된다. 예를 들어 전율은 반복적인 인식에 의해 침전된 무의식적 반응에 따른 감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율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차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율은 원초적 감각이 아니라 태초 이후에 어떤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 사건이 바로 서술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서술은 바로 재생성된 서술이며 따라서 전율과 그 반응 원인도 재생성된 것이다. 또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생성,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소멸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서술의 재생성이다. 세계는 서술에 앞서있을 때 자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서술되어질 뿐이다. 모든 학문, 모든 가치, 모든 시스템, 모든 주체가 바로 이 세계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서술되어질 뿐이다.

셋째, 서술의 재생성은 어디까지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재생성, 곧 해체와 재구성의 반복은 힘을 전제로 발생한다. 충돌하고 해체된다. 대립하며 재구성된다. 이 충돌과 대립이 바로 힘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또한 힘은 실존의 표지다. 실존하고자 하는 존재인 현존재는 힘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재생성은 현존재들의 상호작용을 그 원인으로 한다. 말하자면 서술의 재생성은 바로 이 현존재가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연결성을 포착함에 의한 또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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